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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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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2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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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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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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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 가셨고 그곳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나타내시자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고 당시의 의료적인 혜택을 받을 수 없던 사람들은 가족 중에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우리 주님께 데리고 왔던 것으로 보이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시작이었다면 다른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은 더 쉬울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주님의 활동은 주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과 자연을 향한 기적들도 나타내시게 되는 데 이 마가복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수난사를 기록한 뒷부분 11장~를 제외한 앞의 1~10장까지의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신 역사가 47%라는 분석을 한 사람도 있을 만큼 많은 정신질환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 읽은 내용은 특별히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이 몰려 들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래 베드로는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1:44)고 하는데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물을 버려 두고 따라 나섰지만 아직도 그들의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고 독특한 것은 베드로의 장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것으로 질병치료를 시작하신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 중에 환자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안식일에는 옮겨올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가는 저녁때에 많은 병든 사람들을 데려왔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모두 치료하신 후에는 쉬셨겠지만 동트는 새벽이 되자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한 기도를 하시고 다른 주변 마을들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서시는 내용이 다음 시간의 말씀까지 이어지고 있다.
Ⅰ.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시다(29~31)
공관 복음에서 같이 보는 대로는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눅4:38f)라는 병행 구절에 보는 데로 회당을 나오셔서 바로 베드로의 집에 가셨지만 귀신을 쫓아 내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을 것임에도 다만 이제까지 부르셨던 제자 4사람과만 들어 가셨던 것은 아무래도 베드로의 장모가 앓아 누워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짐작을 해보게 된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한 후에는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온 것을 치료하시는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29) 나중에도 보는 대로는 이 4제자들 중에 결혼한 제자가 베드로 즉, 시몬이었음을 바울의 편지에서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나중 사역을 하면서도 아내를 데리고 다닌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좀 독특한 것은 그냥 시몬의 집이라고 만하지 않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공동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어쨌든 그 집 사정이 그림으로 보는 것 같다. 결혼한 베드로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안드레이지만 또 거기에 독특하게 친 부모가 아닌 장모를 모시고 사는 형편이 특별한 구조를 생각하게 한다.
나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한 사건의 장소마다 데리고 다닌 3사람이 여기에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였듯이 이 처음부터 베드로의 집에 물론 그의 형제인 안드레가 있긴 하였지만 언제나 중요한 신앙적 사건이 있는 장소에는 이들 만을 데리고 가셨는데 대표적인 예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실 때(5:37)와 겟세마네의 기도의 장소(14:33)였을 것이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30) 안타깝게도 저녁이 되어서 회당을 나와 들어간 베드로의 집에 주님께서 들어 가셔서 먼저 들으신 것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내용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 의사출신인 누가는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눅4:38) 무슨 열병인지 기록은 없지만 심하게 앓고 있었다는 것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주님께 말씀드린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도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베드로의 장모가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유익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집에 들어서시는 주님께 안타깝게 이 사실을 알려 드렸을까? 하는 사실이다. 행9:39에서 다비다(도르가) 라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모든 과부들이 그의 선행을 말하면서 베드로에게 죽음을 안타까워해서 살려낸 사건과 비슷한 경우로 여겨진다. 이것은 바로 뒤에 병이 낫자 말자 예수님 일행의 수종 드는 것을 봐서도 가능한 판단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30b)라는 내용으로 마치 야고보의 기록처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는 치료를 위한 기도의 필요성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실지라도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기록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는 베드로의 신성을 주장하여 신부(神父)들의 독신주의를 지켜오게 한 베드로를 마가는 그의 장모와 함께 살았던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종교적인 권위를 위해 성경을 넘어서 만들어진 교리의 문제성을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31)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주님의 권위를 나타내시는 모습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눅4:39) 하였지만 생명을 친히 가지시고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으셔도 다만 꾸짖는 것 만으로도 귀신을 쫓아내실 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으셨다. 사실 병을 고친다고 하는 것은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우리 주님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본다.
중요한 것은 열병이 떠난 이 여자분의 모습인데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31b)는 모습이다. 어떤 중병도 치료되고 나면 재활치료가 필요한 것이 치료된 이후의 과제로 남는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는 즉각적으로 모든 건강 상태가 전과 같이 활동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치유 받은 이 여인의 자세는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함께 자신의 집에 데리고 들어간 나머지 세 사람을 위한 수종이라고 이해되기 때문에 저녁을 준비해서 대접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만고의 모범이 된다. 여기 “수종드니라[διακονέω]”의 시제 형태는 과거형태이면서 지금도 섬김이 계속되는 형태로 쓰여져 있다. 질병의 치료이든지 보다 근본적인 죄의 사죄이든지 치료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 지속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고 여기서 짐작해 볼 수 있는 한까지는 갈릴리 전도를 하셨던 우리 주님께서 필요하실 때마다 시몬의 집에 들르셔서 섬김을 받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Ⅱ.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다(32~34)
이제 시몬의 장모의 치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사역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장소가 시몬의 집 앞이었는 지는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표현대로는 예수께서 계셨던 집 앞에 온 동네의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우리 주님께서는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으로 볼 때 치료받지 못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2) 안식일이 끝나가는 지금의 토요일 해질 때 모든 환자들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대인들의 율법 때문이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이 율법 조항도 사실에 있어서는 사람을 혹사시키는 것을 방지하기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장치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계율적으로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가르쳐진 이 안식일조항 때문에 나중에도 나타나지만(2:23~28, 3:1~6) 질병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조차 안식일에는 죽어가도 손댈 수 없는 당시의 종교적 병폐가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 마가복음을 통해서도 안식일 정신을 바르게 일깨우심을 2:27에서 보는데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바로 이해되지 못하면 주객이 전도되는 것처럼 사람을 위하여 온 갓 계명을 주셨지만 그 계명이 사람을 옭아매는 모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2b) 우리는 불편한 데가 나타나면 무슨 전문의를 찾아가야 치료가 될 수 있는 지 어려워하고 혼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는 내과나 외과는 물론 정신과와 같이 질병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데려가고 믿음으로만 맡긴다면 치료되지 못할 질병은 없었음을 보면서 ‘만병의 의원’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33) 요즘 우리 표현대로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문 앞이 시장을 이룬다.’는 말 그대로였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으니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전혀 귀찮아 하시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께서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34f)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묘사로 기록되고 있다. “예수께서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34f) ‘각종 병든’이라는 말과 ‘많은 사람’으로 앞의 v33의 표현대로 ‘모였더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는 시제에서 볼 때 회당에서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소문이 퍼져 가버나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의들의 환자들을 데리고 모여들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표현은 고치시며 와 귀신을 내쫓으시되 라는 표현이다. 각 사람의 불편한 곳이 어디이건 차별 없이 고침을 받는 모습을 본다. 나중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오시고 특히 이 주님의 역사를 직접 목격한 베드로에 의해서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6)는 모습의 시작이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34b) 했는데 영적인 존재인 귀신은 야고보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한 것처럼 예수께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3:11)라는 고백처럼 그리스도 이신 것을 알고 또 주님의 권세에 자신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까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굴복하고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8:29)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대적 마귀이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도 마귀로 부터는 신앙고백을 받기를 원치 않으셨다고 한 것처럼 자신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오해가 없어야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이 말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마귀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역시 무조건의 영광을 받으려는 자세는 역시 주님처럼 원치 않아야 할 것이고 오히려 합당하지 못한 영광이라면 거절해야 할 것이다.
Ⅲ. 새벽에 기도하심(35~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시면서도 언제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있었다. 시작하시는 갈릴리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심을 본다. 그를 찾아 나온 제자들의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다는 전달에도 치료와 귀신 쫓아내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곳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파해야 하신다며 자신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거절하신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35f) 물론 베드로의 집에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된다. 온 동네가 불편한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다는 앞의 기록으로 봐서 과연 그 밤에 얼마나 쉬셨을까 생각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아직 날이 밝기전에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 아버지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의논하시기 위한 기도를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기도에 한결 같은 분도 없으시다. 그 풍성한 능력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 든지 중요한 과제를 앞두시고는 기도하시는 일상을 뵐 수 있다.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b) 다만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하였지만 그곳이 집 부근이었는지 동네 밖이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고 구태여 위치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단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다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피곤하심에도 주님의 새벽은 언제나 기도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네 사람의 제자를 부르셨지만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도 인간적인 선택이 되지 않고 영적인 선택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2~13) 제자선택 중에는 그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단지 새벽에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후에도 자신을 임금 삼으려는 군중을 뒤로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6:46)는 기록을 본다. 어떤 유혹이나 능력을 사용하심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아버지와 긴밀히 의논하심을 본다. 마지막 베드로의 세번의 부인 앞에서 조차도 기도하셨음을 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2f) 물론 이 기도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위에 희생을 당하면서도 지속되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셨다면 영력이 부족한 오늘 우리야 얼마나 기도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36) 어쨌거나 이렇게 일찍이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일어나 찾아 만났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말로는 단순히 “뒤를 따라가[καταδιώκω, 탐색하다, 찾아가다, 추적하다]”라고 번역하였지만 본래 쓰여진 낱말의 의미는 그보다 더 간절히 찾고 찾아서 주님을 만났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은 단순한 간절함으로 기도하시는 주님을 찾아 나서는 대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인기와 자신이 따르는 위대한 스승을 찾겠다는 열정은 있었지만 우리 주님과 같은 영적인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모습과는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 제자들이 주님을 찾은 상황을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이 누가복음2:43~47의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결되는 v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물론 이것은 아직 그들에게는 영적인 가치를 이해할 수 없는 무지함 때문이었을 것이고 나중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채워지고는 전혀 다른 제자들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 그 때까지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권능을 맛보지 못했던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당에서의 주님의 가르침과 귀신을 내쫓으신 능력과 베드로의 장모를 중한 열병에서 치료하셨고 가버나움에서 모여든 모든 질병가진 자들을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았기 때문에 주님을 찾지만 마치 기적의 떡을 먹고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는 모습과 겹쳐서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지만 안식일이기 때문에 중병에 걸린 사람의 치료조차도 방치해야 하는 종교에 매인 어리석음에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계명의 기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면 자구에 매인 편협 된 이해보다는 이 의미를 모든 신앙에서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사랑)이 되는가 지체들에게 덕(사랑)이 되는가?” 또 죽을 저주의 질병인 죄에서 치유 받았다면 주님의 나라를 위한 섬김은 육신의 삶 동안 당연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치료는 육신적인 것이든지 영적인 것이든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시다. 그럼에도 귀신들이 아닌 오늘 구원받은 나를 통해서 창조주요 구세주로 고백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전지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 하실 일을 위해 사람들의 인기보다 피곤한 몸이심에도 새벽 미명부터 기도하셨다면 육신의 욕구에 더 강한 오늘 나(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할까! 육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바라심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f) 라는 사무엘의 자세를 다시 기억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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