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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4:12~19 2026-04-0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로 앞절에서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11b)이라고 찬양한 베드로 사도는 또 다시 긴요한 당부를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를 부르고 세상의 이치로는 어울리지 않는 권면을 주고 있다. 요지는 시험을 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격려하고 그럼에도 모든 고난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죄로 인한 고난은 결코 상급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로 인한 고난은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렇다면 불신자들의 심판은 얼마나 혹독하겠는가를 말하면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고 있다면 역시 그러한 고난을 믿음직한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할 것을 권하는 것으로 이 4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Ⅰ. 즐거워하고 기뻐하라(12~14)

이미 1:7에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라는 반복과 함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 첫번째이다. 사실 고난을 즐거워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용광로에 광물을 제련하듯이 힘겨운 시련을 당하는 가운데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승리를 위한 훈련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운동선수와 같이 영광과 맞바꿀 것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임을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12f)이라고 하는데 신앙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단은 여기 표현대로 “불 시험[πύρωσις, 불탐, 연소, 불태움]”으로 이 표현 자체가 ‘너희 가운데 타고 있는 불’이라는 표현과 같아서 ‘불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마치 다니엘의 3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불가운데 있었던 것 같은 표현이다. 이런 표현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 단련하시는 시련이 일반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될 수도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은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참된 성도라면 이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를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더욱 놀라게 하는데 그것이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12b)라는 표현인데 이상한 일이란 비정상적인 일을 의미하지만 여기에 다시 이상히 여기지 말고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여기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신앙의 사람들이 불 같은 시험을 당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적인 일로 여기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하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들어온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기 “당하는 것[συμβαίνω, 함께 걷다]”이란 첫째로는 다음 절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요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당하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13) 여기서는 시련을 당하는 것을 두고 두번씩이나 즐거워하라, 즐거워하고 라 말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격려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시련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다음 절에서는 다시 복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바울도 함께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가 믿는 것으로 인하여 불이익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적게 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현재의 자긍심과 미래에 나타날 영광을 기뻐할 수 있을 것인데 “기뻐하게[ἀγαλλιάω]”라는 표현이 그냥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정도에까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는 바울의 증거 와도 의미를 같이 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14f) 믿음의 사람들이 받는 시련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류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게 되는데 “치욕을 당하다[ὀνειδίζω, 꾸짖다, 비난하다, 욕하다, 맹비난하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모두가 애매하게 당하는 욕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한 것에 비교되지 않는 지나친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실은 이미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말씀하셨고 말세의 성도들에게 예언된 말씀은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당하도록 버려 두지 않음을 약속하고 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4b) 밖으로 부터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욕을 듣고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영광의 하나님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큰 격려를 주심으로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붙드시고 확신을 주시는 것이다. 마치 동족들에게 말씀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일어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과 같다. 여기 “계심이라[ἀναπαύεται, 쉬게 하다, 자리잡다]” 한 것은 한 순간도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성령을 확인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Ⅱ. 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지 말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15~16)

앞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眞僞 즉, 참과 거짓을 분리하기 위해 연단 하는 고난을 말해왔다면 여기서는 고난이면 무조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라고 ‘말라’는 부정이 두번이나 쓰이고 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을 인하여 고난 받지 말아야 할 4가지 항목을 제시한 다음에 그럼에도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복된 고난의 여부를 말씀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15f) 2:20f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하였고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적한바 있지만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f) 라고 죄의 대가는 당연히 형벌이 치러져야 함을 지적한 바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불특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것은 세상 중에서 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를 특정하는 것이다.

십계명 중에서 인간관계의 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 다음으로 경계되고 금지되고 있는 계명이 살인죄이고(출20:13) 간음죄를 가운데 두고 도둑질이 그 다음이다(출20:15). 악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난 모든 인간관계의 부덕한 소치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상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양쪽의 두 강도들을 이런 명칭으로 쓴 바 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23:33) 우리 말로는 행악자로 번역하기도 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b)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ἀλλοτριεπίσκοπος, ἀλλότριος,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넓은 의미에서) 이방인의, 친하지 않은, 적대적인 + ἐπίσκοπος]”

이 말이 남의 것을 탐내는 자로도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눅12:13~14) 우리 주님을 자신의 욕심에 이용하려 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하신 경우를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하게 겪는 일들 중에 장기나 바둑판에 훈수 두는 사람을 얘기하곤 하는데 어떤 일이건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지혜의 사람인 솔로몬도 여기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이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26:17)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욕을 듣거나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서는 안됨을 당부하는 경계들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16f)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 오늘 날로는 흔한 이름이지만 NT에 단 3번 나타나는 낱말이다(16; 행11:26, 26:28). 사전적인 의미들을 보면: ①(문자 그대로, 가족적인 의미) 작은 기름부음 받은 자, ②(본래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해당)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작은 친족, ③(히브리 예언에 따르면)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속받은 친족(사62:12f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④(비유적으로, 이방인들이 이해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 ⑤(비 정확하지만 매우 흔한 용법) 다른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

베드로가 이 이름을 사용할 때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명칭이기 보다는 로마의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이름으로 당시에도 어떤 가르침이나 이념을 추종하는 것은 그 우두머리에 의해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나사렛사람’이라 하였지만 역시 비아냥거리는 명칭이었고 행26:28에 나타나는 대로는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는 말 속에서도 비웃는 투의 명칭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비웃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지는 이름일지라도 결코 부끄러워해야 할 이름이 아니며 그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지라도 부끄러워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미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눅9:26)는 당부를 주신 바 있다.

오늘날도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손해를 당하면’이라는 경우들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기쁘게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수치와 고난을 당해주신 주님께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기쁘게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b) 우리는 앞에서 이미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11m)이라 했지만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Ⅲ. 영혼을 창조주께 맡기라(17~19)

성도들의 고난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 강도가 더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현실에서 고난을 다 소화해버리는 성도들과는 다르게 미래에 심판이 작정되어 있는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들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를 우려하고 있다. v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하였다면 여기에서는 이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라는 종말의 때를 증거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늘의 귀한 가치로 단련되기 위한 고난이 있었다면 불신자들에게는 멸망을 위한 고난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의 v14에서의 고난이 현재적인 것이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들의 최후는 미래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17f) 하나님의 집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는 것은 오히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믿음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고 연단하는 형태이지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심판의 시작이 하나님의 집에서라는 것은 이미 OT의 선지서에서부터 선포되어진 내용이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5:29)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들은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1세기 당시에는 많은 핍박하고 조롱하던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면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장래에 자신들이 당할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그랬지만 마지막 때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심판을 당하면서 슬퍼하며 이를 갈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마22:13; 눅13:28).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17b)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여기에 연결되어지는 내용이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18)라는 탄식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이시지만 이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이 훤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고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구원받을 온전한 공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시고 열어 놓으셨지만 그럼에도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귀한 약속안에 거하는 자들은 비록 이 땅위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스스로 홀로 감당하도록 버려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주님을 의지할 것을 당부하는 말씀이 오늘 마지막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이 말씀 속에도 사람의 욕구나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을 행하면서 영혼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즉,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난이든 영광이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떤 것이든이라도 육신에 계실 때 항상 순종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f)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백성이요 신부요 교회라면 여전히 “하나님의 뜻대로”가 언제나 먼저여야만 한다.

좀더 “하나님의 뜻대로”의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여기에 선은 세상의 상대적인 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올곧은 절대적인 선을 당부하는 것이고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의 마지막이 될 때까지도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경건의 삶이 될 때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자신의 할 구속의 역사를 완전히 성취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외침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m)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라고 기록되고 있다.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재산도 건강도 형편도 웃음도 눈물도 모든 인생을 절대로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긴다면 그분은 절대로 자신에게 의탁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너무 힘겨운 시험을 당하면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 라고 의아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불 시험당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앞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한다면 자신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임을 인식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적게나마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유익보다 오히려 손해가 되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인한 고난을 받는다면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고난을 통한 성도의 연단이 있다면 복음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이 심판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감당하고 항상 우리의 모든 것을 믿음직한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끝까지 승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