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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4:1~6 2026-03-22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주님의 희생과 고난을 상고한 바 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이제는 그를 따르는 제자라면 같은 고난을 본받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영광과 낭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의의나라로 옮겨 주신 그 주님을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증거하신다. 물론 미래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영광이 약속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미래적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고 하는 실제적인 모습은 구원받기 전의 과거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살던 죄악된 음란과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다. 특히 이러한 권면이 주어지고 있는 당시에는 핍박과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시기에 이런 당부를 주고 있었다면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어떤 핍박이나 고난도 없는 우리의 시대에는 더욱 구별된 경건의 삶을 살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삶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웠음을 되돌아볼 수 있고 ‘내가 좀 더 일찍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라고 회상해 보기도 할 것이다.

과거에 함께 세상을 즐기던 동료였던 사람들이 오히려 오늘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히 여기고 ‘제가 전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백성으로 위로부터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스스로는 과거의 죄에 살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더욱 경성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런 산 소망을 가진 천국백성이라면 미래에 받을 상급을 바라면서 아직도 생명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 있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고자 전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Ⅰ. 죄에 대하여 죽은 삶(1~2)

바로 앞의 내용과 연결되어 특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3:18f)라는 사실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보호를 입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제 남은 거듭난 삶의 마지막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육체를 복종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권고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1f) 죄에 대한 싸움은 나(우리)를 위하여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다. 세례로 그 희생에 하나가 되고 거듭났다면 이제부터는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 끔찍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의 싸움을 끝내셨다면 그의 희생을 힘입는 우리는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죄의 대가를 치뤄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뒤에 숨을 수 있다는 보호의 확신을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1m) 당부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갑옷이라는 표현을 여기에 단 한번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진리를 가진 바울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라고 가끔 쓰고 있는 표현이다. “갑옷[ὅπλον, 무기, 기구, 도구]”은 단순히 방어용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리적이고 살상하는 육신의 무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영적인 무기로 선한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당하신 대속의 희생인 것이다.

갑옷을 삼되 같은 마음[ἔννοια]으로 한 것은 일반적인 마음이라기 보다는 ‘생각’이나 ‘사고방식’ 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기 때문에 같은 낱말을 히4: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쓰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사고에서 모든 것과 모든 일상을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당부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1b) 이미 세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육신의 죄의 도구가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체가 되는 세례를 거론하기 위하여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한 다음에 v8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고백하고 다시 v11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흐름의 내용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심이 우리의 죄를 짓는 도구인 육체로 행함을 그치게 하셨다는 고백이다. 사실 죄의 자리는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무사 안일하면 죄를 짓기 쉽지만 반대로 육체가 고난을 당할 때는 죄를 짓는 것이 오히려 어렵게 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가 범죄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때 생각함으로 죄를 이기게 하고 오늘 믿음 때문에 내가 당하는 고난이 범죄의 가능성을 없애 주는 영적인 유익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2) 바로 앞의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1b)에 이어지는 삶의 변화를 논하면서 구원받기 전과 현재 구원받은 후 그리고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 뜻이 대조되면서 과거의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남은 생애를 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고 그 희생에 일체가 된 우리의 삶을 주셨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2f) 그 후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에 하나가 된 새로운 삶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부정의 의미인 “다시[μηκέτι, 이미 ~아니다, 그 이상 ~아니다, 이제 후로는 ~아니다, μή + ἔτι, 아직, 여전히]”가 쓰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구원받았다는 후에도 과거의 삶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 보다는 육신의 원하는 것들을 행하며 사는 것을 보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치 못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2) 앞의 “사람의 정욕”이 복수로 쓰여 있는 반면에 여기 하나님의 뜻은 단수로 기록된 것도 특징이다. 우리 사람의 정욕은 여러 방향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임을 볼 때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거듭난 주님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행히도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다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면 하나님의 주신 구원을 잃지 않고 누리며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Ⅱ. 과거로 족한 삶(3)

바로 앞에서 말한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라는 것들의 구체적인 항목들을 거론하는 것으로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과거 어둠 속에서 행한 것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그러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하는 의미이다. 거론되고 있는 사람의 정욕들은 거론하는 것이 사실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 다만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은 모두 그 근원이 뒤에 따르는 우상숭배를 하는 즉, 어두움의 영의 영향력아래서 행해지는 것들이다. 앞의 3가지는 개인적인 죄악들이라면 뒤의 3가지는 사회 공동체 속에서 행해질 수 있는 죄악들이지만 그런 삶을 가져온 무법한 우상 숭배가 그 원인이다. 여기서 한 단어만 뜻을 살피면 “술취함[οἰνοφλυγία, οἶνος, + φλύαρος, 쓸데없는 말을 하는, 헛된 말을 하는]” 이란 의미이다. 앞의 두가지 ‘음란, 정욕’이란 행동도 이렇게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우상숭배는 사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내리는 것으로도 우리가 피해야 할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항목들은 바울의 표현대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우상숭배 속에서 행해지는 죄악의 항목들임을 로마서1:23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것들임을 v28f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데서 나타나는 삶의 형태들이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3b)하였지만 여기의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우상숭배자 하는 사람들을 이름이고 그것은 이제 그만 둬도 모자라지 않다는 죄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삶을 표현하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 말하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어두움 속에서 얻은 열매들이 과연 자랑할만한 떳떳한 것이었는가 와 지금도 그러한 과거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며 미래의 영원 속에서도 죽음이 열매일 뿐임을 증거하고 있다. 한가지만 더 살필 것은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한 것으로 그냥 우상 숭배를 한다고 하지 않고 ‘무법한 우상 숭배’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속에서 율법이나 법률을 지칭하는 “법없는[ἄνομος, α, + νόμος, 율법, 법, 규범(행2:23 법 없는 자)]”과는 완전히 다른 “무법한[ἀθέμιτος, α, + τίθημι, 놓다, 두다, 지정하다]” 연결된 의미에서 섬겨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뒀다는 이유에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은 사회 전체 속에서 요구하지 않아도 확산되는 죄악 된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다.

세상에 만족할 만한 것은 없음을 권력이나 부나 영화로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솔로몬이 증거하고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 하나니 이것도 헛되 도다”(전5:10) 그럼에도 세상에서 죄악 속에 사는 것은 지나간 때로도 만족하다고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어둠 속에서의 삶은 과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라고 지나간 때 행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기 전에 행한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하고 지옥에 가기에 충분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 안타까운 것은 이제 빛아래로 옮겨 놓았는데도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삶을 살겠는가 하는 경계의 교훈이다.

그럼으로 되돌아보아도 충분히 부끄럽고 죄스러운 과거의 삶을 다시 뒤돌아보거나 연연하지 말고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는 자세와 고백을 가지고 신앙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Ⅲ.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4~6)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할 때 과거의 옛 동료들에게서 오는 박해를 각오해야만 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과거 그들과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과거 어둠의 동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비방하기까지 한다. ‘너가 어떤 사람인가는 내가 더 잘 안다. 뭐 달라 질게 있겠느냐?’ 죄인들은 언제나 자신과 같은 공범을 찾으려 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회개한 삶을 살려고만 하면 사랑이나 은혜를 결코 끊지 않으신다. 우리의 지금의 삶을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의 영광까지도 언약하신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4) 이것은 지난 주님 없는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육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했던 과거의 극단적인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또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과거 동료들의 참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과 함께”는 당연히 과거 우리가 어두움에 살 때 함께 하였던 동료들을 의미하고 눈 여겨 봐야 하는 표현은 “극한 방탕”이라는 두 낱말이다.

“극한[ἀνάχυσις, 넘쳐 흐름, 범람, 홍수]” “방탕[ἀσωτία, 구원할 수 없는 α, + σώζω, 구원하다]” 과거 그리스도 없는 삶은 홍수에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묘사하면서 오히려 멸망할 홍수속으로 달려 들어가지 않는 것을 멸망의 홍수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자들이 이상히 여겼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리스도 없는 세계를 과거 노아의 홍수로 물속에 남은 자들과 같이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음을 우회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이상히 여겨[ξένος] 비방하나” 낯선 사람이나 이방인 취급을 한다는 의미와 마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모독한다고 하는 것이 비방하나[βλασφημία]이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5) 범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고 그 죄의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당사자들이 스스로 고백하게 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바울의 증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이에 대한 증거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와 계실 때도 증거하신 바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이제 오늘의 마지막 말씀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지속적으로 증거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6) 이 말씀 역시 앞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3:18b~19)는 말씀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6f) 이 말씀은 “왜냐하면[γὰρ]”이라는 말씀과 함께 앞에서도 경계한 바 있지만 죽어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한 것이 과거 시제로 쓰여 있어서 복음을 이미 들었으나 육체로는 죽어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6b)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죽어 있는 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말씀하신 언약처럼 그들은 이미 육체로는 한 번 죽어 있으나 복음을 믿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의 사죄의 효력이 미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 영광스러운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는 말씀의 확인이기도 하고 또 이 약속은 우리 주님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선언의 확인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희생되신 주님의 복음은 과거에서부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역사속에 오는 사람들의 멸망과 영원을 가름하는 운명의 경계선이 될 것이다.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6b) 비록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죽지만 그것은 영원을 결정하는 비극의 죽음이 아니라 복음속에 머무르는 누구든지 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주님의 복음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닫히지 않고 계속 증거될 것을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이것이야 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는 과거에 친구였지만 함께 믿지 못하여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세상 속에서 나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끼치고 핍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나의 방패와 영적인 자랑이 된다.

나의 육체적인 쾌락의 추구는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할 때 행했던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는 주님을 순종하는 경건으로 우리의 나머지 주어진 인생이 얼마가 되든지 살아야 할 것이다.

과거 함께 멸망을 향해 달음질하던 친구들이 이상히 여겨 이해를 못해줘도 과거 자기들과 같이 행동해 주지 않는다고 비방할 지라도 미래에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증거하여 과거 함께 멸망을 향해 달음질하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함께 생명을 향해 달음질하도록 권면하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삶을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