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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5:1~7 2026-04-12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이제까지 박해아래 신앙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영원에서의 소망을 제시하는 당부였다면 이 마지막 장에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의 질서와 섬김의 자세를 권면하고 뒤부분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넘어뜨리려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이 서신이 마무리된다. 특히 이 마무리 부분에서는 교회의 사역에 대한 부분을 장로를 비롯하여 젊은이들을 다루는 것으로 단순하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목회서신이라고 하는 바울의 서신 속에서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내용들을 보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바울과는 전혀 형편이나 성격이 달라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나 살아온 환경을 볼 때는 극과 극일 정도였지만[Pe-Pa]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내용에서는 다르지 않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일세기 초기의 교회 속에서도 서신들을 통해서 보는 이들의 공통점의 원인은 역시 한 주님의 일꾼들이었다는 것과 그 가르침의 원리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단체 와도 구별된 비록 이 지상에 있지만 지속적으로 하늘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기관이기 때문에 세상의 법이나 세상이 좋아하는 방법이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의향과 뜻을 따라 교제하고 섬기는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세월이 지나도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국가나 단체들은 대표를 뽑아 권력을 맡기고 그 권력아래 복종하지만 교회의 대표는 절대로 사람일 수 없고 그 교회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법이요 우두머리일 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내용이 장로들에게 주는 당부로 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교회에 장로가 없는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교회의 다른 직책이나 사역자들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봐서 대표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모형의 직책이 장로인 것은 바울이 기록한 장로의 자격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딤전3:1~7; 딛1:5~9).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세상에서도 흠 잡힘이 없는 신앙적 인격을 갖춘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복음 속에서의 장로들이다.

또 이 말씀이 장로들에게 주는 당부였을지라도 그것은 오늘 읽는 우리의 신앙이 장로의 수준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하는 데서 우리의 교훈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들의 영적 문제는 이런 신앙의 지도자들을 자격이 아니라 너무 정치적으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나 그리스도의 법이 아닌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교회의 머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나 말씀보다는 사람이 기뻐하고 바라는 것들을 행한다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교회의 순결성은 잃게 되고 세상의 다른 기관이나 종교단체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은 별도의 결론이 없다.



Ⅰ. 고난의 증인(1)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요 신앙의 연장자로서 교회를 사역하는 선택된 일꾼들에게 섬김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는데 자신 역시 같은 입장의 일꾼임을 고백하면서 교회를 위해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데 이 내용 역시 앞에서 지금까지 말세를 향한 성도들의 삶에 대해 권면해온 것과 다르지 않은 이 땅에서는 고난을 각오하고 헌신으로 섬길 때 거기에 대한 상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 땅에서 받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을 증거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1f) 마치 요한 사도처럼 베드로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요이1:1; 요삼1:1 장로인 나는). 바울 사도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신앙에 철저하고 성숙한 사람들인데;

베드로 사도는 비록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목숨을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음을 본다. 사실 1세기에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하늘에 맡겨둔 사람들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베드로 사도 역시 그랬음을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라 고백하는 것이다.

“장로[πρεσβύτερος, 원로, 연장자]”는 과거 광야에서부터 가문의 어른이나 지파의 우두머리로 나타난다. “회중의 장로들이 …”(레4:15ff)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민11:16f)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장로들이 있어 신앙의 전통을 가르치고 지켰던 것으로 나타난다(마15:2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나중 예수를 죽이는 일에도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마27:1, 20) 그럼에도 예루살렘 교회 속에도 장로들이 나타나는데 사도행전11:30이 처음이고 15:22에서는 사도들과 함께 신앙의 규범을 정하는 일에 함께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1b)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고백이면서 당시 신앙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1세기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름에 걸맞은 영광보다는 고난의 앞자리에 선 자들이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는 고백과 같이 바울 역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받은 고난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던 것 같다(고후11:23~27). 교회를 위한 섬김은 분명히 이 땅에서는 불이익이고 고난이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식하여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장로뿐만 아니라 누구나 각오해야 하는 삶이다. 스데반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섬기는 자들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라는 확신도 주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이 땅에서의 대가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미래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우편에 주님과 함께 앉아 주님의 영광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러한 약속이 없다면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Ⅱ. 섬김의 자세(2~4)

여기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대한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데 1세기 때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다면 당연히 이런 자세로 섬겨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가르치심 속에서 확인되는 사실들이다. 여기서도 부정적인 표현으로 억지로 하지 말고,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는 자원함으로 하며, 기꺼이 하며,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각각 3번씩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의 양들인 교회를 섬기고 돌본다면 반드시 이런 가르침에 합당한 자세로 섬겨야 나중 영광의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2f) 우리 주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f) 하셨던 것이나 부활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에 다시 돌아간 베드로 사도에게 직접 3번씩이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하셨던 것을 마음에 두고 하는 당부 같이 들린다.

비록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목자로 선택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양 무리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임을 먼저 아는 것 부터가 중요하다. 마치 자신의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할 자신의 양떼인 것처럼 생각하여 맡겨 주신 주님의 뜻을 생각지 못한다면 벌써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든 섬기든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섬기는 양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임을 마음에 두고 섬겨야 할 것이다.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2m)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맡겨져도 안되고 억지로 감당해서도 그것은 은혜와는 반대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을 사 주신 감격을 가지고 기꺼이 자원함으로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위해서 하는 것인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억지로 한다면 마치 쟁기를 처음 끌게 하는 소처럼 끌려는 가지만, 부드럽게 하지 못하고 옆걸음을 칠 수도 있고 뒷걸음을 칠 수도 있는 모양새와 같을 것이다. 또 다른 경계는 일의 목적에 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2b) 말 그대로 부끄러운 이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정당한 이득은 당연한 일한 대가가 되겠지만 영적인 일을 하면서 부끄러운 이득을 기대한다면 서로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3) 언제나 죄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권력이 맡겨졌을 때는 그것이 섬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주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를 경계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 “맡은 자[κλῆρος, 제비뽑기, 몫]”란 OT에서 제비 뽑아 받은 자신의 유업처럼 감당해야 할 몫을 의미함으로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의 기업이라 믿고 의무보다는 권리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다. “주장하는 자세[κατακυριεύω, 통치하다, 지배하다]”란 세상의 권력을 행사하듯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것은 일을 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모범으로 행하라는 당부이다. 이렇게 섬기기만 한다면 교회에 절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4) 이것은 앞에서 제시한 자세로 섬긴자들에 대한 약속이다. 아무리 훌륭한 목자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해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양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목자는 베드로도 요한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지라도 없을 것이고 이 역사가 닫힐 때까지도 없을 것이다.

영원한 목자장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떼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기꺼이, 양 무리의 본으로 최선을 다하여 섬긴 사역자들이나 일꾼들에게 이 땅에서 받아서 시들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떠나면 잃게 되는 시들고 쇠하는 면류관이 아니라 영원히 그 가치가 바뀌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리고 어떤 부끄러움도 없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 이 약속 역시 어떤 직책이 되었든지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긴 자들에게 차별 없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주실 것이라고 언약하고 계신다. 이왕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긴다면 모두가 다 받을 수 있기를 …



Ⅲ. 겸손 겸손(5~7)

앞에서 장로의 자격으로 섬기는 사람이건 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 섬김을 받거나 아직 초보적인 신앙 속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될 것을 당부하고 있는 말씀이다. 마치 바울이 믿음이 강한자와 그렇지 못한자들의 관계를 거론하는 로마서14~15장의 가르침과 공통점을 가지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중심은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겸손으로, 겸손한, 겸손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앞에서 거론한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기본이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f)고 모범을 주신 바 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5f) “젊은 자[νέος, 새로운, 어린]”는 굳이 연령의 젊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앞에서의 장로들이 연장자들을 의미한다면 거기에 상대되는 젊은 자란 오래지 않은 새로운 신자로도 이해가 가능한 명칭이다. 사실 신앙을 오래 했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고 모범적으로 오랜 신앙의 경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욱 존경할 만한 일이다. 신앙을 오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겸손한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께나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겸손하다고 함부로 대하는 것도 옳지 못한 자세가 될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는 것으로 봐서 신앙의 연장자가 이미 겸손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것처럼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또 다른 신앙의 덕목 중의 하나도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일방적인 겸손이 아니라 다 서로라고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즉, 교회 안에서의 서로 겸손을 당부한다. 그럼에도 이것 역시 억지 같이 느껴져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종들이 주인의 식탁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옷을 입고 걸리지 않도록 허리를 질끈 동여맨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그 허리를 동인 띠는 “겸손”인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5b) 최고의 영화와 존귀를 누린 솔로몬이 잠언서에서 강조하는 표현이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6:3, 11:2, 15:33, 18:12, 29:23)하였고 야고보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b)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신 바 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세상은 겸손한 자를 바보취급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아끼지 않으시고 더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여기는 독특하게도 아래와 높이를 대조하고 있다. 그 위치도 역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와 “때가 되면”으로 쉽지 않은 표현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권능의 손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세상의 강한 권력과 치리 아래서 이끌어 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OT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출6:1) 430년 동안을 권력으로 부리던 이집트의 압제 밑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안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교회 속에서 겸손하므로 능하신 손 아래에서 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고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약속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마음에 두고 주는 언약으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서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들은 역시 미래에는 이 약속의 반대현상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광의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심하게 낮춤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치도 짧은 세상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의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원 속에서 영광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면 역시 이 시간 속에서 겸손으로 섬기는 것이 그 비결임을 이해하게 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이 말씀은 시편55:22의 다윗의 시를 LXX으로 자유로이 인용하는 내용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신앙의 모범이었던 다윗도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역할과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앞절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하였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이치와는 반대되는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요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겸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비록 세상의 이치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나타날 반응이나 불이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보상받고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거듭났다면 우리의 염려는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 염려는 모두 우리 하나님께서 맡아서 이끄시고 관리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사람의 염려를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다(마6:27~3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7f) 마치 이 말씀의 짝과 같은 말씀을 바울 사도는 로마의 옥중에서 주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마치 본문(7)을 풀어 쓴 것 같은 형태로 어떻게 맡길 것인가까지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삶의 문제는 스스로 고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모든 염려를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그런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책임지시고 돌보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