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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4:7~11 2026-03-29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이제껏 박해받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형편에 관계없이 하늘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가르치고 선한 의지로 사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불신자들과 핍박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왔다. 베드로 사도는 이 부분에 와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주님의 백성들 상호간에 어떤 자세로 서로를 대해야 하는 가를 지도하고 있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와 경건을 당부하고 천국백성들 간에는 서로 아낌없이 사랑할 것과 함께 받은 은사대로 잘 섬기되 감당하는 모든 일을 인하여서도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감당함을 인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의 절정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에 다시 오심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재림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경건한 삶을 산답시고 세상일에 등한시하거나 불신자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여 탈 세상적인 삶을 삶으로 그들에게 오히려 복음을 들을 기회를 잃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도 이미 봐왔던 일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에 무관심하여 경건의 삶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일에만 치중하여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뜨뜻미지근한 상태로 세상의 영화를 좇는 상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늦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늦은 것이 아니며 재림을 마음에 둘 때 믿음생활을 단속하고 경성하게 하기 때문에 역시 중요한 신앙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재림에 무관심한 것도 옳지 못하고 또 너무 재림에만 삶을 집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역사위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세상 속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삶으로 불신자들에게는 마지막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Ⅰ.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7~8)

마지막을 앞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자세와 함께 성도 상호간의 자세를 먼저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일 오신다고 할 때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준비된 자세로 맞을 것을 성경은 여러가지 형태로 당부하고 있는 것을 본다(마25장). 이 말씀을 주고 있는 당시로서는 로마의 권력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끊임없이 지속될 것 같은 절망감마저 들게 할 정도였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성도들의 죽음과 고난도 끝날 것 같지 않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은 이러한 두 극단이 모두 마무리를 짓는 역사의 전화점이 될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 인간이성으로 볼 때는 이 역사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고 끝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될 지 판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만이 森羅萬象 만물의 원인과 시작을 명확히 보여주고 그 끝을 역시 분명히 예언하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7f) 어쩌면 이 주제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세우는 귀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1세기에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겪으면서도 ‘주님이 오시면 이 지긋지긋한 고난도 끝날 거야’ 라는 위로의 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서를 보면 1세기 당시 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반응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들도 없지 않았고, 지난 20세기를 끝내면서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도 극단적인 종말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병패를 보기도 하였다(다미선교회). 그럼에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7f) 라는 경계는 여전히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신앙적 경계이다. 분명히 우리의 삶을 끝낼 때가 있을 것인데 물론 이것이 개인의 삶의 마무리에서도 그렇지만 이 역사의 마지막이 될 때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이 종지부를 찍는다면 과연 나에게는 어떨까?’ 라고 자문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b) 마지막을 앞 둔 시점에서 사실 우리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각자의 준비이다. 내일 예수님께서 이 삶의 현장속에 역사의 정리를 위하여 오신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놔 두고 과연 나는 어떻게 맞을 수 있을까 염려해볼 수 있겠지만 성경이 주는 당부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우리 교회의 올해 푯대세움 말씀이 여기도 같이 나타나고 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사실 기도 자체가 영적으로 호흡을 하는 살아 있는 모습이고 그 살아 있음과 함께 깨어 있는 경성함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당연히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라는 경계이고 “정신을 차리고[σωφρονέω, 건전한 마음의, 절제하는 = σῶς, 안전한, 좋은, + φρὴν, 횡경막, 마음, 정신, 생각]”는 반대로 이해하면 ‘정신없는, 미친’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주님께서 가까움을 볼수록 정신을 차려 횡설수설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근신하여[νήφω, 술취하지 않다, 정신차리고 있다]”라는 의미로 앞의 “정신을 차리고”와 다르지 않은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반복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상태에서 이 역사는 마무리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끝난다면 만족할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대로는 안되!’ 라고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을까 가 지금 나의 가장 진실된 상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다시 이 역사에 오시는 주님께 대한 자세를 앞에서 한마디로 “정신차리고 기도하라!”였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함께 기다리는 성도 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둔 입장에서 어떤 것보다도 힘써야 될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역시 이 역사의 마지막을 예언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는 경계를 주신 바 있다. 이런 사실을 함께 들은 바 있는 베드로 사도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기 때문에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b)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다른 지체를 사랑함으로 죄가 가려진다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죄의 해결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밖에는 없다. 비록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지라도 이 말씀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10:12)는 솔로몬의 가르침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가 덮인다는 이론이기 보다는 사람 관계속에 허물을 가릴 수 있고 그러므로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더불어 기대하고 사모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절정(peak, climax)은 이 예배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는 오히려 때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힘겹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 이 모든 것은 갚아지고 채워지는 완전한 은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바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된다. 사실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세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이미 신앙은 어느정도 인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Ⅱ. 마지막을 앞둔 성도의 섬김(9~10)

두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섬기게 되는데 어떤 자세로 섬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교회의 섬김을 말하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하였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모든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섬김에 말세 적인 때만이 아니라 항상 그래야 하겠지만 왜, 말세를 마음에 둔 섬김을 당부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모든 것의 ‘시작처럼’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섬긴다면 대충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지막 제목에서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9) 1세기에는 교회당이나 모임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던 것은 박해가 심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쫓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접대하여 섬기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의무였고 우리 주님께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이라고까지 가르치셨다. 마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4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런 입장에서 누구를 대접하든지 그것은 사람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 믿고 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더 가까이 이 의미를 가져온다면 우리 자매들이 매주님의 날 음식을 만들어 점심을 준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을 대접하여 듣는 답변이 (물론 받는 사람들도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오늘 반찬이 좀 짰다.’는 말을 어떤 사람이 했다고 해도 그걸 사람의 투정으로 듣지 않을 것이다. 여기 “원망[γογγυσμός, 불평, 불만, 속삭임]”은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이런 당부를 주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이 두 곳의 말씀에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당부이다. 신앙안에서의 섬김은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다세로 나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 주신 그분을 섬긴다는 자세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섬기는 것이다. 신앙안에서 섬김에 원망이 함께 한다면 그것은 하지 않음만 못한 것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10) 이 말씀은 앞의 원망 없이 섬길 수 있는 근거를 지적하고 있다. 여기의 중심이 되는 두 표현은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다만 받은 선물의 관리자일 뿐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12:6f)라고 증거하고 다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말하는데 이 v10의 이치를 함께 이해하게 한다.

그러므로 섬김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즉, 선물을 받은 분량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받은 선물을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섬기고 나누면서 자신이 생색을 내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런 자세에서 섬기게 될 때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 원망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마지막을 앞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무엇을 되받을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소망을 갖게 하는 섬김이 되게 할 것이다.



Ⅲ.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1)

이 말씀은 바울의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좀 더 자세히 풀어 쓴 느낌을 갖는 말씀이다. 앞에서 섬김을 이야기했지만 모든 섬김은 개인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보다는 우리를 죄인이었던 자리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이것을 가능하도록 계획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으로 결과해야 할 것이다. 또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맡기신 무슨 일이든지 원망과 시비 없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말과 섬김 2가지를 지적하지만 대략 4가지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각 제목 속에서 나누도록 하겠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가장 흔한 언어의 사용에서 믿음의 자세로 이런 자세가 된다면 적어도 허튼소리나 덕스럽지 못한 언어생활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 “말하려면”이라는 말은 우리 사람들의 일상의 언어생활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럼에도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의미하는 신령한 표현이다. 마치 바울이 당부하는 표현과도 다르지 않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우리도 꼭 같은 세상말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식한다면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한 것처럼 우리가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가 바로 말에 있는 것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번 입에서 나간 말은 다시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는 자세로 말한다면 그런 실수는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의 사용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세를 다루고 있는 데서 더욱 무게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데는 더 경건한 자세가 요구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자세를 당부하고 있어서 경외감마저 갖게 한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부터 더욱이 공중 앞에 서서 믿음의 논리를 전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는 증거는 듣는 사람들에게 더욱 귀 기울이게 될 것은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앞에서도 이미 섬김의 자세를 논한 바 있지만 여기까지 공통적인 표현은 “만일 누가, 만일 누가”이다. 이것은 특정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행위자가 되었든 지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위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특히 말이나 섬기는 지체들을 의미하는 것로도 이해할 수 있다.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으로 또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명령하셔서 섬기는 것같이 하라는 당부이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또 주목할 것은 이런 모든 일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는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구별될 수 없는 이유는 “범사에” 모든 일과 과제에 있어서임을 증거하여 그 한계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인용했든 대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한 것처럼 첫째는 “무엇을 하든지” 라고 했다면 마치 본구절의 순서처럼 “말에나 일에나” 한 것인데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라는 말씀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과 꼭 같고 나머지 역시 이어지는 내용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이라는 결과를 함께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역시 바울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감격하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이 말씀은 물론 아브라함으로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거기서 메시야가 나게 하시고 그 보내신 메시야에 불신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구원에 접붙이시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이러한 바울의 표현 속에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서 찬양하게 된다.

먼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과 함께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현재도 유지되는 것과 최종적으로 그분께 돌아가게 될 것을 고백하면서 그런 이유에서 모든 것의 출처와 유지하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마지막으로도 그분께 돌아가야 한다는 귀중한 삶의 이치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영광을 돌려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구원과 사랑의 역사에 비교하면 모자랄 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입장이나 형편에서 든지 특히 고난 속에 있을 때 더욱 주님의 재림을 마음에 두고 깨어 기도하며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마지막일수록 이기주의가 판을 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서로 뜨겁게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섬김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기대하며 원망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혜로 맡겨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선한 청지기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언어생활이나 봉사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봉사하는 자세로 섬김으로 모든 일에서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세를 가능케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희생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토록 그리고 이 역사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오늘도 우리가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