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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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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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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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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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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3:13이 베드로후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비슷한 신앙적 이론을 가지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거짓 믿음과 함께 거짓 교리들은 있어왔다. 건전하지 못한 신앙의 교훈은 언제나 생활에 있어서도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는 것도 보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된 신앙을 지도하는 교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과 다르지 않은 생각 때문에 그들의 삶은 기본적인 도덕이나 윤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불신의 세상으로부터 도 지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보고 듣게 된다.
이 서신에서는 이 2장이 그렇고 3장에서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잘못된 가르침이나 주장을 하는 것들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경계를 주고 있다. 오늘의 내용에서부터 믿음의 거짓 교사들이 있어질 것과 그럼에도 그들은 과거 OT에서처럼 반드시 형벌 받게 될 것과 저들의 잘못됨을 밝히고 거기에 대한 결론을 맺는 것으로 이 2장이 진행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해 왔던 대로 유다서와도 비슷한 표현들을 더러 볼 수 있고 내용 속에는 OT의 징벌에 대한 사건들을 더러 인용하는 예들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는 대로 노아의 홍수를 비롯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하나님의 징벌의 내용들을 인용하고 있다. 현 세상에서 야 비록 거짓을 가르치고 행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도덕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벌 받을 것도 예언되고 있다.
Ⅰ. 어느 때나 있는 거짓 선지자들(1~2)
과거 이스라엘 속에 있었던 거짓 선지자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었음을 대조하면서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거짓 이단을 몰래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나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들과 함께 멸망으로 이끌려가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경계를 주고 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의 또 다른 특성은 당시의 이방 우상 숭배자들처럼 무질서한 성행위를 조장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의 도를 비방 받게 할 것이라 경고를 주고 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1f)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짓된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있어 왔었다. 율법시대에 경계는 신명기18:20에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기록되었고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이 여호사밧 왕의 요청으로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왕상22:6) 유다 말기에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같은 경계는 주어지고 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23:16) 여기 인용된 두 곳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의 감동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라는 표현이고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는 베드로의 경고이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1b) 여기에 사용된 “이단[αἵρεσις, 선택, 선호, 종파, 분열.]”으로 자신들이 멸망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그 멸망에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단은 언제나 떳떳하게 나타내지 못하고 가만히 끌어 드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단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 교주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우리를 피 흘려 죄에서 사 주신 주님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 부인되는 주님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간교한 속임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예레미야를 통한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은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23:21) 한 것이다.
NT교회 속에도 성경이 주어지기 전에는 이런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은사의 종류를 거론하는 고린도전서12:28f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라고 바울이 증거해 주고 있다. 유다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마25:41b)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1:4)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2) 선한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죄성을 가진 사람들은 성적인 문제에 더 쉽게 유혹되고 베드로 사도는 바로 뒤의 10f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 나타난 이단의 교주들은 대부분 성적 부도덕으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일들을 현실의 우리 시대에서 보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당시의 이방종교의 여 사제들을 통해 행해졌던 옳지 못한 성적 부도덕이 교회에 숨어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라는 경계이다.
“진리의 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가야 할 바른 삶의 길, 인생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이 따라야 할 바른 삶의 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이러한 길이나 도가 더러 기록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에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확장인 사도행전 속에서 두 곳만 언급하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행16:17b)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에 대한 귀신들린 여인을 통한 증거이다. 다른 한 곳은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행18:25f)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을 두고 하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OT에 대해 열심이었던 아볼로에 대한 평가다.
교회란 이 진리의 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곳인 데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는다면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는 것이다.
Ⅱ. 저들의 성격(3~4)
저들의 간악한 성품을 여기서는 보다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실된 종이라면 자신을 비워 하나님께 영광과 그분의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할 것임에도 노골적으로 이러한 사악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마지막이 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보다는 사람이 만든 그럴싸한 이론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성향을 잘 이용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안타까움은 자주 보고 있는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 창세 후로 계속되었고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보다 분명히 있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이 v4~는 이러한 형벌들의 전례들을 성경의 역사 속에서 들어 그러한 부류들에게 휩쓸려 심판에 나아가지 않도록 경계를 주고 있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3f) 출발은 “탐심[πλεονεξία, 탐욕, 사기, 갈취]”에서 나오고 그러한 사람들의 목적은 “이득[ἐμπορεύομαι, 장사(거래) 하다, 행상하며 돌아다니다]”에 있고 방법은 “지어낸[πλαστός, 성형된, 위조된, 가공의, 허구의] 말”을 도구로 한다. 철저하게 비 신앙적이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독생 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가장 처절하고 불행한 것들을 철저하게 감당하셔서 최종적으로는 인류의 사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빌2:6~8).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힘 입서 사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행하는 철저하게 사랑을 외면하는 사악함을 보이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러한 자들을 교회 속에서 철저하게 제외할 것을 디도에게 당부하고 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1:11) 유다도 여기에 대해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1:16b)고 경계를 주고 있다. 솔로몬은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하였지만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은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3f) 선언하신다. 뒤에서 과거의 인류의 심판의 역사를 거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졌고 악을 위한 멸망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여기에 표현이 정말 詩的이다.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비극적인 표현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비단 베드로만이 아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1:11~13) 어쩌면 비극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이 된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4)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3f)했던 것처럼 여기서 부터는 이런 주님의 교회 속에서 복음을 사악하게 이용해 먹는 범죄자들에게 있게 될 심판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반드시 형벌하실 것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의 범죄에 대한 심판의 이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다서에서도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범죄한 천사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고 하나님께서 소임을 맡겨 주셨음에도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천사들을 형벌한 것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형벌의 모양은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4b)라고 하셨고 유다서 역시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라고 같은 내용을 진술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범죄한 천사들의 졸개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며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심판 때까지, 큰 날의 심판까지” 저들의 졸개들의 활동도 한정되어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이 역사의 마지막은 믿음의 사람들의 영광을 기대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밤낮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괴롭히던 마귀 사탄의 역사도 끝나는 때가 될 것임도 기대할 수 있다.
Ⅲ. 그들이 받을 형벌의 본(5~8)
앞에서는 창조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했던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형벌을 증거하였다면 여기서 부터는 이제 이 세상에 있었던 심판의 실제적인 역사를 연이어 거론하고 있다. 그것이 노아의 때 물심판과 다음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유황불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거론은 단순히 이 역사 속에 있었던 심판과 형벌을 거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 속의 신앙안에서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3) 하였던 사람들의 형벌도 이와 같이 반드시 있고 야 말 것이라는 언약의 분명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복에 관한 것도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겠지만 형벌과 심판에 관한 약속도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들은 지구 전체를 심판하신 홍수의 심판은 간략하게 거론한 반면에 지역적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함께 그 가운데서 구원된 롯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구원에 대한 이유도 노아에 대해서는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 하였다면 롯에 대해서는 그냥 ‘의로운 롯’이라고 한 것이다.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라 했다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 저 불법한 행실’이라는 차이들이다. 기간적으로는 노아가 더 많은 세월동안 경건치 못한 세상으로 인하여 고통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무법이나 음란한 행실 또는 불법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불법한 행실로 고난당하는 롯의 고통을 더 많이 거론하고 있다는 점들이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5) 같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 있는 유다서에서는 이 홍수의 심판은 누락되고 있다(유1:4~6). 아담의 계보에서 셋이 출생하기 전까지 가인~라멕의 자신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일곱 세대 속에 난 사람들을 사람의 자녀들로 그리고 아담의 계보에 들어 있는 셋을 통해서 난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고 이들의 혼합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를 불러들이기까지 범죄하게 된다. 사람이 경건한 쪽으로 가기보다는 죄를 범하는 것이 더 쉬운 것임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하심으로서 소수일 찌라도 아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보존하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과거의 범죄하여 타락한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1:9) 기록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진정한 원하심은 분명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심임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죄는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5b)라는 안타까움이다.
세월은 흘러 역사는 거듭되었지만 또 다시 창조의 섭리와 질서를 잃어버린, 아니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대는 계속되어 온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6f) 두 천사들이 소돔성을 방문했을 때 소돔은 그 천사들을 향하여까지 정상적이지 않은 성적 타락을 극단적으로 보이고 만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19:5)는 자세는 정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아닌 동성애적인 성욕을 단적으로 들어낸 모습이고 이런 사실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죄를 멸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6b)라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가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동성 간에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은 같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7) 롯을 의로운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에 여기 기록밖에 없다. 소돔을 비롯한 이웃 도시들을 멸망시키실 때도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동성애가 난무한 소돔과 고모라로 인하여 롯은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으로 멸망당 할 그들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의인이었다면 롯은 소돔이나 고모라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의인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소극적인 의를 유다는 기록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1:7)고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6b)라는 같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
“이는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이 말씀은 전절(7) 내용의 반복이면서 롯이 살고 있는 소돔성의 불법한 행실을 매일 보고 들음으로 마음이 상했다는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근거이다. 롯은 사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소돔성으로 옮겨 간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창13:12~13). 그럼에도 그들과 동조할 수 없이 심령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심령이 “상하다[βασανίζω, 고통을 주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즐기며 죄악을 즐겼지만 롯은 그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인 의의 사람이었다면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깨어 의를 행해야 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옳지 못한 가르침으로 진리의 도를 버리고 주님을 부인하게 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짓 선생들의 의도는 뚜렷하다. 저들의 육신적 탐욕은 하나님의 진리를 팽개치고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위조된 말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기 때문에 저들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신의 지위를 이탈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천사들을 어두움에 던져 넣으신 것처럼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죄로 범람하는 세상을 홍수로 멸하셨던 과거처럼 죄를 안타까워하며 죄악의 도성에 살 던 롯을 제외한 주변의 도시들을 멸하셨던 것처럼 이 역사의 마지막은 반드시 의인들을 상주시고 악을 영원한 어두운 구덩이에 징벌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의 위치를 살펴서 비극으로 마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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