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벧전3:18~22 |
 |
2026-03-15 |
|
 |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
|
|
3장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은 NT에서도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으로 우리 주님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라든가 ‘연옥’이라는 교리를 만들게 된 배경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의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부분을 그 부분만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성경의 전제적인 구원사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그 흐름에 문제가 되지 않아야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 부분의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물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들처럼 물속에 잠김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례에 하나가 되고 그 물에서 올라옴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체가 되는 침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오늘 제목으로 잡은 말씀과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의인으로써 죄인 된 우리가 죽을 자리에 대신 죽으신 귀중한 희생의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을 본받을 것을 다음 장에서 당부하기 위한 모범으로 다시 한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Ⅰ. 영원하신 우리의 모범(18)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구속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한 대속을 가장 자주 인용하게 되는 부분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구속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감격할 수 있는 신앙의 중심이다. 만약에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셨다면 오늘 우리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그 감격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 구절이지만 이 내용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하지 않다.
①“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히9:27)이라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것은 당연히 죄의 대가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는 영원의 존재이시면서 절대적인 위엄과 존귀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의인으로서”와 ‘죽는다’는 말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죽음을 맛 보셔야 만했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유가 “죄를 위하여” 즉, 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의 OT에서 죄의 해결을 위해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고 먼저는 그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허물을 가진 자신을 위하여였다. 그럼에도 “죽으사[ἀποθνήσκω, ἀπο, 떨어져, ~로부터, 떠나, + θνήσκω 죽다]”라는 낱말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죽는 사람들과는 좀더 다른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7) 같은 허물을 가진 제사장 된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신 우리 주님의 단번에 자기를 드리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다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9:28f) 라고 베드로 사도의 “죄를 위하여”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게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②“…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OT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의 죽음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도 의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 보다는 국가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상대적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앞에서 말했던 대로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으신 것이 핵심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하였는데 이 표현은 그만큼 죄와는 관련이 없으신 분이라는 표현이다.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를 대신하”실 수 있는 것이다.
③“…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왜, 거룩하고 신령하신 죄와 상관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 이유 자체가 역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죄인들을 위한 희생이다. 죄인 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당연히 죽음과 저주와 영원한 형벌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시려는 한가지 목적이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이후로 하나님을 바로 뵐 수 없는 것은 죄인 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온유했다는 모세에게도 다만 등을 보이시면서도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하셨다. 그러신 우리를 자신의 피로 씻어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시려고 피를 흘리셨다는 이유이다.
④“…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육체[σαρκὶ]와 영[πνεύματι]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도구로서의 내용이 아니라 영역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여기서 육체라고 할 때는 사람의 생명의 부분에서, 영은 부활하신 생명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죽으심과 부활이 대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육신으로만 이거나 영으로 만이라는 이해는 옳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다음 구절에 연결되는 의미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다름이 없는 한정된 육체에서 죽으셨으나 영원한 영성으로는 죽지 않으시고 마침내 육체까지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의 피로 거듭난 그의 백성들 또한 그렇게 될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Ⅱ. 영육의 생명 사역(19~20)
앞의 v18b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 부분도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마지막 역사 속에 오셔서 죄를 위한 십자가의 구속만이 아니라, 이 인류 전체가 멸망의 위기에 있었던 물로 멸망하기 전에도 회개를 선포하셨음을 증거하는 이 내용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예수님은 이 역사에 마지막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이미 창세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시는 때에도 함께 하셨다[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17:5f)]. 물론 이 부분도 여러가지 다른 이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연결되는 내용들과 더불어 성경의 구속사의 맥락안에서 바르게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많은 잘못된 이해들은 거론의 가치가 없다. 그런 것들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또 말씀을 오해하게 할 수도 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19) 여기에서 “영으로”라는 번역은 앞의 v18b의 “영으로는” 한 것의 관계대명사로 쓰여 졌다. 그러므로 앞에 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옥에 있는” 할 때 여기에 “옥”이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옥[φυλακή, 감시, 경계, 감옥 φυλάσσω, 지켜보다, 파수하다, 주의하여 지키다]”이란 의미는 감시를 받는 장소라는 데 이의가 없다. “영들에게”도 “영[πνεῦμα, 호흡, 바람, 생명, 영, 성령]”의 복수로 쓰였지만 앞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대단히 넓다. 그럼에도 이 부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20)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의 “선포하시니라[κηρύσσω, 고지하다, 알리다, κήρυξ, 전령, 사자]”의미로 반드시 될 일을 알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성경에서 육체를 떠나 죽어 있는 사람(영)에게 다시 복음을 순종할 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복음 속에서 이해하는 대로는 있을 수 없는 신앙적 이론이다. 주님께서 예를 드셨던 눅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본다. 생명의 하나님을 순종하는 기회는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생의 삶에서 가능하고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단적인 예를 든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메시지이다. 여기서 다음구절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6:3f)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19)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훨씬 이전에 즉, 노아의 때에 아담에게 새롭게 주신 셋의 후예들까지 가인의 후예들과 함께 혼인하고 같이 놀아난 이미 형벌이 정해져 있는 인류를 향해서 노아를 통하여 의의 도를 선포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이렇게 볼 때 옥은 바로 죄에 갇혀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세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노아를 통하여 물로 멸망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의의 도를 선포하셨다는 말씀이다. 연이어 이러한 선포에 대한 반응을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20f) 노아는 방주를 짓는 동안에도 의의 도를 전파했다고 베드로 사도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간이 멸망당할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한 기간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 기간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날 수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노아의 자녀를 낳은 연령[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이나 홍수가 일어난 시기[창7: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등을 계산해서 최소한 50~75년 정도를 추산해 내는 이해들이 있다. 자녀들이 방주를 짓는데 함께할 나이대가 되는 기간을 감안한 것이다. 당시에는 지구의 환경이 지금과 달라서 홍수 전 대부분 사람들이 900세를 넘겨 살았고 노아 자신만 해도 950세를 살았다(창9:29).
또 다른 견해에서는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기 전에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b)하신 것을 근거로 120년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은 이 말씀을 홍수 후 사람들의 연령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 말씀을 하신 후로 120년 후에 당시 사람들의 운명이 끝날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다. 이렇게 긴 기간을 하나님의 공의를 전파했음에도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의 가족 외에는 한 사람도 이 선포에 응답한 사람이 없다는 안타까움을 결과에서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대한 반응은 죄가 관영 하는 시대일수록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었음을 역사 속에서 보는 바이다. 선박건조의 전문가가 아닌 노아였지만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두가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럼에도 노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다음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20b) 이 말씀의 중심은 구원받음 사람이 그만큼 적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당시에 파란 하늘 아래 자신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배를 지으면서 그 배에 타야만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외침은 우리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 들어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보다도 더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런 반응은 당시의 안락한 지구의 환경도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이해와 함께 이 시대에는 과학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큰 것과 도 같은 함수관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훈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들도 역시 가볍지 않다. 지금의 시대는 대형교회들이 몇 십만의 교인들로 모이지만 다시 오실 주님 앞에 구원을 누릴 사람은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경계와 함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다시 오심을 예언하시면서 이 노아의 사건을 통해서 경계하셨음을 본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Ⅲ. 오늘 나를 위한 구원(21~22)
앞에서 노아의 가족들 만이 물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복음 속에서의 세례를 통한 거듭남에 적용한다. 물속에 침수되고 올라오는 것이 육신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함으로 보이지 않는 양심이 회복되는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언약의 성취로 이제부터는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기도가 가능함을 증거하고 이 일을 가능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영적인 세계와 모든 권세들을 복종시키시는 창조주요 구세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회복하셨음을 증거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f) 인용된 창세기 본문에서는 물이 구원의 도구이기 보다는 형벌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죽은 모든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을 입은 것이다. 같은 물은 순종치 않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도구로 역할 하였지만 방주를 지어 거기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순종한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방주를 떠오르게 하여 구원의 도구가 되었다. 이것이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의 모형이 된 것이다.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씀이 로마서6:3~5의 말씀이다. “아니면,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게 된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그 죽음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 받아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분의 부활하심에도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새한글)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f) 사실 자연 상태의 물은 신비하거나 거룩한 것은 아니며 생명의 능력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인 말씀의 도구가 될 때 우리의 이해에나 감정에 상관없이 생명의 도구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마3:16~17)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표현을 요일5:1~12에서 본다. 이렇게 구속을 완성하신 주님은 아직도 불신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명하신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적어도 생명과 영원에 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믿음이 십자가에 인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되고 부활에 하나가 되는 방법(롬6:3~5)으로 제시하신 것이 오순절날 베드로를 통한 증거의 결론이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세례를 받는 데까지의 순종이다. 사도행전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서 이 말씀의 예외는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에 하나가 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인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베드로는 오순절에 증언한 것이다.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21b)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받은 사람의 변화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육신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 마귀 사탄으로부터 화인 맞았던 양심이 회복되어 바른 기능을 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던 교제가 회복되어 교통이 가능해진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22) 마치 빌립보서2장에서 인류구속을 위해 육신이 되어 낮아지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의 영광과 다르지 않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이것은 또한 장래에 복음을 순종하여 거듭난 자들이 누리게 될 영광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은 우리가 완벽하게 낱낱이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한계가 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대신 흠 없고 점 없는 자신을 나를 위한 제물로 드리시므로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주셨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이 일을 하셨다면 오늘 나의 삶이 또한 그러한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이렇게 구속의 피를 흘리시므로 구원을 완성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물로 멸망하려는 과거의 안타까운 시대에도 멸망 받을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심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이 땅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우리 역시 은혜입은 사람으로써 이러한 주님의 의지를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아의 때나 지금이나 이해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세례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만 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심으로 영광에 들어 가신 것처럼 오는 내가 같은 순종을 본받는다면 주님과 같은 하나님의 우편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