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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확실히 알아야 하고 단계적으로 성장해야 할 것과 이를 위해서는 바른 진리의 교훈을 지속적으로 들어야 하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이를 직접 체험한 사실이며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것을 당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쓰는 당시에나 요한이 그의 서신을 쓰는 1세기말렵, 그리고 오늘날에도 신앙의 문제가 다르지 않은 것은 역시 이 역사 속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것을 방해하고 대항하는 어둠의 세력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범죄한 인류가 이 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하는 죄성의 연약함 때문일 것이다.
믿음이 건전하게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좀더 바람직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교회조차도 모방된 거짓 진리를 더 좋아하고 영생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땅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 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경험한 베드로 사도는 교묘히 조합해서 만든 거짓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참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OT에서부터 예언된 진리와 그 예언의 증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직접 봐왔고 하나님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하신 음성조차도 직접 들었음을 경험을 들어 증거한다. 물론 여기에 증거는 변화산에서의 내용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Ⅰ. 친히 본 영광(16~17)
이제부터 말하려는 변화산의 사건은 요한을 제외한 공관복음(마17:1~8; 막9:2~13; 눅9:28~36)의 기자들이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으로 주님께서 구속의 완성전에는 침묵하도록 당부시킨 내용이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9; 막:9). 그러나 마태나 마가보다 누가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산에 올라간 이유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28f) 하였고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조차도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라고 기록한 것이다. 물론 오늘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이 변화산 사건의 내용은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16f) 사도들을 비롯한 베드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행하신 치유나 기적의 역사는 물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승천하시고 이 역사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복음과 구원의 논리를 알게 한 것이 그냥 당시의 종교적인 신화나 전혀 효력도 없는 종교적 계율이 아님을 확실히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복음의 정점이 “강림하심[παρουσία]”이라는 다시 오심에 절정을 이룰 것이다.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b) 이렇게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애썼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 신화나 동화, 그리고 당시 건전치 못한 이단들이 한 것처럼 적당히 짜맞춘 이야기이거나 흘러 지나가는 이야기를 듣고 전해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하신 것을 직접 보고 들었 노라고 고백한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17f)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이 체험한 사건이지만 어쨌거나 그 사건이 얼마나 황홀했든지 당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4f; 막:5f; 눅:33f)라고까지 고백하는 것을 본다. 이 광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과 방불하게 신비한 황홀감을 맛보게 하였다.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출16:10)
이러한 황홀에 싸여 있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17m)라 했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더 중요한 복음의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막9:7; 눅9:35) 이 내용 가운데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었지만 중요한 것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신 것이다.
모세는 율법의 수행자요 엘리야는 예언의 수행자였지만 최종적으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율법과 계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만이 효력 있는 구원의 방법임을 율법을 주시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최종적인 선언이신 것이다.
이 복음의 시대에 성령과 더불어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외에는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는 언약이요 약속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행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OT의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행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오신 율법과 계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만 하면 완전한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7b)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세 사도가 목격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막9:7; 눅9:35)하신 것은 아버지 자신과 다름이 없음을 선언하시는 것이고 자신의 영광과 위엄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도 그대로임을 증거하시는 선언이시다. 존귀와 영광은 이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도 어울릴 수 없는 하나님께 만 드려져야 할 찬송의 내용이다.
[323: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바울이 디모데에게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딤전1:17) 한 것처럼 존귀와 영광이나 영광과 존귀는 사람이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은 돌리는 자들에게는 반사될 수 있는 신비한 존귀이다.
Ⅱ. 확인된 사실과 주의(18~19)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셨던 사실을 목격한 경험과 이러한 교훈의 목적을 두번째로 주고 있다. 구원을 위한 계시의 중요성은 그 계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가 중요하고 또 그 계시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는 건전치 못한 이단의 사람으로부터 편집되고 조작된 계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8) 바로 앞의 v17에 기록된 사건의 장소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영광이 위로 하늘로부터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 거론한 변화산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이 메시지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의 어느 곳에서 이 사건이 있었느냐 보다는 마치 예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증거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 같은 전통의 중요성보다는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라고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복음의 완성 후에 가장 중요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예배이다. 아무리 보기에는 화려하고 장엄하게 보이는 예배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생명이 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예배의 중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희생되신 십자가와 피 흘리심 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거룩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예배라는 이름아래 행해지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자신들의 만족과 감격으로 행해지는 사람 중심의 모임은 경계되어져야 만할 것이다.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8b)는 출처 역시 중요한 계시의 출발지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 하였고 요한 사도의 증거처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듣는 것이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생명의 출처이다.
이렇게 계시와 예언의 출처와 중요성을 말한 베드로 사도는 그 계시의 역할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19) 복음에서 완성된 예언은 추하고 더러운 곳을 비추어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완성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바른 것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주의가 필요한 것임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①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이 말씀은 OT의 예언이나 계시를 전제로 한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대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모든 계시의 완성이요 절정이시다. OT의 부분적인 예언과 계시에 비교될 수 없는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f)
②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여기 “어두운[αὐχμηρός, 더러운]”은 어두운 곳은 볼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할 수 없고 거기에 빛이 비칠 때 비로소 더러움과 수치스러움은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이론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예수께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 예언을 인용하셨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 죄로 어둡고 더러운 곳에 복음의 빛이 들어가면서 밝아지고 소망을 찾게 되는 것은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실제적인 현상이다.
③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선언하시는 말씀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계22:16)는 기록을 본다. 이 역사의 밤이 지나고 광명한 새벽별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기까지 또, 각 개인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계시기까지 바른 계시와 예언을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만 예언이나 계시가 땅에서 난 것인가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분간하면 된다.
④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적어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주의하는[προσέχω, 주의, 경계, 조심하다, 전념하다]” 것은 옳은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에서야 ‘건전치 못하다, 이단이다. 미혹되지 않게 하라’가 필요하지만 바른 것을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만 지켜간다면 그 이후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논쟁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만 주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Ⅲ. 성경의 이해와 출처(20~21)
오늘 메시지의 마지막에서는 성경의 적용과 다시한번 우리에게 유효한 계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통로를 증거하고 있다. 뒤의 3:3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먼저 이것을 알지니” 한 것처럼 성경을 대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를 당부하는 표현으로 “먼저 알 것은”이라고 시작한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20) 항상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계시의 적용은 여기서 판가름 난다. 성경은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인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 적용도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경계에 대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하는데 여기 “혼잡하게[καπηλεύω, 소매상을 하다, 행상하다]”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장사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육신적 유익을 위해서 적용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 계시의 올바른 통로를 다시 한번 증거하고 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21f) 첫번째로는 계시에 있어서 사람이 부정되고 있다. 예언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만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의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시고 선하시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사람도 하나님처럼 거룩한 의향이나 뜻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뜻을 위해서 있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해석도 사람의 기뻐하는 의향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된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21b) 이제 계시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이다.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성경의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부인하였고 여기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증거는 계시의 출처가 완벽하게 하나님으로부터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려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기록하게 하신 통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도 동일한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f) 여기 “감동[φέρω, 가져오다, 운반하다, 옮기다, 참고 견디다]”이라는 말 자체가 자신의 것이기 보다는 단순히 옮기는 것에 불과하고 자신의 의향이 아니라 옮기는 것 자체가 짐이 되어 견뎌야 하는 입장까지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을 예레미야는 고백하고 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어쩌면 성경의 출처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데서 이단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이유인 것 같다. 대부분의 이단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만 받은 성경의 이해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가진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는데 어쩌면 그들은 영원에 대한 심판조차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악한 짓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따라 갚을 것이라는 경외감이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너무나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해의 방법도 당연히 성경을 주신 역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기 때문에 단순히 사람의 이성이나 감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성이나 감정을 온전히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감화하시도록 하여 성경의 저자 이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읽을 때 성경은 생명이 되고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다. 또, 이런 자세로 계시나 예언을 대한다면 그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바른 이해를 하게 될 것이므로 개인의 육신을 위한 이해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구원의 복음이나 그 복음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의 소설이나 동화들처럼 그럴싸하게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에 주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이 친히 본 사실로 변화산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시는 음성을 하늘로부터 친히 들었다.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니라 요한이나 야고보와 기도하러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들은 말씀이고 OT의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되어 왔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오셔서 죄로 어둔 세상에 빛을 주셨고 역사의 어둠이 끝나는 주님의 다시 오심의 때까지 모든 계시들을 확인하고 분별하는 것이 신앙에 옳은 것이다.
우리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해 주신 모든 성경은 개인의 이성이나 감성에 의해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는 것은 성경 말씀인 예언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오직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주셨기 때문에 기록하게 하신 성령을 의지하며 읽고 소화함으로 적게는 나 개인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해석에 있어서도 적용에 있어서도 절대로 개개인의 육신을 위해 적용되어서는 생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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