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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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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2: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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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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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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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못한 교사나 선지자들은 어는 시대 어느 곳이나 있어서 항해하는 배에게 암초 같은 존재들인데 진리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불의의 삯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일꾼이면 기대하거나 바래서는 안되는 어두움의 종들의 모습일 뿐이다. 바로 앞에 나누었던 지난 v12b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라고 거짓 교사들의 비 인격전인 동물에 비유한 것을 보았다. 지난 시간에 불의의 삯을 위해 갔다가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고 이스라엘에게도 바알브올에 부속되는 역할을 했던 발람의 역할을 인용한 바 있지만 오늘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내용에서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타고 다니는 나귀와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개와 돼지의 추한 모습을 속담과 더불어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비유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면 말못하는 짐승에게 책망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는데 그것도 일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소임을 가진 선지자가 미친 짓을 하게 되면 나귀를 통해서 책망하시는 수치를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백성들을 잘 못 이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사56:10~11f)고 두려운 비유를 하신 바 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동료를 생각하고 서로를 위하도록 관계 속에서의 역할을 하는 데서 人間이라 불리게 되는데 동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동물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창조주요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의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의식한다는 사람들이 그렇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고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거짓 교사들을 이렇게 짐승으로 표현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이 당할 형벌이 얼마나 무섭겠는 가도 추측하게 된다.
오늘의 내용은 하나님의 금하심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이끌려 가다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나귀에게 책망을 듣는 발람의 이야기와 함께 그런 사람들의 비극적인 역할과 발람의 때는 하나님이셨지만 이제 복음의 완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이렇게 불신의 상태로 돌아가는 비극을 두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
Ⅰ. 짐승에게 책망 듣는 선지자(15~16)
지난 시간에 v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하여 우리 주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하신 것처럼 오로지 육신의 욕망을 중심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거기다가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할 뿐만 아니라 탐욕에 훈련된 저주의 자식이라 했다면 오늘의 내용에서는 옳지 못한 대가 즉, 불의의 삯을 바라고 행동하는 것을 미친 행동이라 표현하고 그런 행동을 막아선 것이 자신이 부리는 나귀였다는 사실을 탄식한다. 마치 베드로 자신의 주님을 부인할 때 닭이 울었던 경험을 돌아보는 것 같은 표현이다(마26:74; 막14:72; 눅22:60; 요18:27). 이러한 내용은 유다도 함께 경계로 기록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15) 발람 선지자가 가야 할 바른 길(v2, 진리의 도)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 하신 것인데 그럼에도 탐욕의 마음을 가진 발람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압 왕 발락은 처음의 적은 예물과 별로 높지 않은 사신들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면서 발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는 약조의 전갈을 보낸다. 여기에 마음을 빼앗긴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 주실 것을 기대하며 모압의 사신들을 머물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발람이 자신의 욕심을 버릴 수 없음을 아시고 가라고 하시지만 그것은 기쁘신 허락이 아니셨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는 항상 하나님께서 처음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이야기를 왕상13장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벧엘에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제사하는 여호보암을 책망하러 보낸 선지자에게서 본다. 이 선지자가 여호보암을 책망하였고 그를 잡으라고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자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손을 회복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이 선지자가 기도하자 말랐던 손이 회복된다. 그제야 왕은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럼에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경계를 왕에게 말하고 왕의 친절을 거절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9) 왕 앞에서도 대가를 거부했던 이 선지자는 벧엘에 살던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는 데 그 선지라라는 사람이 이 선지자를 유혹시킨 것은 두가지였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18) 벧엘에 갔던 선지자는 이렇게 착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명령을 지켰더니 처음 명령을 바꾸셨나 보다.’
오늘 날 믿음의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넘어갈 소지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말씀을 바꾸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 선지자가 비록 힘들었지라도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9)던 말씀을 끝까지 지켰더라면 길가에서 사자에게 찢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처음 주신 명령과 다른 말씀을 기대했던 것인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환경이나 시간이 변한다 해도 사람들처럼 바꾸지 않으심을 확신한다면 이런 유혹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16)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이런 사람에게 나귀를 통해서 책망하신 것은 짐승에게뿐만 아니라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책망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람의 이야기는 성경 여러 곳에 경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심지어는 이 역사의 마지막을 예언하는 계시록에서까지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민25:1~3; 31:16; 신23:4; 수24:9; 느13:1, 2; 계2:14).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 결함보다도 더 심각하게 여기는 미친 삶인 것이다.
Ⅱ. 멸망의 종들의 모습(17~19)
이제 이런 사람들의 행동을 유다서와 함께 경계하여 주는 말씀이다. 유1:12에 함께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17) 가나안에는 아브라함에서 이삭, 야곱까지 물 없는 우물에 대한 기록들을 더러 볼 수 있고 그러다 보나 좋은 우물을 얻기 위한 투쟁이나 노력들을 창세기에서도 자주 보는 내용들이다. 샘은 물이 잘 솟아오르는 우물만이 샘의 가치가 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렘14:3)라는 기록들도 볼 수 있다.
또 이스라엘은 물이 귀하기 때문에 이슬조차도 귀중한 역할을 했는데 그런 이유에서 ‘하늘의 이슬’이 축복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창27:28, 39; 신33:13). 그럼에도 급한 바람에 밀려가는 안개는 이슬을 맺히게 할 수 없었다. 유다도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고 표현했다. 오로지 이렇게 자신만을 위하여 산 사람들의 영적인 약속은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17b)다는 것이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18) 유다도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1:16) 거짓 교사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자랑하는 것은 마치 먹었던 음식을 토해내는 것처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메스껍게 한다. v14f의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했던 것처럼 자신의 음란함에 다른 허약한 영혼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경건하지 못한 이단들의 교주들이 대부분 이런 것은 이미 우리 시대에도 보는 현상들이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19) 또 하나의 이단들의 공통점이 여기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란 세상의 무속이나 종교로부터 또는 1세기에 많이 거론되었던 율법에서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거짓 스승들은 자신들은 이미 대부분의 신앙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에 윤리 도덕도 장애가 될 것이 없다는 허황된 자유를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앎으로 죄에서 자유 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요8:32)도 아니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 일부에 나타난 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그런 잘못된 자유(고전5장)라는 이름의 방종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오늘 날도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는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는 이미 죄와 죽음 그리고 절망조차도 얽매지 못하는 자유를 성경은 또, 예수 그리스도나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설령 이런 참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를 사람들에게 오해하게 되는 사용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는 바울 사도의 경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 경계였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10:32)라는 당부도 함께 주고 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19b) 일세기 당시에는 로마가 정복하는 나라들의 패배한 국민들은 로마의 종이 되었고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의 원리는 역사 속에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비 도적이고 비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 속아 그 밑으로 들어간다면 그 사악한 멸망할 무리들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고 마지막은 그들이 당하고 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경계이다.
Ⅲ. 의의 도를 안 후에 저버리는 것은(20~22)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만 채우려고 하는 불신자들보다도 못한 이들이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 아버지를 몰랐더라면 이런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불결하게 여기는 두 동물인 개나 돼지만큼도 못하다는 표현을 솔로몬의 잠언을 비롯하여 당시에 속담을 인용하며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20) 세상에 연령이나 인종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알고 자신을 그 복음에 맡긴다면 그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시고 기대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상의 온 갓 더러움에서 온전히 깨끗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이다. 그런 엄청난 생명의 변화를 받았음에도 다시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처음보다 비극일 수밖에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10:26)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신 바 있다(마12:43~45; 눅11: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해서 다시 있던 사람에게 돌아와 보니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어서 가서 자신보다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게 됨으로 이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덧붙이신 말씀이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5b) 말씀하셨다. 이런 이유에서 십자가를 알고 구원에 들어왔다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악하게 되는 것이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21) 의의 도나 거룩한 명령은 모두 죄인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자 요한을 두고 그를 믿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마21:32f)다고 지적하신 바 있다. 이런 경계를 주는 내용은 히브리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이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음을 몰랐더라면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것인데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탄식이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22f) 발람과 그가 타던 나귀를 말했던 베드로는 다시 짐승의 비유로 되돌아간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이런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만약에 사람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면 그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것인데 개의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모습도 다르지 않다. 주로 날씨가 좋지 않은 날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이는 모습에서는 아니지만 사람에 관한 것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22b) 멧돼지 같은 경우도 일부러 진흙탕에서 뒹구는데 그것은 몸에 붙은 벌레 같은 것을 털어내기 위한 돼지들 나름대로는 삶의 방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역시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인데 이것이 보이는 모습에서 이기 보다는 거짓 교사들의 꿰임에 넘어가 영원한 죄에서 깨끗하게 씻었던 것을 다시 그대로 뒤집어쓰는 모습이기 때문에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바라시는 모습이고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들은 과거와 다르게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이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 답게 살아야 하고 이러한 삶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까지 들어가게 할 것이다.
브올의 아들 발람 선지자는 그 때 당시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나라나 사람들은 모르는 하나님을 알고 예언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계시를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만 쓰다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나귀로부터 책망을 받았고 이러한 선지자를 미친 행동이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신앙을 육신의 유익으로만 쓴다면 오히려 불신의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고 하는 우리(내)가 생명을 갖은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면 주변에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하면서도 허풍 떨고 신앙을 대부분 육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함으로 또 다른 종교의 종노릇 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면 다시 초라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주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된다면 거라사의 무덤사이에 살던 광인에게서 나간 군대귀신이 돼지들에게 갑자기 들어가 갈릴리 바다에 몰사한 돼지들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간격도 중요하지만 불신과 신앙의 사람의 차이도 삶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짐승에게 책망 듣지 않기 위해서 불의의 삯을 기대하지 말고 주님을 모신 삶으로 생명수를 샘처럼 뿜어낼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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