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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후1:1~8 2026-04-26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66권이 신앙의 기준으로 선택되는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이 중에서도 공동서신(약~유)이 가장 마지막으로 정경(Cannon)에 포함되었다. AD 397년 제3차 카르타고회의에서였던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그분의 말씀은 이미 계획하고 계셨기 때문에 정경에 더해졌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지역의 교회보다는 모든 교회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교훈이라는 데서 공동서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특히 오늘날과 같이 영계가 혼란한 가운데 이 공동서신의 귀중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어려움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경계하기 위해서 쓰여진 서신이 베드로전, 후서이다. 이 후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믿음의 신령한 성장을 격려하는 것이 1장이라면 2장은 거짓교사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유다서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볼 수 있다. 3장은 잘못된 종말의 신앙을 바로잡아주는 길지 않은 서신이다. 베드로 후서의 신학적인 논쟁을 다루는 것은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전서가 외부의 박해에 대한 자세를 다루었다면 이 후서는 내부의 적을 경계하고 있는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전서를 써서 계속되는 핍박의 고난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했다면 그러는 가운데서도 다시 교회 내에 거짓교사들을 비롯해서 나타나는 향락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경건치 못한 상황을 감지하고 다시 이 둘째편지를 보내면서 이단을 경계하고 바른 신앙을 견지하도록 권면하게 된 것이다. 전서가 박해를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면 후서는 교회내에서 일어나는 이단사상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이 1장은 다시 쓰게 된 편지의 인사말과 함께 믿음생활이 항상 그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성장해서 장성한 부분에 이르도록 격려하고(3~11)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신앙의 기준으로 가르쳐준 교훈들을 기억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12~21)으로 되어 있다. 신앙의 성장은 지금까지 없었던 특별한 어떤 체험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르쳐준 바른교훈 안에서 정진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Ⅰ. 축복(1~2)

당시 서신들의 일반적인 격식을 갖추는 표현으로 먼저 인사와 함께 수신자를 거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 대한 감격과 축복을 주고 있다. 다만 전서와 다른 것은 자신의 히브리식 이름인 “시므온[Συμεὼν(שִׁמעוֹן), 듣는다, 순종한다]”을 첨가하고 있다는 차이를 볼 수 있다. 자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믿음을 가지고 섬기는 종으로서의 감격이 담겨있다. 축복은 믿음으로 인한 일반적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짧은 인사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상대를 이어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3번씩이나 거론하는 것도 그의 또다른 믿음의 표현인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1f) 당시에 종이란 노예의 신분으로 천시 여기는 시대였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자신의 위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고려하지 않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요 감격이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단체, 천시 여기는 종(δοῦλος)을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갈릴리에서 어부생활 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불리움을 사도라는 역할도 자랑스럽게 증거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1m) 자신이 이 편지를 쓰고 보낼 수 있는 자격이 이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먼저 증거되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한 것처럼 십자가의 희생을 근거로 한 자격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이건 하나님의 일꾼이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이 새로운 삶의 출발이요 고백인 것은 모두가 다르지 않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b) 믿음의 사람들의 교제의 근거는 사실 이것밖에 없다. 이미 전서에서도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1:7f)라는 고백처럼 믿음안에서의 교제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교제와 나눔의 근거는 이것밖에 없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염려로 힘들어하는 시대에 우리가 서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은혜와 평강을 넘치도록 누리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인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믿음의 특권이 얼마나 큰가를 베드로처럼 감사하게 된다. 물론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차이에서 가 아니라 각자의 믿음의 깊이에 의한 차이이기 때문에 같은 믿음안에 있는 지체라면 이왕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평강을 더욱 넘치도록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1:27)고 격려함을 듣는다. 그러므로 같은 믿음을 가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격려는 우리가 가진 은혜와 평강을 더욱 확실히 많이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뒤의 3:1b에서 다시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라는 기록에서 이러한 의향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Ⅱ. 경건과 신성에 초대(3~4)

우리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귀중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을 피하고 오히려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한 초청을 주고 있는 근거로 그 구체적인 도전은 다음의 항목 들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3f) 사람의 눈속임이나 사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희한한 영적인 능력과 생명을 사람에게 주신 신비에 감격하고 있다. 이제는 믿음으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신비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다는 확신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힘입어 거듭나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비로소 하나님을 잘 예배하(εὐσέβεια)는 새로운 영적인 피조물이 된 것이다. 특히 여기 “주셨으니”는 과거 완료로 되어 있어서 이미 완전히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로 인하여 원수 되어 있던 우리에게 우리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신령한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모두 주셨다. 그 이유는 역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근거를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3b) 증거하고 있다. 죄인 된 인류에 근거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또,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나 사랑은 역시 사람 스스로 깨달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아들을 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은혜의 역사에 자신을 기꺼이 맡기는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4f)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과 생명에 속한 것들이 모두 주어져 있다. 여기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영원한 영광의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영생을 마음에 두고 주는 확신이다. 이것이야 말로 죄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이것이야 말로 약속 중에서도 귀중하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물론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보배로운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이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4m) 원문에는 약속이란 말이 쓰이지 않았지만 바로 앞의 “큰 약속”을 지시 대명사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도 당연히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으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정욕이나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려 할 것이다. 다만 이어지는 내용은 신앙적인 표현이기 보다는 당시의 일반 사회에서 사용되는 그리스적 표현 그대로의 가져온 것이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b) 신앙의 사람인 베드로 사도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과 임마누엘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주고 있지만 아직도 인간적인 방법과 수완으로 세상말로 신의 경지에 이르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애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노력이나 비 성경적인 방법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러 보겠다고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들이 바라는 경지에 이미 들어가 있다.”는 표현일수도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셔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뜻을 알게 하셨다. 또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의향을 따라 보다 신령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셔서 이제는 과거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썩어질 세상의 좋은 것들 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을 더 기뻐하는 변화된 삶을 살게 하셨다. 여기에 따른 매일의 영적인 성장을 당부하는 내용이 오늘 나누는 마지막 부분의 영적인 진보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영적인 성장이나 자기 개발을 하려는 신앙의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쉬운 것이 되겠지만 이런 영적인 성숙이나 진보는 단순한 육신의 노력과 애씀으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여기에 제시되는 어떤 부분들이나 용어들은 역시 당시의 그리스철학의 용어들 그대로 인 것들도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실제적인 삶과 연결되어지고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기로는 지극히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적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도 이런 기준 때문일 것이다.



Ⅲ. 경건의 진보(5~8)

베드로 사도가 주문하는 영적인 진전은 v5~11이지만 다룰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이부분을 오늘은 ~v8만 나누고 다음 시간에 연결하는 것으로 진행할 것이다. 여기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앞의 v3~4 전체를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 구원이라는 데서 단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거기에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을 베드로는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주셨기 때문에(3)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자람 없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100% 활용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뜻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5)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성장에 힘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써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사람들의 노력은 스스로의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인한 믿음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믿음 자체가 사람에게서 난 믿음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물(은혜)로 주신 믿음(엡2:8)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믿음에는 반드시 덕이 함께 해야 하는데 덕은 주관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객관적이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의[δικαιοσύνη]”라면 “덕[ἀρετή]”은 당시의 그리스철학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전서2:9b에서 우리를 제사장 삼으신 이유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증거한 바 있다. 덕에 지식[γνῶσις]은 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덕은 어두움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용어 자체는 세상적인 앎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6) 지식에는 반드시 그것이 “절제[ἐγκράτεια]” 즉, 통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신앙안에서의 절제를 성령의 열매로 다루고 있다.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3) 절제에 “인내[ὑπομονή]”가 따르는데 그냥 억눌림에서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소망으로 인하여 견디는 것이라는 데서 세상의 인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세상의 스트레스는 그냥 견디다 보면 자신의 어딘가 가 망가지게 되지만 믿음 안에서의 인내는 용어는 다르지만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있어서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을 거론하고 있다(갈5:22). 인내에는 “경건[εὐσέβεια]” 그리스시대의 이 낱말은 ‘주로 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낱말’이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7) 경건에 형제 우애[φιλαδελφία]이 따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옆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형제 사랑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1:22) 형제 사랑의 근거와 격려를 아울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이것을 마지막의 당부로 주는 것에 무게가 있다. 바울 사도 역시 강조하는 부분이다.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하는데 아무리 존경과 우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 간의 최고일 뿐이지 역시 믿음의 완성은 “사랑[ἀγάπη]”이다. 신앙의 3지의 기둥 중에서도 역시 사랑은 영원하며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것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성경의 중심기도 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f)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면서 비로소 영원까지 지속될 생명의 능력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신앙적 덕목을 제시한 베드로는 성장의 목록을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 박힌 못을 한번 더 망치질하듯 덧붙이고 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8f) 이런 점진적인 성장으로 비로소 흡족하게 된다는 확인이고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으로부터 이 편지를 받거나 가르침 받은 결과가 그렇게 될 때 사역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신앙에 흡족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 편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아직 불완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구원의 신비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면 알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욱더 신앙에 매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거룩한 욕망으로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8m) 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하는 열정에서 앞(5~7)에 나타난 믿음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는 증거이다.

믿음의 도전의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8b) 한 것처럼 결실이 있을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 “게으름[ἀργός, α + ἔργον]”과 “열매 없는[ἄκαρπος, α + καρπός]”이란 두 낱말은 같은 의미이며 게으름 이란 야고보에 의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약2:20)이고 열매 없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나 모든 사도들이 한결같이 모든 신앙의 행위가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과는 반대적인 현상이다(마3:8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막4:20좋은 땅에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 갈5:22오직 성령의 열매는; 골1:10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약3:18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이 말은 베드로나 사도들과 우리모두는 꼭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확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을 축복함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신 하나님을 알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썩어질 세상의 정욕보다는 하나님의 신령하신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출발한 신앙의 성장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런 성장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열심을 내며 항상 열매를 결실하는 천국백성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러한 권면과 당부에 부끄러움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