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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분의 독생 하신 아들 되심을 인정받으시고 광야로 이끌려 마귀에게 하나님의 아들 되신 증거를 확인하시고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침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신 것이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회개시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중차대한 일을 위해서 육의 사람이 되어 있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신 혼자서는 한계가 있고 당연히 이 귀중한 일을 함께 할 일꾼들이 필요하셨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이 먼저인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규범처럼 꼭 이런 일반적인 틀에 맞춰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방법과 시기를 그대로 따르시기 위함임을 이해하게 된다. 또 이렇게 택하셔서 3년을 데라고 다니시며 훈련시키시고 가르치셨어도 하늘로부터 성령을 힘입기 전에는 우리 주님의 의향이나 뜻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신앙을 지도하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는 너무나 다른 권위를 볼 수 있었던 것에서 더욱 놀랄만한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지적하셨듯이 무거운 계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그 가르침에 전혀 순종치 않는 모순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는 모범처럼 수고나 무거운 힘겨움은 자신이 감당하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평안과 자유의 쉼을 주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가르치시거나 선포하신 말씀은 틀림이 없으신 데서 권세 있는 분으로 증거하고 있다.
Ⅰ. 베드로 안드레를 부르심(16~18)
갈릴리는 이스라엘 하면 연결되는 민물 호수이지만 그 범위나 크기 때문에 바다로 불려 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 바다의 해수면보다 200M가량이나 낮은 호수이다. 이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4사람의 일꾼들을 부르시는데 물론 대부분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갈릴리 출신인 것은 나타난 사실이다. 복음서마다 제자 선택의 내용이 차이는 있지만 역시 이름들은 다르지 않고 대부분 우리 주님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따랐었다. 역시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먼저인 것으로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6) 성경에 나타나는 데로 갈릴리는 알려진 별명만도 두개가 더 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눅5:1는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했는데 “게네사렛[כִּנְּרוֹת, 킨네로트, 하프모양을 닮은데서, 긴네롯, 긴네렛(כִּנּוֹר, 킨노르, 수금, 하프)]”은 그 호수의 모양에서 연루된 OT에서부터 불려 진 이름이다. 다른 하나는 五餠二魚의 기적으로 5천명을 먹이신 벳세다 역시 이 호수 가에 위치하는 것으로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요6:1) 비교적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로마의 황제인 티베리우스(Τιβεριάς)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하셨지만 주님께서 소일거리를 위하여 어떤 곳을 기웃거리실 분이 아니라는 데서 이 사건도 우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예정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이곳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만나시도록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6b) 누가복음5장에서는 베드로가 그물을 내렸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기록되고 있는 과정을 이미 주님께서 지켜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 그 숫한 사람들 중에 어부들일까?’ 의구심이 생기기는 하지만 역시 v17에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는 생선을 잡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복음에 사로잡으시려는 뜻일 수도 있다. 물론 농사하는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면 추수를 위함이라는 같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7) 여기에서 부르시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심을 확인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람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만 그를 따라 걸어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삶을 본받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럼으로 “나를 따라오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은 우리의 삶에 전혀 새로운 방법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아래에서 낫지만 위로부터 거듭난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원리를 여기서 배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보인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반응이 더 놀랍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자세이기도 하다.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8) 이 단순한 표현에는 많은 의미들이 들어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뵌 것은 그날 처음이었지만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기간은 평생이라는 차이에서 그들의 선택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먹고 살아온 일터와 삶의 수단을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엉뚱한 약속 그것도 사실적인 것이기 보다는 어쩌면 막연한 약속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이미 이런 표현은 OT에서도 쓰인 바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렘16:16f)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명령이다. 그럼에도 그들 형제는 이러한 주님의 부름에 전혀 미련을 두지 않았다. 한번쯤은 저울질해 보고 확인해 볼 수도 있는데 이들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들의 평생을 자신들을 먹여 살린 그물을 뒤에 버려두고 따라 나섰다는 것이다. 사람이 단순하다고 이렇게 단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면서 행하는 모습들을 보면 침착한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것은 더더욱 아님을 본다.
사실 신앙의 자세가 이래야 한다고 우리는 자주 말씀을 나누곤 한다. 신앙은 복잡하게 앞뒤를 헤아리고 골똘히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주님을 믿고 확신한다면 어떤 것을 하라 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는 성경에는 이러한 사건들을 수없이 자주자주 접하면서도 주님께서 무엇을 하라 명하시면 오히려 자주자주 머뭇거리고 버리라고 하는 것조차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앉아 저울질하는 경우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한마디에 “곧[εὐθύς,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는 순종만이 역시 베드로 다운 모습이었고 오늘 같은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를 도전하는 모습이다.
Ⅱ. 야고보와 요한의 선택(19~20)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성미 급한 베드로를 자신의 일꾼으로 불러 데리신 주님은 이 인류구원을 위한 역사에 정해진 12제자들 가운데 다음 주자들을 불러 따르게 하신다. 사도들 중에서 한사람은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고 한사람은 가장 오래 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두 형제들이다. 이들 역시 주님께서 별명을 주시는 것을 보면 평탄한 일반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3:17)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를 내었는지 시끄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이런 별명을 주셨을 것이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19f) 베드로와 안드레는 다만 그들의 이름만을 기록했을 뿐인데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까지 거론한다. 세베대는 “여호와께서 주심”이라는 뜻과 함께 야고보는 이스라엘에서 너무나 유명하고 흔한 이름이고 요한 역시 “여호와의 은혜(선물)”라는 뜻을 가지는 이름들이다. 병행구절인 마4:21에는 좀 더 자세하게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라고 그물을 깁고 있는 사람들이 야고보의 두 형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는 물론 품꾼들과 함께 라 하여 베드로 형제의 상황보다는 큰 범위임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주님의 만남을 누가는 좀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눅5:10f)하여 주님께서 밤새껏 헛그물질 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심으로 잡힌 고기를 보고 놀랐다는 표현이다. 또 다른 누가복음과의 연결은 그들이 동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19b) 야고보의 형제는 그의 아버지와 품꾼들과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음을 마4:21b 본 바 있다. 베드로처럼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다음의 出漁를 위하여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복음서들의 차이는 있다. 직접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일선의 일이 있는가 하면 그 일을 위해서 구멍 난 그물 코를 기워서 들어왔던 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도 복음 사역에 귀중한 역할의 차이를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주님은 머뭇거림이 없으셨다.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20) 역시 병행 구절인 마태의 기록이 보충적이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22) 여기에도 “곧[εὐθύς, 즉시]” 머뭇거림이 없는 그들의 순종을 본다. 베드로의 결단보다 더 큰 결단이었다. 그들이 고기 잡는 기술을 평생 가르치고 삶의 울타리인 아버지와 그들이 먹고 살 재산이라고 해도 좋을 배를 함께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다. 마치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셨던 아브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베드로나 이들의 “예수를 따라가니라”는 순종이 대단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좋은 평판를 받고 있는 선지자가 아니셨다는 사실이다. 촉망되고 이름있는 선지자가 아니라 나중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 갔을 때도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11)라고 무시당하는 나사렛 사람이었음에도 이들이 “나를 따라오라!” 하신 한 마디에 “예수를 따라가니라”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나중 예수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라 하신 가르치심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날 신앙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가족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혹은 재산을 지키는 일들로 신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라오라!” 불으심을 받고 머뭇거림 없이 따라 나선 이들을 하나님은 미리 아셨을 것이기 때문에 역시 부르셨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언제나 그 쓰심에 합당하도록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 때와는 다르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한 많은 사람들로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어도 절대로 손해날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은 이 부르심 받은 제자들처럼 순종하여 복음증거의 시작을 장식했던 제자들처럼 이제는 이 역사의 마지막을 위해서 믿음으로 응답하는 …
Ⅲ.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가르침(21~22)
여기서부터 마가가 주로 기록하는 이적담들이 시작되고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기적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증거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함과 함께 역사 되고 그런 입장에서 이적을 나타내려는 의도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증거를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하시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다가온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 가시고 이 회당속에서 드디어 우리 주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게 되는데 오늘 마지막 부분이 이 일을 위하여 회당에 들어가시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감동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21) 여기 나타나는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로 또 공관들이 많이 있는 도시로 마태가 일하던 세관 역시 가버나움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도시에 들어가시고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 가신 것은 역시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OT에서부터의 전통적으로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종교적 행사를 위해서 모이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은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일 수 있는 도시들마다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장소로 흔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더러 사는 도시들이면 어김없이 거기에는 “회당[συναγωγή, (함께 불러모으다, 함께 데리고 오다) 집회, 회중, 회당]”이 있었는데 회당은 건물을 말하는 동시에 모인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는 오늘 날은 “교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회당은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곳에 모이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시는 장소로 쓰였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4:16b)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오순절 절기 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도하는 곳으로 쓰임 받는 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13:14b)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행17:1b~2f)라는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21b) 했는데 회당에서의 모임은 오늘 교회가 예배 때 행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라신 나사렛 회당에서 있었던 앞에서 눅4:16b을 인용한 바 있지만 v17~24의 기록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찬송이나 기도와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은 그곳에 참여한 덕망 있는 유지에게나 랍비들이 읽은 말씀을 해설하는 식의 모임이 이루어졌음을 본다. 이렇게 안식일에 회당의 모임은 물론 정해진 규범들은 있었겠지만 상당히 자유스러웠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런 덕택에 주님께서도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문제는 인용한 나사렛 회당에서의 반응도 그렇지만 오늘 읽은 마지막 말씀도 예사롭지는 않았던 것을 본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22)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형태는 복음서들마다 보는 대로 별로 존경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나 사람들의 죄로부터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헌신보다는 자신들의 명예나 돈을 챙기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도 책망받고 있는 대표적인 예들을 마15, 23장에서 보는 내용대로였다.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지나칠 정도로 명예에 집착했고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도하는 사두개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돈을 불리기에 애쓰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 책망을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런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통쾌하게 꿰뚫어주는 시원 함이었기 때문에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22)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실 사리사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역질 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 신앙적 가르침은 그때나 지금이나 옳지 못한 것이고 중단시켜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이 한결같이 놀란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2b) 신앙적 가르침의 간격은 그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인가와 무엇을 위한 가르침인가에 의해서 차이가 날 것이다. 앞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의 병폐를 지적했지만 아무리 성경을 청산유수로 짜맞춰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가르침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이유가 없다. 그런 이유에서 하늘의 신비나 권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하늘의 신령한 것을 가르쳐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도전하는 가르침이라면 거기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권세 있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 모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들은 사람들은 이런 차이에서 놀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선하신 가르침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 가르침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권능을 직접 보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증거를 위하여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고 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갈데아 우르를 떠나온 아브라함처럼 친척과 아비집은 물론 모든 삶의 수단과 재산을 뒤에 남겨둔 체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
이들이 후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는 약속의 확인이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광이나 후일의 삶을 위해서 보다도 참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모양뿐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른 권세 있고 능력 있는 말씀을 전파하셨다. 오늘 우리의 신앙적 삶의 목표와 자세에 따라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인정된 삶과 유치한 종교냄새를 풍기는 생명 없는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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