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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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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2: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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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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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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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v8~ 이어지는 거짓 교사들의 형벌과 죄악상을 ~v19 증거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육신의 욕구를 따르는 본능보다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갖고 있어서 육신의 욕구 조차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가능한 것은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현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닮은 구별됨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바울은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같은 사람들을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f )고 본능으로 사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능보다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는 당부도 주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범죄 후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 영성이 죽어버린 짐승과 다름이 없는 본능으로 행할 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속성이 남아서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며 바른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 만이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영성을 회복하고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성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그러한 경건의 삶이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셨음을 증거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3) 오늘 다루는 이 거짓 교사들은 당연히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본능이 더 강한 짐승 같은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짐승들은 배만 부르면 그만이고 더 이상 먹이로 삼는 다른 동물들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이란 동물은 그렇지가 않다. 짐승들은 먹는 것에 있어서도 자신의 몸이 상할 정도까지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성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지나치게 탐닉하여 자신이 상하는 것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 이런 입장에서는 사실 동물보다 못한 것이 사람이다. 동물에게는 내세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만이 내세가 있고 영원이 있음을 알고 바라게 된다. 함에도 행동이나 삶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 더 비극이다. 오늘의 내용도 다룸에 있어서 결코 행복한 내용은 아니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되는 말씀이다.
Ⅰ. 경건한 자와 불의한 자가 받을 대가(9~10)
v9은 v4~8의 의인들과 죄인들에 대한 결론 같은 말씀이고 v10은 연이어지는 영성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같은 삶을 지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삶의 평가와 아울러 그들이 받게 되는 형벌들이다. 범죄한 존재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이든지 사람이든지 형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지만 의인들은 어떤 경우에서 시련과 어려움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반드시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역사와 성경의 가르침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9)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여기에서도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절대로 치우치지 않으신다. 언제나 완벽하게 평행을 이루며 다스리시는 영계와 이 우주에 완벽하게 나타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πειρασμός]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9f) 죄악이 관영 하는 이 세상이기 때문에 경건한 자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이미 벧전1:6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πειρασμός]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는 격려를 준 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로운 삶을 살려고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그의 백성들을 절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진실한 백성을 시험에서 반드시 건지신다.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9b) 경건한 사람을 어려움에 거지시는 하나님은 반면에 불의한 자는 현재부터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형벌에 두심을 증거하고 있다. 저들의 현재의 상태는 ‘형벌 아래에 두어’는 지금도 형벌의 상태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9f) 하였지만 하나님의 순리를 순종치 않는 그들은 “…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b) 하여 현재적으로도 하나님의 형벌아래 있음을 증거하고 그 형벌은 미래에 영원한 형벌에 까지도 지속됨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여기 “지키시며[τηρέω, 보존하다]”라는 말이 보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상태에 ‘계속 둔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10) 마치 유다서 v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하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자신들이 죄 가운데 행하면서 바른 길을 지도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큰소리치며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자신들과 구별된 사람들을 비방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10f) 오로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사는 삶으로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욕[ἐπιθυμία, 충동, 욕망, 갈망]” 가운데 사는 오로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10m)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바울도 경계한 바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10b) ‘당돌하고’는 무례하거나 예의 없다는 뜻이고 ‘자긍하며[αὐθάδης, 자기 만족, 제멋대로의, 뻔뻔스러운, 버릇없는, 부끄러움이 없는]’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상응하는 형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잘못된 담대함과 최종적으로는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은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 아버지나 자신을 위해서도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의 감동 조차도 오히려 헐뜯고 비방하는 위엄을 깎아내리는 배은망덕을 행하는 것이다.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위기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은 이런 불의한 자들은 당연히 형벌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Ⅱ.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11~12)
바로 앞구절의 무력하면서도 큰소리를 떵떵 치며 허풍을 떠는 육체를 따라 사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가련한 인생의 가련함을 영적인 능력을 가진 천사장 미가엘과 비교하고 그런 불쌍함 때문에 짐승과 다름이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능력이 있어서 어떤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없이 육체의 쾌락을 따라 인생을 허비하고 현실을 사는 소망이나 미래도 없는 이러한 인생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멸망밖에는 없다고 탄식한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11) 그리스어 원문에는 ‘이에 반하여[ὅπου]’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고 있다. 이 말씀 역시 유1:9의 좀 더 자세하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라는 기록인데 물론 이 부분은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으로 좀더 근원으로 가보면 모세의 마지막이 기록된 신명기34:5~6에만 나타나고 있는 기록뿐이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경건에 속한 신령한 사람들은 정죄하고 저주할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비방의 표현이나 정죄하는 고발 보다도 그 심판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자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권세까지도 다 쓰지 않는 하나님의 종 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자들은 입에서 쉽게 저주의 표현이 나오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귀의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당부하셨고 경건한 사도였던 바울 사도 역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증거한다.
사람의 모든 말은 속에 가진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가장 쉬운 하나님의 백성의 구별도 언어생활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천국의 백성은 천국에 걸맞는 언어생활을 할 것이고 어둠에 속한 사람은 정죄와 저주의 표현을 쉽게 하는 것도 이러한 차이에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12) 말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마치 유다와 베드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 천사들조차도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 없이 본능으로만 행하고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데도 육신이 좋으면 그만인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12f) 가축은 타거나 잡아먹기 위해서 기른다. 그러나 여기 표현대로는 ‘잡혀 죽기 위하여 난’ 한 것으로 봐서 잡아먹기 위해서 길러지는 짐승에 비유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잔치를 위하여 키우는 돼지에 비길 수 있을 것 같다. 잔칫날에 잡아먹기 위해서 먹을 것을 많이 줘서 더 크게 빨리 키우려고 좋은 사료를 더 많이 먹이게 되는데 이것은 물론 잔칫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럴 것이지만 생각을 갖지 못한 돼지는 그 죽을 날도 모르고 식욕대로 먹으며 매일매일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생애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음 순간이 죽음과 멸망일 수 있어도 육신의 쾌락에 젖어 산다면 당연히 이 잔치를 위해 키우는 돼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12b) 사실 믿음에 있는 우리들도 조심해야 하는 내용이다. 사실적인 내용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비방하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핍박을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고 솔직히 고백함을 듣는다. 살면서 가장 적게 써도 좋은 것이 바로 비방하는 행동이다. 진실이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비방하는 것은 멸망의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들은 지금도 멸망 가운데 있고 멸망으로 직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났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Ⅲ.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함(13~14)
멸망을 앞둔 사람들의 삶은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멸망으로 갈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일해야 할 때에 놀고 진실을 잃어버린 까닭에 성도의 모임에서 조차도 속임수로 논다는 저들의 안타까움이 쓰여지고 있다. 이들의 패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범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할 뿐만 아니라 탐욕에 훈련되어서 진리에 든든히 서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여 자신들과 같은 저주로 가도록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멸망을 받게 하는 것이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 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13) 여기에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노는 것[τρυφή, 사치, 방탕, 마시고 흥청대기]’과 ‘놀며[ἐντρυφάω, 호사스럽게 살다, 한껏 즐기다]’라는 낱말들로 마치 민수기22~24장에 모압왕 발락이 이집트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람을 불렀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미워하며 되돌아가게 한 것과 함께 발람도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 하시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욕심으로 갔다가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오고 나중에 이스라엘로부터 칼에 죽임을 당한(민31:8) 사건이야 말로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13m) 낮은 흥청망청 술에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니라 일해야 할 시간임에도 이 낮 시간조차도 자신의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즐기고 노는 무질서의 연속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4)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바울 사도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고 낮에 선한 싸움을 지속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너희와 함께 연회 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13b) 유다는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유1:12f)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나누는 연회나 만찬은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b)라는 초대교회의 모양처럼 “순전한[ἀφελότης, 단순, 순진, 순박]” 마음으로 라는 것은 꾸밈없이 진실하게 신령한 기쁨으로 나누는 애찬이 되어야 함에도 이런 순결한 모임에서조차 속임수로 즐긴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의 결정이다.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나눔은 준비하는 사람에서부터 함께 나누는 사람 모두가 그러한 모임이 이루어지는 의미 자체를 생각하고 감사와 순박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 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4) 이제는 성도들의 애찬의 암초 같은 이 어리석은 어둠의 사람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옆으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죄악을 부추기는 죄악상을 기록하고 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4f) ‘음심[μοιχαλίς, 간음한 여자, 창녀]이 가득한 눈’이란 마치 자신의 육신의 필요인 돈과 연락을 함께 즐기려는 창녀의 눈이라는 말이다. 목적이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있어서도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육신적인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런 사람들은 방탕한 탐욕을 계속 이어갈지라도 만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기 때문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 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4b) 이런 음란한 여인을 솔로몬은 잠언7장에서 다루고 있고 그 희생물이 된 지혜 없는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다. 왜, 젊은이 일까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충분히 단련된 지혜를 갖지 못하고 또 가장 육신의 정욕이 왕성한 때이기 때문에 비유에 등장하고 있다고 본다. 간교한 여인은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 집으로 이 청년을 이끄는데 솔로몬은 그 모양을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잠7:22)라고 묘사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희생양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굳세지 못한 영혼들로 선택을 하게 되고 베드로의 표현에 따르면 1:12의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한 것처럼 튼튼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서있지 못한 자들을 고르는 것이다. 주로 이런 빛의 반대역할을 하는 거짓교사들을 향하여 “저주의 자식이라”는 두려운 평가를 내리고 만다.
우리가 믿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시험과 고난에서도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잔칫날 잡혀 죽을 이성 없는 짐승처럼 믿음 없이 생각 없이 육신을 좇아 살면서 하나님처럼 전후 좌우를 알지 못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편치 못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일해야 할 허락하신 삶의 시간을 육신의 안일함을 좇아 노는 것으로 즐기며 보내고 성도들의 모임에서 경건을 가장하는 속임수로 예배와 음식을 나눌 수 있지만 자신과 같이 육적인 욕망으로 어둠의 동료를 만들기 위해 찾는 욕심에 익숙한 사람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데 교회에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3:1)들이다.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바울의 권면처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는 당부에 부끄럽지 않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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