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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2:23~28 2026-08-30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앞에서도 사건마다 장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v6에서는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한 것으로 마음 속으로 불만이었다면 다시 v16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의 행동에 제자들에게 불만을 나타냈다면 여기서 부터는 노골적으로 따지고 달려든다. 특히 v24에는 “ἴδε” 우리말로 “이것 보세요!” 라는 투로 노골적이고 항의하는 모습이다.

항의하는 사람들도 점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v6에서 ‘서기관들’으로 나타나고 v16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로 그리고 오늘 내용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논쟁이 점점 심화되어 감과 함께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점점 종교의 지도급으로 옮아 감을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조금은 절제하고 주춤거리는 모양새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특히 오늘의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문제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부분으로 항의하고 나서는 것을 본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걸어가면서 밀이삭을 잘라 비벼먹은 것은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23:25)는 율법에서 허용된 일이었지만 다만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고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바른 이치를 설명하시는 것으로 저들의 항의를 일깨워 주신다.

안식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법들은 그 중심이 사람이지만 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말씀에도 이해가 될 리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이고 방법이셨지만 마침내는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중의 하나였던 십자가에 매달아 중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Ⅰ. 안식일의 잘못된 이해(23~24)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안식일 문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유였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요9:16f) 주님께서는 이럴 때마다 선한 비유를 들어 저들의 옳지 못함을 일깨워 주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의 일행이 먹었던 것과 마12:1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눅14:5),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3:4; 눅6:9)가르치시지만 이미 반감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23) 복음 전하시는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도 주로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들어 가시고 움직이는 모습들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 나타나는 밀밭을 지나가시는 것이 어디로 행하시는 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마가는 익어가는 밀이삭들이 고개를 숙여가는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라는 사뭇 낭만적인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23b)라는 다만 밀이삭을 따는 모습만을 기록하는 반면에 마12:1b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라고 밀이삭을 먹었다는 기록이고 눅6:1b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상황을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면 ‘배부른 제자들이 이런 시비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했을까?’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즉, 제자들이 시장했다는 이해를 할 수 있고 그 시장을 면하기 위해서 밀밭사이를 걸어가며 밀이삭을 따서 비벼 먹으며 길을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런 사랑의 이해에서 본다면 바리새인들도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해를 해보면 역시 사랑의 사람들이 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사랑의 사람들에게는 구태여 법이 필요 없지만 시비를 가리는데 언제 법이 먼저인 것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예수 그리스도께 바리새인들이 직접 말하는 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처음이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저들의 말하는 투를 보면 ‘이것 보시오, 당신은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쳐 놨길래 이런 짓을 하는거요!’라는 저의를 표현하는 것 같다. 저들이 적어도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따서 허기를 채우려는 것을 봤다면 오히려 측은히 여길 수도 있지만 오로지 법을 지키는 것을 명예로 삼았던 저들에게 그러한 긍휼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의 항의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는 말씀을 근거로 여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당부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혹사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랑이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그저 안식일에는 무엇이든지 해서는 안된다는 이해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조차 일로 판단하는 것이다.

단순히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추수로 확대하고 먹기 위해서 그것을 비비는 것을 타작으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관계성의 차이에서 볼 수 있는 간격이다. 계속 뒤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다는 저들의 핀잔을 보겠지만 사랑과 존경의 관계였다면 항의가 아니라 오히려 먹을 것을 제자들에게 줬을 수도 있다.

의심과 미움의 마음은 지나치게 상황을 확대해서 이해하고 하는 행동마다 시비거리로 대항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자세로 사랑으로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다름을 볼 수 있다. 이런 결과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서로가 너무나 다름을 본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사건도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서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에게 이 바리새인 같은 행동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음식도(25~26)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인 다윗의 예를 들어 전승된 전통보다도 법이 만들어진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질문조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주님께서 예를 드셨던 이 말씀의 배경은 삼상21장이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 일행이 당시 놉땅에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자신과 일행의 굶주림을 고백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내용에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행했던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율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했던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인하여 놉땅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조차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만이 살아나와 다윗 일행과 살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25) 다윗과 일행들이 먹었던 하나님 앞에 안식일마다 새것으로 바꾸어 차리는 진설병(레24:8)은 그것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레24:9) 이 떡은 안식일에 새것과 바꾸어 내린 다음에 먹을 수 있는 대상을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하여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먹는 곳도 분명히 정해져 있다.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러한 규례가 지켜져야 하는 기간도 분명하다.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즉, 바꿀 수 없는 법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럼에도 다급하게 먹을 것을 요청하는 다윗에게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삼상21:4b) 즉, 성결 하다면 먹을 수 있다고 말하자. 다윗은 그런 거리낌은 없다고 말하여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 일행에게 그 떡을 주어 먹게 했던 사실을 예로 드신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 “읽지 못하였느냐[Οὐδέποτε ἀνέγνωτε? 정확한 지식을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은 겉으로 나타난 보이는 것 보다 ‘그렇게 된 내면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라 시는 질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호세아 선지자의 요청이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우리 부모가 나를 향하여 하는 말씀도 들리는 그 소리 보다는 그 말씀을 하고 있는 중심의 마음을 이해해야 그 말의 본 의도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런 이유에서 호세아는 다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탄식하시는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온 갓 가능성을 다 예상해 두고 만들어 지기 때문에 그 만들어진 법 조문 한가지로는 법정신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늘 문제가 생긴다.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그 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의 부작용은 안식일 문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금지조항의 율법들이 다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26) 여기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증거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금기사항을 어긴 것에 대한 기록으로 율법의 제사법에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이라고 명시하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제사장의 이름이다. 마태나 누가가 이 마가처럼 제사장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지 않아서 더욱 쉽지 않다.

삼상21:1~6에 다윗이 진설병을 얻어먹은 사람은 아히멜렉인데 여기 기록은 그의 아들이었던 아비아달 제사장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이해를 해 볼 수 있겠지만 이 일이 있은 후에 사울의 목자장이었던 도액이라는 사람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리고 결국 이 도액에 의해서 아히멜렉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가족을 죽이고 다윗과 동고동락을 하다시피 살아남은 한 사람이 아비아달이며 물론 다윗 일행이 이 일이 있을 때 아비아달도 함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참고를 위해 병행구절들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마12:4)이라 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눅6:4)라고 금기 사항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율법으로는 금지된 일반인들과 제사장들과의 구별된 금기사항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어겨질 수 있었다면 안식일에 밀이삭을 비벼먹는 일이야 문제삼을 것도 못됨을 말씀하여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오히려 무색하게 만드셨다.



Ⅲ. 사람이 안식일의 중심(27~28)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글자로만 알고 있는 안식일의 기본정신 즉,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저들의 영적인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의 제사장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은 이 안식일을 주신 보다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안식일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31:14~15)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에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덧붙여서 복된 날이 사람들로 옴짝달싹지 못하는 두려움의 날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공포만으로 매주의 안식일을 지냈지만 예수께서 구원의 주님이신 것은 이런 가혹한 죽음의 형벌만을 강조하던 옛 계명에서도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람 사랑을 위한 뜻을 이해시키는 데서 완전히 새로운 이해가 되었고 생명의 교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랑의 이유 때문에 주신 계명들이 오로지 부정적인 하지 말라는 쪽으로만 이해되고 쓰여졌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데 그것도 사람들의 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이 것에서도 칼을 누가 들고 있느냐 하는 이치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사랑의 법들을 하나같이 왜곡하고 잘못 적용함으로 오로지 금지조항이 되고 말았다는 의미이고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의 대표적인 예로써의 안식일의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 기록된 율법대로 라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일반 사람들인 다윗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먹은 것이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이해와 더불어 정작 문제가 되었던 안식일의 본래의 정신을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뜻대로 새롭게 이해를 주시는 말씀으로 덧붙이기 때문에 “또 이르시되”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선언은 이스라엘의 어느 스승이나 제사장들로 부터도 들어본 적이 없는 획기적인 이해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으로 안식일을 이해해 왔을 것인데 전혀 새로운 해석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한동안 저들의 마음을 혼란케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도 이런 안식일의 이해를 들은 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선언하신 안식일에 돌아가 보면 사실 안식일은 율법 이전부터 주어진 언약인 것을 창세기2장 첫 부분에서 읽게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1) 한 다음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 하나님은 피곤을 모르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과연 이런 ‘하나님께 안식이 필요 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분이시지만 창조의 역사를 6일동안 이루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혹사시키는 범죄를 이미 내다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40:28) 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이전부터 주어진 안식일을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2)라는 내용속에 주신 의미를 읽게 된다.

첫째는 이날을 복되게 하셨다. “복되게 하다[בָּרַךְ, 무릎을 꿇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의 의미들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두번째로는 “거룩하게 하셨으니[קָדַשׁ, 깨끗케 하다, 성별하다, 봉헌하다]” 함으로서 이 두 낱말들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님께 경배의 의미와 함께 피곤의 회복을 목적으로 함으로 육신이 쉬면서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식일이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분명한 목적의 이해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날이란 특별한 날이 있을 수 없다. 유대인들의 절기나 명절의 날도 마찬가지로 그 날에 하나님을 만나고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날에 능력이 있거나 거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14:5)고 지적하고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4:10)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럼으로 엄밀히 말하면 ‘거룩한 주님의 날’도 옳지 않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에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날을 구별하는 것은 대부분 이방 종교에서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 이 말씀은 안식일 논쟁의 결론 같은 말씀으로 태초의 창조 사역 이후에 사람의 영육의 회복을 목적으로 안식일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임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서 휴일에도 일을 시키는 관행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쪽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는 사람의 귀중성을 마음에 두고 가축이나 머무는 객에까지 육신적 휴식을 명령하셨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의 종교의 삭막함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배고파서 밀이삭을 잘라 비벼먹는 것을 추수하고 타작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해서 정죄했다. 이런 이유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과 죄인의 정죄하려는 눈으로 보는 것의 근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반항적으로 대항해 오는 바리새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율법은 사람을 살리려고 주신 것이지 사람을 얽매거나 죽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심으로 반대자들의 입을 닫게 하셨다.

분명 안식일은 사람을 복되게 즉, 육신이 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최초로 안식일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든 사람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