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벧후1:9~15 2026-05-03
형제들아 더욱 힘써,  
베드로 사도는 이 歷史와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앞에서 지적한 믿음의 진보를 지속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감격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세례로 거듭나고 이제 믿음의 삶은 거기서 머무르거나 끝나버리는 자라지 못하는 경우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실제로 삶이란 머무르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것은 육신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영원을 향한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 까지는 언제나 계획을 세우고 소망을 가지고 도전하는 그런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삶의 모습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바른 교훈으로 교훈을 받는 것이 계속되어야 함으로 지금 베드로 사도가 현장에서 사역할 때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세상을 떠나고 없을지라도 이런 가르침은 지속되어야 함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만하면 됐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자위하는 순간 그 믿음은 생명력을 잃고 오히려 퇴화될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주 거론하는 말이지만 믿음의 진보가 계속되지 않으면 오히려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어두운 면이 더 강해지는 상대적인 현상이 믿음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믿음의 진보나 도전은 연령에 관계없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다음 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경계하고 있음을 듣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2:14)

오늘 내용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만하면 됐다!’고 자위하는 순간부터 과거의 사죄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현재의 특권을 바로 보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영광을 볼 수 없는 소경의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넉넉히 주시는데 오히려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이 넉넉함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림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믿음의 이치가 자신이 육신을 떠난 후의 상황일지라도 지속적으로 경계되고 격려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Ⅰ.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9~10)

앞의 v5~7의 신앙의 성장을 바로 앞절에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8)라고 격려하고 칭찬했다면 여기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를 안타까워하고 이러한 신앙적 단계적 성장을 다시 한번 격려하고 도전하는 내용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영적인 시각도 믿음의 성장의 상태에 따라 다름을 지적하는 것이다. 눈은 그것이 육신의 것이든지 영적인 것이든지 가까이 그리고 멀리 고루 잘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9f) 신앙의 성장이 지속되지 못하면 영적인 시각이 부분에 치우치게 되고 참으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볼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기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쓰여진 “맹인[τυφλός, ← τυφόω, 연기로 둘러싸다, 흐리거나 어둡게 하다]”은 눈은 가졌어도 봐야 할 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거론하는데 특히 주님께서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눅6:39)고 바로 앞에 메시야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표현을 쓰셨다.

특히 “멀리 보지 못하고[μυωπάζω, 근시], 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의 세계를 넘은 피안의 세계, 감춰진 세계인 천국을 보게 하고 사람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셨는데 그 영적인 건강 상태가 회복되지 못하면 천국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적 시각장애자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육신에 따른 세상의 영광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믿음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까지 이르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은 육신의 눈은 시신경만 건강하다면 그래도 인공안구까지 넣어서 시력을 회복시키고 그것도 안될 때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으로 시력을 교정하기도 한다. 이 말은 돈만 주면 육신의 눈은 밝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영적인 시력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서만 회복되지만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9b) 마침내는 사죄의 은총을 잊어버리는 데까지 갈 수 있다는 데서 믿음을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다. 여기 “깨끗하게 된 것[καθαρισμός, 깨끗케 함, 물로 씻음, 구속]”은 세례를 통해서 죄 씻음을 의미한다고 볼 때 사죄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라고 이해된다.

우리가 예배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게 하신 것도 이 사죄의 은총을 매주 새롭게 확인하는 은혜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사죄의 은총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불신이나 다름이 없이 되고 말고 특히 뒤에 3:5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조차도 일부러 잊으려 한다는 말씀을 읽게 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 조차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거지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대항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 조차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10f) 바울 사도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4:1)라고 비슷한 당부를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벧전1:15f) 하였고 같은 1: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증거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앞의 v3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이를” 말함으로써 부름 받은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위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의 자세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는 확정되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βέβαιος, 확고한, 확실한, 흔들림 없는]”는 것으로 이것은 쓰여진 문맥상으로 각자 스스로의 영적인 노력을 견지함으로 가능함을 가르친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생명의 은혜를 보다 견고히 할 필요를 당부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10b) 신앙은 사람 스스로의 노력이기 보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하는 것도 먼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령과 더불어 애쓰는 영적인 자세를 이름이다. 신앙에 역시 자주 경계되는 표현도 “실족[πταίω]”인데 이것은 대개의 경우 긴장을 풀어버린 방심하는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미끄러짐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매진하는 도전의 사람들에게는 실족은 흔치 않을 것이다.



Ⅱ. 지속적으로 진리에 서라(11~12)

연이어지는 강조의 표현이다. 신앙에 지속적으로 도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모자라지 않을 것이며 어떤 또 다른 특별한 신앙의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에 든든히 서서 생명의 진리를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한다고 증거한다. 우리가 항상 듣는 말씀이나 신앙의 가르침이 모자라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경계한 것처럼 한번 받은 구원은 이제 하나님께 맡겨두고 나는 그냥 무사안일 하게 경계를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서 있는 진리안에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더욱 확실히 하고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1) 계속해서 신앙의 정진을 대명사로 다루고 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8f) “이런 것이 없는 자는…”(9f) 하였다면 다시 “이같이 하면…”으로 지속적으로 신앙의 성장에 힘쓸 것을 당부하지만 앞에서는 개개인의 노력으로 보이는 반면에 여기서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확인하는 표현으로 기록되었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가 영적인 신앙의 도전을 당부한 것으로 이것이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를 없애기 위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여기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창조된 세상의 주인이라는 의미와 죄인을 위해 친히 대속제물이 되신 구주 라는 표현이 함께 쓰여 현재와 영원의 주인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독특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라는 복음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의 아들의 나라이고 이것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말씀하셨던 부분들이다. 여러 곳에 기록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 곳만 참조하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하셨다. 이 역사가 마무리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현도 다르지 않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11:15) 이러한 이론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같은 한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로 ‘겨우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1b) 하심으로서 비록 사람에게는 모자람투성이 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이 풍족하신 것처럼 구원에 들어 감에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임은 그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도 이를 증거하신 바 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 앞에서 계속 말해온 사실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 “그러므로”이지만 여기서도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알고” 하였다. 신앙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면 듣고 보고 확인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러한 가르침에 서 있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인정하고 있다.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물론 여기에 말하고 있는 진리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2:5)이라 하였고 안디옥에서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갈2:14f)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회상하면서 이 말씀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b) 이미 그들이 진리 가운에 서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이 구원받은 복음의 진리를 기억하고 그 가운데 요동치 않고 서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 속에 든든히 지켜갈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다. 이제까지에서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켜갈 것을 당부했다면 여기서부터 이 1장의 마무리까지는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을 통한 교훈을 기억하고 지켜가는 것이 바로 앞의 성결의 삶을 지속적으로 가능케할 수 있는 근거임을 가르치고 있다.



Ⅲ. 진리의 일깨움은 지속되어야 한다(13~15)

사도들의 권면인 말씀을 확인하고 지켜갈 것을 당부함에 있어서 먼저는 이러한 교훈을 전하는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고 비록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에도 이러한 당부는 유효하고 지속되어야 함을 부탁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고 증거된 복음의 진리는 언제나 확인되고 지켜져야 하는데 물론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같은 말씀이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13)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육신으로 살아 있다면 그 삶의 목적이 오로지 복음으로 일깨우는 기회로 고백하고 있다. 역시 이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수 사도다운 면모를 보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몸을 “장막[σκήνωμα, 근동지방에서 목동들이 양에게 풀을 뜯기기 위해 옮겨서 세우는 천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허술하고 약하며 곧 뜯어서 다시 옮겨 세워야 하는 임시 거처라는 의미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께서 이 임시거처 같은 육체에 살게 하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 사도의 육체에 거하는 이유를 같이 볼 수 있는데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고 역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하여 산다고 고백하고 있다. 보다 분명한 베드로의 목적은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13) 모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른 역할임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도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란 영적인 귀중한 역할을 베드로처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가 땅에 남아 있는 이유?’를 늘 헤아리자!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4)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지시하신 것을 생각하여 이 육신을 벗을 것에 대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신 예언적 말씀을 기억하는 것 같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시고 자신의 양들을 치거나 먹일 것을 당부하신 후 친히 주셨던 말씀으로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f)는 요한 사도의 기록에서도 보는 것처럼 베드로의 만년에 자연스럽지 않은 순교적 죽음으로 육체를 떠날 것에 대한 말씀이셨고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다시 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마지막을 내다보면서도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5)고 그런 일이 이를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여 복음으로 사람들을 일깨우는 일에 매진할 것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삶의 마지막 까지도 할 바를 다함으로 자신이 육신을 벗은 후에라도 이런 귀중한 이치를 생각나게 하겠다는 각오를 전하고 있다. 마치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빌립보 교우들을 향하여 주는 고백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당연히 그의 헌신과 희생을 보고 있는 지체들이 구원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고 또 다른 사람들까지 복음에 참여시키는 일에 열심이었겠지 만 지금은 자신의 스승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장에서는 조금은 등한해질 수 있지만 불변하시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스승인 바울 보다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여 경외함으로 진리에 복종하고 순종하여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당부라는 데서 역시 베드로의 권면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 우리 교회의 교우들에게 있어서는 고 김관평 전도자를 마음에 둔다면 베드로나 바울 사도의 이 같은 권면이 보다 실제적이어야 할 것이다. 김전도자께서 떠나시고 잠시라도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났을지라도 이제는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더욱 진리에 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힘써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마치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어 훈계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께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훈계하던 과거의 충성된 일꾼들을 돌아보면서 더욱 진리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더욱 진지하게 회상하고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신앙은 정체되지 않고 오히려 퇴화된다.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 주신 특권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는 볼 수 없는 천국이 보이지 않고 평생의 죄를 사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를 죄에서 자유케 해 주심도 잊어버리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도 믿음에 더욱 힘써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요동치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에서 미끄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실 뿐도 주님이시다. 이런 이치를 이해하고 진리에 서있는 가를 늘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 전 육신에 사는 동안 베드로나 바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나 같은 믿음의 지체들과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진리인 복음을 생각나게 일깨우는 일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에 가장 귀중한 과제이다. 이러한 주님의 당부에 부끄러움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