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막1:38~45 2026-08-02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환호하고 반기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 말미에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6~37)라는 내용을 본 바 있다. 귀신을 쫓아내고 온 갓 질병을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하는 것은 어쩌면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을 만나려고 하는 것 보다 더 사람들은 주님 만나기를 기대하고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이 같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제 자신으로서는 부럽기도 하지만 역시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인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신 사명에 더 충실 하시려는 분명한 의지를 볼 수 있고 하늘의 일꾼이요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감탄을 가지기도 한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내용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인간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나병 걸린 사람을 치료하시는 또 다른 주님의 권능을 대하게 된다.

율법속에서조차 인간사회와 격리를 명령하고 있는 나병환자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모습은 주님의 고치시는 능력 못지 않게 당시에 이스라엘 속에 지켜져야 하는 율법을 어기면서조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대담함과 어쨌거나 이 비극적인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만 들어도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 가련한 인생의 믿음 때문에 사실적으로 운명이 바뀌는 실제적인 믿음을 이 나병환자를 보면서 배우게 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다만 제사장에게 자신의 치료된 몸을 보이고 모세를 통해서 명령하신 치료의 절차로 제사를 거쳐 사회인으로 복귀를 명령하셨지만 치료받은 이 나병환자는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주신 주님의 사랑의 역사를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라는 치료의 감격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하나님과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죄의 사람이었던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영원의 운명이 바뀐 사실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도전을 받게 된다.



Ⅰ. 진리의 도를 전하러 오신 예수(38~39)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복음 증거는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우리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시는 것보다는 복음증거를 위하여 다른 마을들을 찾으시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바람직한 결과를 얻지는 못하신 것 같다. 오늘 날도 그렇지만 그 때도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의 복음 보다는 복음으로 나타나는 부스러기 즉, 질병치료라든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도 귀신들려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은 복음의 목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다는 제자들의 보고에도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8f)고 다른 곳을 찾으시는 이유는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의 기록들을 보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 “마을[κωμόπολις, 읍, 도시같은 마을, κώμη, 마을, 촌락 + πόλις, 도시, 성읍, 도시 국가(성벽이 둘러싸인, 크기가 크거나 작은)]”이라는 표현은 시골의 작은 동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갈릴리 주변의 북쪽의 도시들을 보면 가버나움을 중심에서 해변은 아니지만 위로는 고라신, 아래로는 달마누다(막달라), 오른쪽 위에는 벳새다, 오른쪽 중앙에 위치한 거라사 등의 도시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도한 기록들을 공관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38b) 함께 기록하고 있는 병행구절을 보면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4:43)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고 이 일을 확산시킬 제자들을 양육할 뿐만 아니라 가장 궁극적인 역사는 자신을 온 인류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군중들에게 인기를 얻으시는 것도 복음을 더 널리 전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신 것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지만 보이는 세상의 것에 유혹되어 본연의 사명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이런 것들을 그 근원부터 차단하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또 그분을 따르는 일꾼이요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39) 군중들의 바라는 기대보다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귀중한 사역을 행하신 것으로 여기 기록된 대로는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는 어느 한 사람도, 작은 마을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엿보게 된다.

여러 회당이라 했는데 이스라엘 안에 이렇게 많은 회당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조금은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본래 회당이 바벨론 포로이후에 각국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장소였다면 본국에 돌아와서는 당연히 성전중심의 신앙이 되었을 것임에도 일년에 3절기를 제외한 안식일 모임은 이 회당들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회당에서 도를 전하시는 것은 물론 여전히 귀신들을 내쫓으시는 사역도 지속하셨음을 본다.



Ⅱ. 한 나병 환자의 치료(40~44)

나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도 치료하신 일이 그리 흔치 않은 것은 레위기13~14장에 보는 대로 나병으로 판정을 받으면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격리하는 것이 율법시대에서부터 있어왔던 이스라엘의 전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나병환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것은 우리가 읽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결단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소외된 지역에 따로 기거하는 나병환자들이 혹시라도 움직이다가 사람이 가까이 올 때는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레13:45) 하면 사람들은 그를 돌아서 지나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이름없는 나병환자는 과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주님께 나아와서 그 믿음대로 소원을 이루었음을 보게 된다. 만약에 이 나병환자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제사장에게 정결을 선언 받기 전에 한 사람에게 라도 발견되었다면 분명히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을 치료하신 후 제사장으로부터 깨끗케 됨을 인정받을 것을 가장 우선 과제로 주셨던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영원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분리된 운명을 가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오염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40f) 앞에서도 언급했던 대로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치료해 주시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조금이라도 가졌더라면 이 사람은 절대로 나아오지 못했을 것은 사람들에게 발견이라도 되는 날에는 격리된 삶마저 도 끝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어떻게 어떻게 하여 주님 발 앞에까지 와서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하소연을 올린다.

그 절박한 모습이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이다. 어찌 보면 온전하다는 사람보다 이렇게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믿음은 더 좋은 것을 본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b) 이 고백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자신과 같은 절망적 처지에 있는 사람까지도 사랑이 극진하심을 믿고 간구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반응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41f) 율법적으로 따진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대시는 것은 이미 금지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나병에 오염되실 수 없는 분이시며 율법을 어기고 왔다고 할지라도 그 율법 조차도 자신이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그 생살이 튀어나오고 진물나는 몸에다가 오히려 손을 대시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그 나병에 손을 대는 순간 부정해져서 시간을 기다려 정결예식을 치뤄야 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름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눅10:30~36에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심을 몸소 보이신 것이다.

그러시면서 조용히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41b) 우리 주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과 긍휼에 목숨 바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의 긍휼도 우리 주님의 그것에 비교될 수 없으며 어떤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는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우리 또한 그분의 긍휼과 사랑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 않는가!!!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42) 우리 주님의 말씀은 결코 허세가 없으심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이 겪은 그 순간은 그의 평생을 다 산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귀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도 마가의 특징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곧[εὐθύς]” 우리 주님의 치료에는 어떤 질병이든지 시간이 필요치 않은 완전한 것이었다. 옷으로 가렸던 울퉁불퉁한 생살 덩어리도 계속해서 흐르던 진물도 그 순간에 완전히 사라지고 가릴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피부와 모습을 회복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가리고 왔던 수치스러운 모습은 없어졌을 것이다.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43) 이 말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인기를 경계하심을 읽을 수 있다. 또 이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는 완벽하게 치료하셨음에도 아직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고 만약에 라도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나병을 치료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제사장은 그의 정결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을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이제 엄히 경고하신 말씀의 내용이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44f) 그를 치료하신 것만큼이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는 사랑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다음 구절에 보는 대로 이 사람은 주님의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마침내는 예수께서 동네에 들어가시지 도 못하고 한적한 곳에 계셔야 했고 오히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주님 계신 곳으로 찾아 모여드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하게 되었으니…”(44m) 그럼에도 이 사람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치유를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볼 때 제사장에게 정결예식을 받은 후인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나름대로는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행동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 사람이 아직도 나병으로부터 깨끗함을 선언 받지 못한 상태였었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도 없었을 것이고 가까이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44b) 이 주님의 명령에는 우리 주님께서 직접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말씀하셨던 대로 모세의 율법을 이행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깨끗케 됨을 증거할 것을 명령하심을 본다. 이 나병환자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오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발각되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 사랑과 긍휼에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 누림을 본다. 이것은 오늘 믿음의 사람들에게 같은 도전을 주고 있다. 하나님과는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저주와 죄의 질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맡기되 우리의 생명과 삶을 모두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같은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Ⅲ. 사람들이 찾는 예수(45)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하게 경계하셨음에도 이 치료받은 나병 환자였던 사람의 자신의 삶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능력을 감출 수 없어서 동네마다 사람마다 전파하고 너리 퍼뜨린 것 때문에 주님의 복음 증거는 당분간 침묵을 지키셔야만 했던 안타까움을 보게 되는데 이런 이유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님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45f) 여기 “그러나”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엄히 경고하셨음에도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서 라는 이해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아셨기 때문에 우리 번역에는 “엄히 경고하사” 정도로 단단히 경고를 했다는 정도로 번역되어 있지만 “엄히 경고하다[ἐμβριμάομαι, ~에 대해 분개하다, 노하여 흥분하다, 매우 분노하다,← ἔν, + βριμάομαι, 말처럼 코를 푸르릉거리다, 화가 나서 씨근거리다]”라는 의미들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람이 자신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 일을 퍼뜨림으로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것을 이미 아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일면에는 자신의 받은 은혜를 많이 널리 전파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잘하는 것 같은데 주님 당시의 상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당연히 병 고쳐 주실 분으로 알아 환자들은 데리고 나오면서도 정작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교훈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그런 인기 위주의 방식을 원하지 않으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의 소식은 넓게 멀리 전파되야 하지만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어 증거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45m) 이 사람 자신의 나병치유의 감격이 동네마다 전파되어 사람들이 병자치료를 위하여 모여듦으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한적한 곳에서 진정되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을 기록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여기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기록이다.

이 표현으로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 다시는 사람들이 보이게는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라는 기록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 “다시는… 못하시고[μηκέτι, μή, + ἔτι, 아직 아니다.]”의 쓰임새를 이해하면 연결되는 내용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닌 것을 이해하게 된다.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한 것은 마치 v35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 하셨던 것처럼 사람의 왕래가 없는 동네 밖이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계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사람들은 찾아 나오고 모여드는 것을 보는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우리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45b) 이런 모습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위안을 가지기도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찾으셨다. 그럼에도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으시고 인류의 고질적이고 영원히 치료될 수 없는 영혼의 질병인 죄를 치료하시려고 오셨다. 이것을 지나치는 어떤 영광이나 인기도 원치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질병 중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은 당시로서는 나병이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사람들과 교제가 전혀 불가능했던 나병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던 희락의 동산에서 쫓겨나 마지막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아담의 후예로 난 사람들의 고질적인 영혼의 저주스러운 죄의 질병과 같다.

이 죄의 저주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없이는 영원히 치료될 수 없는 저주중의 저주이고 고통중의 고통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죄의 은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표적에 넋을 잃고 이 귀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 주님의 오심과 희생은 이 영원한 저주에서 모든 사람이 치료되고 회복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그렇게도 원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제물로 주셨다.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깨끗케 되었음을 천사들 앞에서 선포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다.

때로 치료받은 감격이나 사죄 받은 감격이 감정으로만 행할 때 우리 주님의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知情意의 인격적인 신앙보다는 감정을 앞세워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증거를 방해할 때도 있다. 사람의 자랑과 기뻐하는 것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