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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후3:1~7 2026-06-07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어느 때나 문제는 건전하지 못한 일련의 신앙한다는 사람들의 좋지 못한 가르침이나 행동이 진실하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은 아담 후 이제까지 계속되어 온 것은 어둠의 이 세상 주관자들의 간교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앞 장에서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결정적인 문제가 모두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재림에 대한 옳지 못한 태도이다. 사람들의 나약함은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리 가르쳐도 잘 순종 되지 않는 반면에 이렇게 옳지 못한 교리나 삶의 자세에는 쉽게 감염되고 만다는 것이다.

육체가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이들의 자세는 자신의 삶이 되는 대로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나 교훈을 거절하는데 대담하다고 하는 것인데 좋은 일에 담대하고 대담하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경계의 교훈조차도 조롱하는 간 큰 저들의 행동이다. 마치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19:14)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 속에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은 신앙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귀중한 신앙의 문제로 조심하는 주제이지만 이런 귀중한 신앙의 과제를 농담으로 여기고 조롱하는 것은 그야말로 간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마지막 부분의 내용은 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신앙적 자세와 그들이 결말을 증거하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경건한 삶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 것을 당부하고 마무리하는 말씀이 주어진다.



Ⅰ. 진실한 믿음을 일깨우려 한다(1~2)

장래에 대한 좋은 약속에 관한 권면은 말하는 것도 행복하고 듣는 사람들도 좋을 것이지만 장래에 있어질 좋지 않은 예언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면 말하는 것도 쉽지 않고 듣는 것도 역시 쉽지 않다. 베드로 사도는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어떠한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조심스럽게 경계한 바 있지만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야 말로 말하기도 힘들고 듣는 것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럼에도 신앙의 경건함과 그렇지 않은 가의 간격도 이 역사의 마지막 즉, 복음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불신의 사람들이 가장 꺼리고 싫어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그래 예수 믿는 것도 좋고 천국도 좋은데 제발 이 세상이 불에 타서 망한다는 말은 좀 하지 마라 어디 겁나서 살겠나!’ 한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경계의 교훈을 주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요한 사도의 애용하는 표현이지만 베드로 사도 역시 여러 번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이 3장에서만도 v8, 14, 17에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게 된 사람들은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자들이요, 그 사랑에 붙잡힌 자들로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지난 주간에 우리 외운 말씀이자 같은 베드로 사도의 당부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1f) 베드로 사도는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전서를 보낸 바 있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이단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베드로 후서를 쓰고 있노라고 이 중요한 부분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이 편지를 쓰는 좀 더 직접적인 이유는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1b)라 한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사랑을 받는 모든 이들의 진실한 믿음과 건전한 생각을 이미 확신하고 그것을 다시 일깨워주려고 이 베드로 후서를 써서 보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유다서에서도 볼 수 있다.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1:5f)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절에 물론 이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이겠지만 OT와 NT을 통틀어 주는 경계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예언과 명령이다. OT에 예언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오셔서 완성된 복음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통하여 명령하신 것들이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2)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OT의 수많은 선지자들 그것도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거룩한 선지자 구별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로 지금 엉뚱하게 나타나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언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들의 예언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순종의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생명의 길이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2) 인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 이것을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마28:18~20). 이 명령을 직접 듣지 못했던 바울 사도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 도시의 시민들이 거의 다 모인 가운데 복음을 전하면서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13:47)고 증언한 바 있다. 유다 역시 같은 증거를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1:17)

베드로 사도의 이러한 증거들이 바로 이 편지를 받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라는 당부의 시작이다.



Ⅱ.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하는 자들(3~5)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에 다시 오심을 믿고 증언하는 문제야 말로 가장 중요한 믿음의 증언으로 이러한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마치 당시의 이 예언을 조롱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무한 이론일 수밖에 없는 종교적 고집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것이 복음의 완성으로 또 복음의 핵심이 되는 신앙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이 믿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는 믿음의 연장이면서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이라는 데 그 중요성을 지나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 문제는 십자가의 대속에 뒤지지 않은 믿음의 과제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이런 믿음의 이치들을 증거한 바 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벧전1:5f, 20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된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3)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라는 경계이다. 하나님의 교훈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조롱하는 자들은 이미 멸망이 작정된 자들이다.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μυκτηρίζω, 코웃음치다, 비웃다, 조롱하다, 경멸하다]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였듯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일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훈과 가르침은 우리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 만을 믿는다면 그것은 벌써 믿음일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지식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어떤 가르침도 공경하고 절대로 순종할 뿐이지 조롱[ἐμπαίζω, 비웃다, 조롱하다, 속이다]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하여 유다도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8~19) 라고 3가지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는 한량없이 너그럽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거역하고 반대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4f)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비웃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막13:26; 눅12:40; 요14:3)고 친히 하신 말씀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옆에 서있던 천사가 증언한 것이다(행1:11). 물론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사도들이 이를 증언한 바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4:15)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f~8)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4b) 그때까지도 재림을 기대하며 믿음생활 하던 사람들은 죽었고 세상이 바뀐 것이 없다는 이 말 자체가 재림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OT의 선지자인 예레미야 때에도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렘17:15)는 조롱이 있었고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때에도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2:17b)고 비웃는 불신자들이 기록되고 있다.

이런 비웃음은 ‘그래,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나타내 보라!’는 조롱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이적을 보면서도 여전히 불신의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음을 본다. 그렇게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열망하던 믿음의 선진들이 다 세상을 떠났어도 세상은 바뀐 것이 없다는 보이는 현상 속에서만 볼 수 없는 신앙을 이해하고 무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의 헤아리는 시간으로 계산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육신의 五感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5) 여기에서는 재림을 불신하고 조롱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이 신앙적으로 문제가 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의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4b)’의 주장은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는 행위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특히 창1:9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궁창위의 물과 궁창아래 물을 나누시고 그 물가운데서 뭍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는 것에 불가능이 없으심을 간과한 것이라는 불신을 지적하는 것이다.



Ⅲ. 불사르기 위하여 보관되고 있다(6~7)

이런 불신으로 신앙을 혼란케 하는 저들에게 남은 것은 노아의 홍수에 의해서 불 경건한 사람들이 모두 멸망한 것처럼 저들은 멸망당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보전해 두신 하나님의 의향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앞으로의 세상도 보존되고 바뀌고 변화될 뿐이지만 그것도 경건한 자들은 생명으로,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존되고 지켜진다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함부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평가하는 저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지구는 지켜지고 있다고 증거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6) 바로 앞절에서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 하였던 베드로는 이제 물과 물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뭍을 드러내신(창1:9) 하나님은 그 동일한 능력의 말씀으로 같을 물을 사용하여 범죄한 세상을 심판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같은 물을 가지고 창조하실 수도 멸망시킬 수도 있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연도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동시에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을 조롱하고 언약을 우습게 여기는 거짓 교사들의 남은 운명은 물로 심판한 과거와 같이 정죄를 받아 멸망당 할 수 있음을 경계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 쓰여진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한 것처럼 다음 절에 보는 대로 범죄한 동일한 세상은 이제 불로 태우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셨다고 증거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7)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를 받고 존재하게 된 “이제 하늘과 땅은”(5~6)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기 위하여 보존되고 있다고 증거한다. 왜냐하면, 한번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신 하나님께서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가족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셨다. 그것은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한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 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1~13)하신 것이다.

요즘은 시간당 100m/m의 집중호우가 내리는 것이 일반이고 지구의 대부분이 바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들어 이성적인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일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특히 이 새 언약을 세우시면서 보이신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 조차도 비가 내리는 햇빛 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런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과학의 첨단 시대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에 일어나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은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하신 “보호하신[θησαυρίζω, 쌓아두다, 모으다, 저장하다, 비축하다]”은 물론 뒤에 보존하여 라는 말이 따라오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호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7) 과거에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던 꼭 같은 세상은 이제도 변화된 생명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하여 지켜지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는 영광의 처소는 이 땅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 땅이라고 다음 시간에 보게 되는 v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라고 거론하고 있지만 이 역사의 마지막을 예언하는 계시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이러한 언약 자체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꿈같이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7)는 말씀은 불경건의 사람들을 형벌하기 위하여 심판과 멸망을 위하여 보존되어지고 있다는 비극적인 운명을 보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다음 시간을 미리 보는 것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f) 도전하고 있다. 이런 안타까움을 알고 바라보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아니 매 순간 가장 진실한 신앙의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복음을 예언했던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을 되돌아보아 믿음의 도전을 지속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죄인 된 나를 살리기 위하여 오셔서 죄를 해결해 주시고 완성된 복음을 주님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시는 교훈들과 삶의 방법들을 기억하여 순종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과학이나 인간 이성은 발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심을 웃음 거리로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조차 믿지 못하고 물로 심판하신 사실조차 비웃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믿음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일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만들어졌던 물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지만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같은 물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경건한 의의 가족인 노아의 가족을 통하여 이 세상은 사람으로 넘치게 되었고 이제 다시는 그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언약하신 하나님은 같은 언약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권능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을 멸망시킬 불로 태우기 위하여 보관되고 있다. 형벌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여 날마다 삶을 경건으로 돌이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