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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후3:8~13 2026-06-14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앞에서는 옳지 못한 교사들에게 주는 교훈이었다면 여기서는 그러한 잘못된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먼저는 그러한 가르침에 대해 책망하는 말들이었다면 여기에는 거짓된 교훈으로 어려움을 겪는 참된 백성들을 위로하고 재림에 대한 성경적 해명을 주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주님의 다시 오심이 더디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재림을 사모하고 거기에 알맞은 삶이 될 것을 권면하는 당부들로 되어 있다.

모든 신앙의 문제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것들이다. 그런 계시 조차도 전체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람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잘못된 행위이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뜻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경건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 속에 다시 오심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고 주님의 피에 씻김을 받은 성도라면 그 사죄의 감격을 가장 사실적으로 누리는 사건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있기 때문에 이를 바르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 조차도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했고 완전한 부활을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23b)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신앙하면서도 생명이나 부활이 실감나지 않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비로소 완벽한 부활과 생명의 감격이 모든 인류가 보는 가운데서 확인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Ⅰ. 하나님의 인내(8~9)

어쩔 수없이 시간을 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성을 공경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스스로 가진 지식과 생각으로 저울질하지 말 것이다. 비록 거짓 교사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4)는 지극히 육신적인 저들의 판단이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멸망을 늦추고 계시는가?’하는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8)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격려가 “사랑하는 자들아!”(1, 14, 17)이고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 자신의 고백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격려의 호칭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변한 것 자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러한 호칭은 건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시90편의 모세의 기도시의 인용이다. v2에서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하나님의 영원성을 찬양하고 다시 v3에서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인생의 덧없음을 고백하고 나서 v4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는 고백을 듣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은 재림의 약속이 2천년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이런 시간적인 개념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께는 전혀 의미가 없다.

시대에 따라서 숫자 개념은 달라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지만 지금은 한 해가 지나지 않아도 산이 없어지고 산만큼 높은 건물들이 서기도 한다. 또, 과거에는 억이라는 숫자가 엄청나게 큰 수였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수가 되어 버려서 아파트 한 칸도 몇 억이라고 하고 연봉이 몇 억이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 숫자적 개념이 무디어지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과거보다는 이해가 더 쉽게 되고 있다.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어떤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분이 하나님께 “1억만 주십시오.” 했더니 거기에 대한 응답이 “하루만 기다려라!”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는 해나 날이나 시간이 의미가 없는 분이시다.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 사람만이 길어야 백 년을 살고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초를 다투고 분을 다투고 시간을 다툴 뿐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에 주시는 권면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하시는 당부의 말씀이다. 앞의 v5b에서는 경건하지 못한 선생들이 창조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지적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9f) 하나님의 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적어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일 것이다. 또 다른 경계는 주님의 재림은 생각하는 것처럼 막연하다는 불경한 교사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삶이 흐트러지고 경건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신앙적 자세를 경계하는 당부이기도 하다. 우리의 믿음 생활의 판단이 사실 여기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매 순간 자신을 단속하면서 언제 주님께서 오셔도 부끄럽지 않으려는 신앙적 자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 오심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은 보이는 현세에서 더 영광과 평안을 누리려고 모든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삶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오늘 나는 어느 편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오심을 재촉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7)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하나님의 계획이 늦춰지는 이유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 역시 사랑의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다. 우리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어서 오셔서 이 고난의 땅에서 자신을 옮겨 주실 것을 기도하고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늦추심에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 때문임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적어도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의향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것은 그런 각자의 완악함 때문이다. 또, 여기에서도 복음을 확인하는 것은 멸망이 회개하지 않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도 구원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Ⅱ. 그럼에도 심판은 있을 수밖에 없다(10~11)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이 늦어 짐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임을 증거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오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오심에 언제나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시각에 마치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모든 신앙에 관한 것들을 완벽하게 예언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시간이나 날 그리고 해를 정확하게 고지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것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믿음을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객관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한 사랑의 역사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각 사람이 행한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10f)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주의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날이야 말로 주님께서 만인 앞에 이 우주의 주인으로 선포되고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순절날 이 땅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천하각지로부터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행2:20f)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 이어지는 v12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OT에서도 요엘선지자는 이날을 가리켜 “여호와의 날”(욜3:14b)이라 하였고 다시 바로 뒤인 v16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보호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날을 “그리스도의 날”(빌2:16)이라 묘사하고 있다. 바로 앞장인 2:9에서는 “심판 날”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10f)라는 경계는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도둑 같이 오리니”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도 이 사실을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같은 경계는 눅12:39~40도 기록되고 있고 바울 역시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2)고 건전하 신앙의 사람이라면 이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계3:3b, 16:15).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10m) 우리는 천둥소리에도 두려워하는데 공간인 하늘이 상상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떠나가고[παρέρχομαι, 지나가다, 끝나다, 사라지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해가 쉽지 않다. 앞에서 인용한 욜3:16의 말씀처럼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는 표현으로 볼 때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10b) 보이는 물질 세계가 불에 의해서 “풀어지고[λύω, 풀다,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 취소하다, 폐지하다, 깨뜨리다, 해체(해산)하다, 파괴(멸망)시키다]”하는 표현이 다음 v12에도 다시 나타나는데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에게 반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경건을 힘쓰던 사람들에게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로 인하여 매여 있던 모든 제한에서 풀려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복된 계기가 되겠지만 회개치 못하고 불신으로 살던 육신을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기대하며 준비하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잃게 되고 오히려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안타까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11) 이제 이러한 모든 되어질 일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남은 때를 살아야 할 것인가를 도전하는 말씀이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11m)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하는 불신의 사람이라면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알았다면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마땅하다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의 의지를 요청하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12:47)라고 하심으로써 앎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신다.

여기에 요청되는 삶의 자세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11b) 했는데 이 사실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여기는 모든 삶에 있어서 구별된 삶이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다시 벧전4:2에서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역시 구별된 삶을 주문하고 있다. 이 벧후2:9에도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하여 경건한 자를 온 갓 시험에서 건지시지만 불 경건한 자는 심판날까지 형벌을 쌓는다고 말씀하셨다.



Ⅲ.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라(12~13)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로지 여기에 소망을 두고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약속을 갖지 못한 불신의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확신이 없는 것들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날 즉,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라고까지 격려하고 있다. 여기에도 역시 사라질 것들과 기대할 것들 다른 두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f) 앞의 1:5f에서는 믿음의 진보를 당부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라는 열정을 당부한 바 있다. 여기서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할 수 있는 믿음을 간접적으로 당부하고 있다. “바라보고[προσδοκάω, 기다리다, 찾다, 기대하다]” “사모하라[σπεύδω, 서둘다, 노력하다]” 하면서 그냥 사모하라 가 아니라 간절히 사모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며 기대하는 것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자신이 사 둔 복권이 높은 등수를 맞는 것, 가진 주식 시세가 오르는 것, 내가 가진 아파트 시세가 오르는 것, 취직을 준비하고 있는 자식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장사를 하고 있다면 손님들이 번호표를 가지고 기다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것, 가지가지의 바램과 기대가 있다. 오는 내가 가진 기대와 바램은 과연 무엇인가?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날이어야 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12b) 이것은 v10b의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한 것의 반복적 확인이지만 하늘은 불에 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τήκω)질 것이라 하여 심판의 도구는 역시 불이라고 확인한다. 이것은 주님을 기대하거나 바랄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날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말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유 때문에 바라보고 사모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우리가 육신을 담고 사는 이 세상이 처할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을 더욱 기대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 베드로 사도가 “사랑하는 자들아!”(1, 8, 14, 17)라고 애정을 담아 격려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은 복음이 완성된 NT의 성도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니라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는 비극적인 운명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남은 자들에게 이미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하셨고 다시 66: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이사야를 통한 언약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예언은 계시의 절정인 성경의 마지막 책이요 영원한 미래를 예언하는 계21~22장에 보다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이 분명히 선언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라고 증거되고 있다. 사람은 아무리 의로우려고 애써도 옷처럼 더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하였다. 그런 이유는 이 세상이 죄에 잡혀 있고 그런 세상 속에서는 의롭게 살려는 의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의의 사람으로 살 수 없고 의의 통치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는 “의가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의 처소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요한은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하였는데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불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의 처소에 우리를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의를 힘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라고 썼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바램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가는 것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은 심판에서는 한없이 기다리시는 인내를 보이신다. 불의한 것들을 빨리 정리하고 의의 통치를 시작하실 수 있는 권능과 능력의 하나님이심에도 한 영혼의 회개를 위하여 천 년이 하루 같이 기다리심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약속되고 예언된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사람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상황은 불로 태워지고 풀어질 하늘과 땅은 믿음의 사람들을 모든 얽매인 것들로 부터 풀려나 자유 하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거역하던 사람들의 수치는 들어나는 때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며 주의 날이 임하기를 기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여 죄인은 절대로 설 수 없는 완전한 의가 다스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바라며 그곳으로 옮겨갈 역사의 날을 기대할 수 있는 의의 사람들로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