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막1:23~28 2026-07-19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구체적인 역사가 기록되고 있다. 회당에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앞에서 이미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바 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2) 그럼에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처음의 놀람은 귀로 들은 교훈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나타나는 우리 주님의 사실적인 역사를 보게 되는 데서 또 다시 놀랐고 이러한 일은 이 마가 복음 속에서 계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증거이다.

계속해서 이 귀신을 내쫓는 주님의 역사는 이 마가복음 속에 자주 등장하지만 이런 부분에 조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이전의 상황과 이후의 영적 상황이 분명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믿음의 사람들의 귀신 쫓는 일들이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귀신 쫓아 내시는 사건을 오늘도 재현하려는 일련의 종교인들의 모습은 경계되는 부분이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맞은 ‘부흥회’에서 강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그대로 따라 행해야 한다며 예를 들었던 내용이 이 마가복음 8:22~26의 벳세다의 시각장애자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들어 처음 안수했을 때 사람이 거꾸로 보이기 때문에 다시 안수했더니 그때야 바르게 보였다는 이야기는 수 십년이 지났어도 생각에 남아 있다.

이 마가복음에만 해도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이 11번이나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죄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창세기3:15의 예언처럼 마귀 사탄의 머리가 상했고 그런 이유에서 인류의 범죄 후와 사죄를 완성하신 구속의 사건을 중심으로 영계는 마귀 사탄이 활개치던 과거의 시대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마치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일꾼이나 자녀 된 것이 증명되는 것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7)라는 말씀을 오해하는 이 마가복음16:14~18의 사건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6:17 “믿는 자들에게는”을 ‘모든 믿는 사람’이라고 이해한다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러한 약속은 v14에 이유를 마가를 통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후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능력을 나타냈던 것을 사도행전 속에서 본다.

이런 말씀을 나눌 때마다 인용하는 성경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하신 복음의 확산을 위한 은사적인 언약이 온전한 것이 올 때, 이루어질 때(고전13:10) 즉, 객관적인 진리의 기록인 성경이 완성되면서 은사적인 부분이 점점 물러나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거나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딤후4:20) 라는 두 곳의 기록이 참고되는 말씀들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꼭 같은 모습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들을 재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는 모습들이다. 경계한 대로 이런 부분을 너무 사모하고 바라다보면 진리의 성령의 역사보다는 어둠의 영들의 이용을 당할 위험성도 있다는 사실을 경계로 가지면서 어떤 시대나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생명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철저히 순종함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잃지 않는…



Ⅰ. 더러운 귀신과 거룩한 분(23~24)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고통 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므로 그 죄의 약점을 가장 잘 이용하는 마귀들에게 붙잡혀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자유케 하시는 것은 언제나 사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고통에서 놓이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역사(役事)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 첫번째로 보는 것은 들어가셨던 회당에서 만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치료하신 것으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놀람과 감동을 주신 것이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23)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맨 먼저 들어간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상황을 마가는 “마침[εὐθὺς]”이라고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곧, 즉시”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낱말이 쓰였다. 어찌 보면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들어 가실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의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거기에다가 귀신 들린 사람을 준비해 두신 것과 같은 분위기이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정확하고 헛되는 일이 없으시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더러운[ἀκάθαρτος, α 부정+ καθαίρω, 깨끗하게 하다, 청결케 하다]” 정결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성경 속에서 대부분 질병들의 원인을 귀신 들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이전의 대부분의 육신적이거나 정신적인 불편함들을 귀신 들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이런 불편은 분명히 죄의 결과로 있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이성적인 현대 의학에서는 정신질환으로 이해할 것이고 성경은 좀더 사람의 내면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의학에서는 나타난 외면적인 현상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내면적인 영적인 것이든지 외면적으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는 차이를 느끼지 않고 치료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지 못할 것은 없었기 때문이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우리 사람의 저주받은 형벌의 치료를 위하심임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는 희생은 너무나 감사하고 귀중한 사랑의 역사였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23b) 빛이나 진리는 시끄럽지 않고 고요해도 그대로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이 되지만 더러운 귀신은 스스로를 밝히고 요란 한 것을 여기서도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마귀는 절대로 잠잠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두움의 하수인들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견딜 수 없었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우리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비웃던 나사렛 예수를 귀신은 오히려 높이고 인정하는 것이 차이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4f)라고 오늘 제목으로 잡은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어둠의 영의 호소를 듣는다.

어둠은 빛과 함께 거할 수 없고 어둠은 빛을 견디지 못한다. 빛 앞에 어둠에 감춰져 있던 모든 것은 드러나고 마는 것은 어려운 이해가 아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둠이 선포하는 것이고 이런 사실들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조금만 이해를 했을지라도 그렇게까지 우리 주님을 대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과 관계가 없으시다. 이것을 사람들은 몰랐어도 귀신 들린 사람이 알고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m)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이 귀신은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로 칭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5:9에서는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머물던 사람에게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라는 표현을 보는 것처럼 어둠의 세력들은 대부분 무리를 지어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괴롭힘으로 사람들이 힘겨워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m) 이것은 귀신의 외침에서 나왔지만 바른 판단이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b)는 사실을 이미 증거한 바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심을 귀신은 아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이해를 조금 더 넓힐 수 있는 내용을 마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귀 사탄은 반드시 멸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최종적인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두번째 오신 후에 있어질 것을 계시록(계20:3)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더러운 귀신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b) 마치 신앙고백 같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통한 외침은 더러운 귀신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진 거룩한 분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대한 마귀들의 고백은 이 외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여!”(마8:29)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5:7)라고 주님의 신성을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중요한 것은 마귀 사탄이나 귀신 같은 어둠의 하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고 멸망시키려는 이 악의 무리들을 멸하러 주님께서 오신 사실을 영물인 저들이 육신의 사람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Ⅱ. 절대적인 권위자(25~26)

요즘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됨을 스스로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렇게 그 사람을 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면 잠잠하라는 명령 대신에 ‘그래 더 크게 소리를 질러라!’고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확실히 거룩하신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으셨다. 자신의 유리한 입장보다는 긍휼에 풍성하신 우리 주님은 그 때까지도 귀신에 붙잡혀 힘겨운 삶을 살았던 이 사람을 한 순간이라도 평안케 하시려고 즉각적으로 귀신을 꾸짖고 쫓아 내심을 본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25) 우리 주님은 절대로 영광에 목마르신 분이 아니시다.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지만 사람이 아닌 귀신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책망하신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기뻐하시지만 마귀 사탄이 자신을 인정하시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심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도 우리 주님으로부터 책망받는 일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합당할 것이다. 마침내는 최종적인 선언을 하신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25b) 여기 말씀하신 잠잠하라신 명령은 그냥 ‘조용히 해라’ 정도의 표현이 아니다. “잠잠하라[φιμόω, [입에] 망을 씌우다, 재갈을 물리다, 침묵시키다]”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시는 명령도 즉각적이다. 이제껏 그 사람을 괴롭혔으면 즉시 나오라는 단호한 주님의 명령이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단호한 명령에 반응은 역시 즉각적이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26f) 귀신은 자신이 나오는 증거를 분명히 나타냈다. 그 사람에게서 순순히 내버려 두지 않고 나오는 것도 자신의 분감을 실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어둠의 세력은 복음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상하지 않은 것은 역시 주님의 권위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26b) 앞에서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했던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가면서도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목청을 크게 진동시켰다. 그 소리의 내용이나 종류가 무엇이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둠의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대로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아무리 흉악할지라도 우리가 절대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어떤 흉악한 마귀 사탄일지라도 우리를 절대로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Ⅲ. 권위 있는 새 교훈(27~28)

이 사건의 결과는 모든 사람이 다 놀랐다는 사실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은 중단되었고 끝으로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권능을 보여준 바 없고 다만 회개를 외쳤을 뿐이지만 회당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이상의 교훈과 역사(役事)를 사람들에게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놀라움의 결과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 마침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 4백년의 예언의 침묵속에 나고 살았던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앙적 지도를 받기는 하였지만 앞에서도 본 것처럼 사실적인 하나님의 역사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례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생활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가르침과 신비의 역사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종교는 언제나 변화도 없고 생명도 없다. 그런 무사안일 속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행하신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경험은 전혀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마치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확인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여기 사람들에게서 서로의 반응은 “다 놀라” & “서로 물어”라는 표현으로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 중에 예외가 없었다는 묘사와 당한 신기함을 서로 묻는 모습으로 한번의 명령으로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귀신이 빠져나가는 사건은 저들이 경험해본 바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들을 상상하게 한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27m) 그들이 지금까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였었지만 이제까지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그냥 새로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나 능력이 아니고 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b) 이 사실이 바로 충격의 이유였다. 보이는 어떤 신비한 사건정도가 아니라 귀신에 사로잡혀 제정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을 해왔던 사람이 꾸짖고 명령하신 한마디에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 버린 그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들이 신성시 여기는 영적인 공간에 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때의 회당에 오시기 전의 상태를 그대로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귀신들이 들락거릴 정도로 영적인 권위가 없었던 그들의 모임을 생각할 수 있다는 이해를 가능케 한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 나서 거룩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사람이라면 어둠의 세력이 그런 사람의 삶에는 절대로 들락거릴 수 없을 것이다. 또, 함부로 참소하지도 못할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는 바울 사도를 통한 분명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8) 이 사건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처럼 퍼져 나갔다. 예수의 소문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주님의 인적 사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일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 소문이 퍼지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도 “곧[εὐθύς]”이 쓰였고 그 범위를 “온 갈릴리 사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하는 표현이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마4:24ff)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여기 합당한 고백의 삶을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생명을 가지신 자요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며 그 주님은 그를 순종하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같은 생명의 권한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 빛과 생명의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는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냥 한번 감격하고 끝낼 그런 분이 아니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끼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바르게 전할수록 귀신의 수하에 살 던 사람들이 생명의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