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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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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5: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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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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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하라 깨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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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의 마무리에 왔다. 일세기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박해를 견디며 신앙했던 성도들에게 격려와 소망을 주기 위한 서신이었다. 지난 시간 마지막 구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7f) 권고했고 거기에 대한 약속도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b)는 확신을 받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으므로 이제는 해야 할 것이 전혀 없이 태연하면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어지는 오늘의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 우리의 할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 메시지의 중요점은 이 세상의 하나님의 대적자인 마귀를 적극적으로 대항하라는 당부가 주어지고 있다.
마귀 사탄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제적인 대적들이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할 쉽지 않은 대항자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 범위와 방법이 하나님 다음으로 넓고 간교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나 백성들이 실족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 마귀 사탄의 부추김 때문임을 볼 수 있다. 다윗의 태평성대의 시대에도 마귀는 이스라엘의 왕권의 영광을 자랑하도록 백성의 수를 헤아리게 하는 범죄를 짖도록 하는 부추김을 볼 수 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이런 본보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경성해야 할 이유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제적인 사건이다. 마귀 사탄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넘어뜨릴 대상을 찾고 다니는 것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Ⅰ. 마귀를 대적하라(8~9)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이 가까울수록 바빠지는 또 한 무리는 사탄과 그 졸개들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저들의 역사는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막13:22)는 우리 주님의 직접적인 경계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마귀로 인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며 싸우는 사람들은 나 한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싸움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므로 서로 격려하며 이러한 영적 전쟁에 보다 적극적일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오늘의 첫번째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8)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치에서 믿음의 사람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원리가 근신하라 깨어라 뿐만 아니라 ‘술 취하지 말라’(4:3)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재림에 교훈에서 이런 당부를 여러 번 주신 바 있다. “근신하라”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가 삶을 움직이고 있는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깨어라”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여기 쓰여진 “깨어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의미하는데 무개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이란 다른 말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깨어 있는가 항상 점검해야 한다.
왜, “근신하라 깨어라”는 당부를 주는 가도 이유가 분명하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분법적이라 거나 흑백논리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영적으로 분명히 한편에 있게 되어 있다.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 편이든지 아니면 그 반대편인 마귀 사탄의 편으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너희 대적 마귀가”라는 것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적은 하나님의 대적을 일컫는 표현이다. “마귀[διάβολος, 중상자, 비방자]”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도들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비방하는 자이다(계12:10).
그런 다음 연이어서 대적 마귀의 특성과 행동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 첫째는 그 모양을 우는 사자 같이 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움키기 위한 표현 그대로이다. 여기에서 사자란 어떤 일을 전달하는 전령자가 아니라 밀림의 왕이라고 하는 짐승 사자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자로 표현(계5:5)하는 경우도 있고 성경에 상당히 자주 거론되는 짐승인데 여기서는 마귀를 굶주린 사자로 표현하고 있다. 왜 다른 짐승이 아니라 사자일까 하는 것은 짐승을 찢어, 먹이를 삼는데 가장 강한 짐승이고 또 이 사자는 먹고자 하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또다른 특성이다. 우리의 대적을 사자로 표현했다면 우리는 그 사지보다 강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이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 한 것이다. 사탄의 특성의 두루 다니는 모습은 이미 욥을 참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들 앞에 왔던 사탄의 답변 속에서 듣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욥1:7, 2:2) 우리의 적들은 이렇게 없는 곳이 없다. 어디든지 다니는데 그의 목적은 한가지 “삼킬 자를 찾”는 것이다. 먹기감을 찾아 밀림에 으르렁거리며 두루 다니는 사자를 우리의 대적자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여기에 주어지는 경계를 분명히 주고 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9) 안타깝게도 사자에게 쫓기는 연약한 짐승처럼 먹이감을 찾는 사탄에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 악한 것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가 가르쳐지고 있다. 여기는 그러한 악의 사자를 대항할 방법과 동료들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는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9f)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야고보도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6:7b) 확인한 바 있다. 사탄의 술책은 대부분 세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의 감각을 속여 판단을 흐리게 하는데 여기에 속은 것이 최초의 여인 하와였다.
다음으로는 마치 자신을 천사로 위장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에 그릇된 판단을 더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경계는 바울 사도가 고후11:13~15에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는 경계를 주고 있는 내용이다. 사탄의 마지막 방법이 우는 사자로 힘과 완력으로 넘어뜨리고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9)고 우리의 전우들이 함께 싸우고 있다고 격려하는 것이다.
Ⅱ. 굳건하며 강하고 견고하게 하시리라(10~11)
하나님은 사자와 같이 우리에게 달려드는 대적 마귀들을 스스로 싸워 이기라고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여기서 확인한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리를 영광으로 불러들이시고 모든 은혜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우리의 아버지께는 악과 더불어 선한 싸움을 계속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 된 자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며, 믿음의 바탕을 더욱 튼튼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함을 찬양하고 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10f)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좋은 것들을 그대로 확인하는 표현이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선물 주시기를 즐기실 정도로 좋으신 아버지신 것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f)라고 야고보가 증거하는 거처럼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나 감사와 기쁨이 되는 그 첫째의 선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으셨다면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나 했겠는가! 바울의 옥중서신들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물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뜻이다. 이런 분명한 목적과 뜻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마귀 사탄이 발악을 하여 우리를 가로채 가려고 사자처럼 울부짖을 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한 것처럼 우리가 영광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은 대적 사탄이 손쓸 수 있는 온 갓 권모술수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과 은혜를 지속적으로 베푸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이런 이유 때문에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10b) 하신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엡2:2)이 아직도 활동하는 이 어두운 이 역사 속에서 육신을 입고 신앙하는 동안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그 고난에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준비하시고 부족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 “친히”는 큰 신뢰감을 주고 있다. 천사들을 시킨 것이 아닌 “친히”는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계속된다. 친히 굳건하게[στηρίζω,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하다] 하시며, 친히 강하게[σθενόω, 활력을 불어넣다, 원기 왕성하게 하다] 하시고, 친히 터를 견고하게[θεμελιόω, 기초를 두다(놓다), 기초를 닦다 에서부터 견고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확실히 하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표현들은 한마디로 우리의 천국행의 삶이 전혀 요동치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면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지 않는 이상 어떤 부정적인 원인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은혜에서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사람 스스로가 거절하지 않는 한 구원의 약속은 변치 않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그분께 드려야 할 반응은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11)인 것이다. 이미 4:11b에서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영광을 돌려드린 바 있다. 바로 앞에서 본 대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행하신 일에 비교한다면 우리는 영광을 돌리고 돌린다 해도 모자랄 뿐이다. 하나님께 만 영광을 돌리는 바울 사도의 찬송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표현에 있어서 바울은 대표적인 예로 디모데에게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b)처럼 “영광[δόξα]”을 했다면 베드로는 “권능[κράτος, 힘, 권능, 세력]”으로 통치의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고 히브리서13:21b 역시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였고 요한 사도도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b)이라고 찬양하였다. 베드로사도의 “권능[κράτος]”을 NT에서 다른 표현으로 비교한다면 행8:10 자연적인 “능력[δύναμις]”이나 “권세[ἐξουσία]”와 같은 표현들로 하나님의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권능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그를 순종하여 십자가의 은혜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는 구원의 완성을 약속하신다.
Ⅲ. 은혜에 굳게 서라(12~14)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을 비롯한 그리스시대의 서신들에서 공적 서신의 마무리를 하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형식으로 이 서신이 마무리되고 있다. 한가지 독특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동역자였던 실루아노를 가장 먼저 거론하고 있는 것인데 이 서신의 분위기로 볼 때 이 베드로 전, 후서의 대필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단순히 안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안의 대상들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고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12f) 실루아노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는 사도행전 15장 말미에 마가 요한의 일로 말미암아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유럽전도에 함께 했던 특히 빌립보 옥중에서 간수의 가족을 회개시켜 주님의 교회에 더해진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대부분 “실라[Σίλας]”(행15:40)라는 이름이 일반적이고 바울도 이렇게 그렇게 “실루아노(Σιλουανός, 고후1:19; 살전1:1; 살후1:1)”로 부른 바 있지만 그가 어떻게 베드로와 동역을 하게 된 것은 우리가 가진 기록에는 없다. 신기한 것은 바울이 1차전도여행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마가를 인하여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해어졌던 그를 나중 바울이 역시 다시 찾는 것을 봐도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관계속에서도 볼 수 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골4:10; 몬1:24) 어쨌거나 베드로는 이 실라를 신실한 형제라고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12b) 베드로는 이 실루아노를 통해서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은혜였음을 증거한다. 성령을 통한 좋은 권면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하고 그 권면을 받고 순종한다면 그것은 은혜위에 은혜일 것이다. 그것도 이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부하고 권면한 것이 은혜임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다음 순서는 이 은혜에 굳게 서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고 경계를 준 바 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에서 “너희는”을 강조함으로써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이 서신을 받아 읽는 자들을 격려한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13f) 이 내용의 본래적인 그리스어 원문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없다. 다만 교회라는 단어 앞에 쓰이는 여성 관사인 “ἡ”와 함께 함께 택하심을 받은이라는 “συνεκλεκτός = σύν + ἐκλέγομαι”는 형태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장소일 수도 있고 또 베드로가 관련하고 있는 교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에 대한 이해는 여러가지가 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가 과거 역사적인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곳의 교회를 들어 문안한다고 문자적인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 바벨론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계14:8, 계17:5, 계18:2, 10, 21) 상징적인 이름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에 죄악과 음란이 범람했던 로마를 별명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인데 다만 계시록에서도 보는 것처럼 바벨론은 음란과 죄악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죄악 된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로 보는 견해이다. 또, 당시에는 교회가 핍박 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별명으로 불러졌다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어쨌거나 이 편지를 기록한 장소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어디에 있는 교회이든지 중요한 것은 “택하심을 함께 받은” 세상의 어느 곳이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바른 교회가 존재한다면 즉,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그 교회의 가치의 전부일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는 관련이 없는 교회라면 아무리 웅장한 건물도 많은 사람도 가치를 갖지 못할 것이다.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13) 마가는 행12:12에 나타나는 대로 그의 어머니집에서 교회가 모였던 것으로 부유한 형편의 가정이었던 것 같고 요한이라는 유대식 이름도 있다(행12:25). 바울과 함께 제1차 전도여행에 그의 외삼촌(골4:10)인 바나바와 동행하였지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밤빌리아에서 홀연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자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바울과 바나바가 나눠진 것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역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의 아들이 된 것은 성경의 기록에는 없지만 약간 거론했던 대로 바울에게 디모데가 믿음이 아들(딤전1:2)이었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믿음의 아들이 되어 복음서를 기록하는 것까지도 우리가 보고 있다. 그 믿음의 아들이 역시 문안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4f) 이것은 어쩌면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대표적으로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16:16; 고전16:20; 고후13:11; 살전5:26) 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친근한 인사 예법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물론 유대인들의 인사 예법이었던 것으로도 시몬이라는 사람의 식사 초대를 받으셨던 주님의 말씀가운에 거론되고 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눅7:45) 문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진지하고 특히, 여기 “입맞춤[φίλημα]”으로 쓰인 단어를 볼 때 남녀의 애정을 표현하는 “ἔρως”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의 표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4b) 1:2b 이미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축복한 바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적인 인사가 “샬롬![שָׁלוֹם]”인 것처럼 그리스어의 평강은 “εἰρήνη!”였다. 그러나 평안의 범주는 분명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라는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우리의 마음을 성전삼고 임마누엘로 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고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 평강의 사실을 다시 일께우는 것일 뿐이다. 평강 이야말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차별 없이 주신 은혜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집요한 대적 마귀는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어둠으로 가게 될 자신의 동류를 만들려고 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달려든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바울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다.
구원이 어렵지 않은 것은 모든 은혜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영광에 초청된 모두를 이 땅에서 잠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친히 굳건하게 하시며 친히 강하게 하시며 친히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영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세세 무궁토록 권세와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 상호 간에 신실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이나 상황으로 만나게 되는 경계나 교훈도 은혜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마가처럼 신뢰를 잃었던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회복하고 서로 평안을 일깨우는 신령한 관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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