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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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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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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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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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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역시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운 분이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기록하게 하심도 너무나 신비하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두 사람(마, 요)을 비롯해서 그 제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 역시 두 사람(막, 눅)을 두셨는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지만 각자가 너무나 독특해서 우리 주님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이 복음을 들을 대상들을 위해서도 언어사용이나 문화적인 표현들은 물론이고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려고만 한다면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배려를 볼 수 있다. 먼저는 주님께서 탄생하신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에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나 이방인들 문학이나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해 있었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하는 누가의 복음과 세계모든 사람들에게 이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로서 존재하시는 오묘하신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요한복음도 생명을 주시기 위한 복음 중의 복음서이다.
에스겔은 그발강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는데 그 하나님을 옹위한 천사들의 형상을 네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겔1:10) 요한 사도는 이와 꼭 같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같은 형상을 보았음을 증거한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계4:7) 순서는 다르지만 꼭 같은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왜, 이런 내용을 소개하느냐 하면 四 福音書를 여기에 비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들은 내용일 수도 있지만 마태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서 밀림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역사 속에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인자”(물론 이 마가복음에도 12번 쓰이긴 했지만)의 복음(21회)으로 기록하였다. 요한은 높은 하늘에서 우리 인생을 굽어 살피시는 입장에서 독수리로, 그리고 이 마가복음은 일평생에 밭과 논을 갈고 농사에 평생을 바치고 마지막으로는 고기까지도 우리도 탕을 끓여 먹고 있지만 발이나 머리는 물론 뼈까지도 버릴 것이 없는 헌신적인 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배경을 간략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마가는 로마식 즉, 라틴어식 이름이다. “마가[Μάρκος, 방망이, 비취이다, 전쟁의 신이자 태양계 별 중에서 화성(Mars)에서 온 이름]” 사도행전 속에 등장하는 이 마가는 베드로를 죽이려는 헤롯의 간계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형되기 바로 전날 밤에 천사를 통해서 놓임을 받고 찾아간 곳이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Ἰωάννης, יוֹחָנָן, 여호와는 은혜(자비)로우시다(대상3:15, 24)]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12) 여기는 그의 유대식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까지 나타나고 교회가 모여 기도할 정도의 집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도행전 바로 다음 13장에 다시 그 이름이 나타나는데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5)는 기록을 보지만 다음 구브로 섬 전도를 끝내고 v13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는 기록을 보는데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 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15:36~39f)라는 기록들을 보는 데서 바람직한 이유에서 그의 집으로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다음에는 사도행전 속에서는 더 이상 마가의 이름은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것은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4:10)는 바울의 편지 내용에서이고,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는 이 편지 내용에서는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가 어떻게 베드로와 함께 있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부터 만났는지는 우리가 가진 성경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이 마가가 바울과 언제 어디서 화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의 서신들에서도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마가 요한은 초창기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팀을 나누어 놓는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는 바울과 베드로에게 모두 인정을 받고 복음을 위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 들은 주님의 사역을 자신의 역량을 다해 기록하는 중요한 인물로 남음을 본다.
이 마가복음을 보면 다른 복음서들과 다른 내용들을 더러 보는데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을 위해 쓴 것이기 때문에 OT의 인용이 거의 없다. OT의 인용은 오늘 본문의 v2~3과 15:28 단 두 곳이지만 뒤의 것은 우리 성경에서는 난외주로 처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유도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한 내용이 이 마가복음을 요약한 것 같은 메시지라고 이해하는 데서도 그렇다. 행10:37~43의 내용이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는 내용에서 그렇다. 오늘 읽는 내용에서 주님의 구속을 완성하신 후 사죄의 세례를 증거하는 데서 그렇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베드로에게 사사를 받고 베드로를 따라 사역하다가 베드로가 세상을 뜬 후 ~ 로마의 티토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한 AD. 70어간에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또, 이 복음서에 쓰여진 화폐단위부터 직책명이나 물건의 이름들 모두 라틴어로 기록된 것으로 이 복음은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 한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소(or 송아지)의 복음이라고도 하지만 소처럼 일생을 헌신으로 사는 “종의 복음”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시면서도 사람들의 온 갓 질병과 고통, 배고픔을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신의 몸을 인류를 위한 제물로 주신 데서 그렇게 부른다.
다른 복음서들은 각각 서론이 있다. 그럼에도 이 복음서는 오늘 제목으로 붙인 말씀이 서론이자 이 복음서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당연히 Å와 Ω이신 하나님이라는 데서 시작이 없어서 족보가 있을 수 없지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는 마태나 인자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에서 나셨음을 증거하는 데서 족보를 쓰고 있지만 “종”은 족보가 없고 또 중요하지도 않기 때문에 마가를 통한 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를 생략하고 있다.
이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겠지만 이 마가복음의 독특한 성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도 유익이 될 것 같다. 이 복음서는 산상보훈 같은 교훈의 가르침이 거의 없다. 주로 사건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표현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면서 動詞의 시제는 대부분 현재형으로 쓰였다. 또, 감정의 표현이 항상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쓰였다. 메시지를 선포하는 가르침이 적고 주로 이적의 역사를 많이 다루고 있다. 여기에 다른 하나는 내용의 ⅓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집중되고 있다는 데서 수난의 복음이라고도 한다.
Ⅰ. 복음의 시작(1~2)
다른 공관복음서들처럼 태어나고 자란 이야기가 없이 복음의 현장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시작이다. 특히 이방 세계에서도 막연한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좀더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호소하는 표현이면서도 모든 인류에게 소망이 되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그분은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온 분으로 앞서 사절을 보내셨는데 그 사절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나타난다. 유대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인종을 가리지 않고 구원 얻을 복된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사복음서 중에서 이 마가복음이 가장 적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4, 마10, 눅6, 요7회).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세계의 대개의 왕이나 영웅들은 하늘과 연결되어 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天皇이라 하여 하늘의 왕으로 숭배되어 졌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 이상으로 받들어 섬겼다. 당시의 로마 황제 역시 다르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황제 숭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더 큰 박해와 순교를 당했지만 이제 마가는 사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마3, 막1, 눅0, 요2회)”이시고 이분에 관한 소식이야 말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진정한 복음의 소식이라고 증거한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2) 이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인용된 OT이다. 15:28에 한번 더 인용되지만 난외주로 처리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도 지혜의 하나님의 역사가 계셨을 것이다. 비록 이방인들을 대상하는 복음서이지만 여기는 두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 왕이 행차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사신을 보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도 사절을 보낼 것을 수천년 전부터 예언된 사실이라는 무개를 주고 있는 것이 그 첫번째 내용이다.
두번째는 그 사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 진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침례자 요한은 분명히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다. 또 그의 다른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그의 고백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요한이 기록하는 것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1:19~20)고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3)고 오늘과 같은 답변을 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역할을 잘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5; 마3:6).
Ⅱ.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3~5)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어떤 것임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된 역할이지만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를 바로 아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분수를 알고 행한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요한은 누구보다도 이러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안 사람이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는 것이다. 마치 소리치면 이내 메아리를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그런 순간의 존재로 자신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라면 그 주님을 증거했던 선지자들이나 일꾼들은 필요에 의해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들일 뿐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3) 그 소리의 내용이 바로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사라지는 소리의 존재였음에도 그 내용은 무개가 있었다. 이것은 자연을 비유하면서도 각 사람의 마음상태를 준비시키는 귀중한 당부의 교훈이다. 각자의 진정한 주인의 오심을 준비하되 그분이 바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곧은 길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4) 이렇게 침례자 요한은 주님을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죄사함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이러한 요한의 역할은 잘 감당 되었고 그의 역할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5)는 것처럼 그 외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요청에 응답하여 마침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한 마태복음(3:7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는 다르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Ⅲ. 세례 요한의 자세(6~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 광야에 나타난 침례자 요한의 사역 모습을 좀 더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차림새는 단순했고 그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요10:41)고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6)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여년의 암흑기를 거친 후에 유대 광야에 나타난 마지막 선지자는 마치 엘리야와 같은 차림으로 나타나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세례 요한을 두고 말씀하신 것처럼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눅7:25b; 마11:8b) 하셨듯이 가장 거친 옷을 입은 것 자체가 탄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처럼 침례자 요한은 죄가 관영 하는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은 것도 광야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서민들의 가장 소박한 먹을 거리였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 그의 외치는 소리의 내용도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모습이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7m) 앞에서 군중들의 반응처럼 그는 어떤 이적이나 기적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자신과는 다르게 자신과 비교될 수 없는 분이 나타나실 것을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b)고 자신이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분임을 선포하였다.
물론 당시 피폐해질 대로 거칠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과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마태가 전하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좀 더 강한 것이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7b~10)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 침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와 자신이 나타내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대조하면서 주님의 세례를 좀 더 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먼저 여기에 쓰여진 세례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βαπτίζω” 세례(침례)를 베풀다, βάπτω, 담그다, 잠그다, 가라앉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시킴으로) 멸망시키다.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의미로 자신을 물 속에 장사 지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는 의미와 물에서 다시 일으킴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가 되는 중요한 거듭남의 의미를 갖는다(롬6:3~4). 심판에 있어서는 불의 세례는 불 속에 던져진다는 비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대해 마태가 좀더 구체적인 기록을 주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 마가는 간략하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푼다” 하였지만 마태는 이 세례의 성격까지 말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라고 자신은 주님을 맞기 위한 삶의 변화를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증거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m) 한 것은 이미 앞의 v7에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내용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해서도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b) 하였지만 마태의 기록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b)라고 구원과 심판의 주님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경학자들은 이 불을 세례에 포함시켜서 해석하려 하지만 연결되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이 내용을 더욱 분명이 하고 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마가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로지 죄로 절망에 붙잡혀 사는 인류를 구원하고 섬기기 위해 오신 종으로써 소개한다. 그런 이유에서 족보도 없는 일선에 바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침례자 요한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복이나 듣기에 행복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오히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높은 권력이 있는 것도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을 나타내기 보다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을 높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과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는 형편에서 정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삶을 바꿔야 한다는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았다.
오늘 우리도 분명한 믿음과 소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외면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형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좋아서 가 아니라 단순하고 진실된 삶과 확신과 감사하는 삶이 될 때 전하는 메시지도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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