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벧전3:13~17 2026-03-08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의 선한 삶은 상황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는다. 에덴 같은 좋은 환경에서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은 그래도 쉬울 것 같지만 옥죄어 오는 박해 속에서는 자신의 잘 못도 아닌데 핍박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혹독한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런 가운데서 선을 따라 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여전히 스스로의 머리 굴림으로 그러한 위기에서 빠져나오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라면 여전히 선을 행하라는 당부를 주고 계시다.

이부분이 이 서신을 기록하게 한 가장 사실적인 이유요 핵심이다. 아무리 미래가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핍박에서도 꾸준한 믿음의 자세를 지키며 선을 행할 때 박해하던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며 오히려 변화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당했던 상황 속에 간수의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실을 사도행전 16장에서 보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냐 하면 에덴과 같은 희락의 동산에서도 범죄하고 쫓겨난 역사를 보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인생임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삶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미 우리의 모범이 되심을 이 말씀의 바로 뒷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것을 당부하는 말씀이 4:1~6 첫 분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에서 신앙을 하고 있음을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OT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이런 모범을 가지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는 피나는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최고의 모범이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 데서 절대로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범죄치 않으시고 주어진 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핑계하거나 변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이 삼라만상의 자연이 이러한 계시를 사람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변명하지 못할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당연히 믿음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면 불신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고난이 오히려 저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므로 대할 때 그것은 고난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불신의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귀중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성경에 복음의 확산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Ⅰ. 두려워하거나 근심대신 선을 행하라(13~14)

저는 첫번째 제목은 v14~13절로 순서를 뒤집어 잡은 감이 있다. 기록의 순서대로는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을 해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형식으로 묻고 의를 위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산상보훈의 절정인 말씀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런 믿음의 자세가 된다면 일반적으로 불신의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들과 같이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격려한다. 특히 이 두 구절에는 ‘선을 행함과 의를 위하여’를 교차적으로 거론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됨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 타락한 인류의 대부분은 어둠의 속성을 따라 남을 해하는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데 더 열심인 것이 안타까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선을 행하는데 온 마음을 쓰고 열심을 다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죄를 범할 기회가 적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정죄하지 못하는 것은 욥을 보는 데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만나셨을 때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조차도 요압을 비롯한 자신의 군인들이나 부하들은 전쟁에 내보내 놓고 낮잠을 즐기는 한가한 상황에서 죄를 짖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욥도 마귀 사탄이 아무리 참소했어도 나중에는 오히려 칭찬 듣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을 의식하며 선을 행하는 데 열심이면 범죄의 기회를 줄일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거듭나지 못한 자연의 사람으로서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말씀을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하며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대적 마귀 사탄도 해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14)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도 우리 주님의 산상보훈에서 증거하셨던 교훈을 생각하면서 주는 당부일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어떤 세력도 침범할 수 없는 천국을 가진 자만이 의를 위한 고난이나 핍박을 감당할 수 있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됨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14f)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는 하나님께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런 대상은 마귀 사탄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종교의 대부분도 이 고난을 만나지 않는 것이 목적이 되기도 한다. 베드로 사도도 조금 뒤에 가서는 좀더 구체적인 경계를 주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4:14~15)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14f) 이것은 또한 소망적이다. 미래에 눈물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영광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위한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어진 확실한 약속으로 인하여 오히려 현재의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게 되고 그것이 믿음을 갖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 확실한 구별이 될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14b) 이사야8:12b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처럼 어려움을 당하면 두려워하는 것 같은 공포도 있을 수 없고 또 어려움과 고난을 주고 있는 당시의 핍박자들 조차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장래는 이미 미쁘신 하나님께 맡긴 바 되었기 때문에 근심할 것은 더더욱 없다.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홀로 한 분 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의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Ⅱ. 구별된 자세로 구원을 나타내라(15)

열심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권면이다. 죄인 된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열심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없다. 바울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죄인을 위한 희생을 증거하면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5:7) 세상에도 의인을 위하여 죽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며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기는 있다. 하지만 두가지 다 ‘쉽지 않고’나 ‘혹 있을 수는 있다’고 해도 흔한 일은 아니라고 비교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고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셨음을 증거한다. 죄인 된 사람을 위해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셨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표현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15f) 바로 앞 절의 뒷부분에 연이어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는 사8:13을 인용한 말씀이다. 사람이 거룩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만이 가능하다. 물론 OT의 이사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요청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는 당부다. 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믿음과 불신의 관계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의미다. 그리스도를 거룩한 분으로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든든히 모시게 될 때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 역시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만 가질 수 있는 삶의 자세이다. 즉,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라 했는데 범죄한 사람 스스로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소망은 절대로 생길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범죄한 사람을 향하여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7) 증거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15m) 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된 삶의 자세는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 그것이 비록 당시의 핍박자 일지라도 그들에게까지 생명을 끼칠 수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소망의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1:21에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 라고 증거한 바 있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15b) 분명히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도 소망의 특성이다. 우리 신앙의 든든한 세 기둥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13:13)라는 바울의 선언에서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믿음, 소망, 사랑’은 점진적이라는 이유에서 이 배열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소망, 사랑, 믿음’이 아니며 ‘사랑, 믿음, 소망’이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인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며 다시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바울은 살전1:3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한 것처럼 이 신앙의 세 기둥의 실제적인 면을 증거하는데, 언제나 믿음이 출발이면서 역사를 이루는 약속된 믿음과 이렇게 믿음을 가진 자만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고 섬기게 되는데 이렇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견디는 인내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고전13:13이나 살전1:3 모두 믿음이 출발로 되어 있다. 절대로 소망이 앞설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우리의 소망을 묻는 데 대한 답변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한 것처럼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해야 할 것이다.



Ⅲ. 의로운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복이다(16~17)

여기에서는 사람의 선악을 판단하는 스스로의 기준인 양심과 함께 ‘선한 양심, 선행, 선을 행함’ 같은 주로 하나님과 관련된 마음의 자세와 그럼에도 이런 선한 사람들을 곡해하고 비방하는 자들의 옳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르게 선한 의지로 고난을 견디며 천로역정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격려한다. 베드로는 다시 도전하기를 “선한 양심[συνείδησις, 의식, 양심, 성실함, σύν 함께+ εἴδω 보다, 알다]을 가지라!”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이 양심을 여기와 2:19, 3:21에 모두 3번을 사용하고 있지만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비교적 자주 접할 수 있는 낱말이다.

특히 디모데전서에서는 마치 본문의 내용과 비슷하게 쓰여진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하였고 다시 v19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한 다음에 4:2에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양심이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는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당부는 그래도 바르게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이나 후진들에게 당부하는 명령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이런 주문조차도 별로 듣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오직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주 주시는 당부의 말씀이다.

앞의 딤전4:2에서 바울이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대단히 비관적인 표현이다. “화인을 맞아서[καυστηριάζω]”라는 표현은 불도장을 찍다, 짐승이나 노예에게 주인이 신체의 한 부위에 불로 지져서 자기 소유를 표시했던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이렇게 불도장을 맞은 부위는 점차 딱딱 해져서 감각이 없어지게 된다. 결국 양심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양심을 마비 시키는 것은 마귀 사탄이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버린 악의 화신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이렇게 불도장을 맞은 양심을 되살리는 능력이 있고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베드로나 바울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주님께서 회복해 주신 양심의 기능을 확인하라고 하는 데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공통적인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단어 적인 의미를 살핀 대로 양심은 한 개인 스스로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객관적으로 공통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럼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16) 우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당부한 다음에 그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이 서신이 쓰여 질 당시 그리스도인의 평가는 대단히 왜곡된 판단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좋지 않은 일들의 발생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는 잘못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날 드리는 예배 조차도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밖에나 숨어서 나 엿들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조차 사람을 잡아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일까지도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이러한 표현은 어쩌면 바울의 옥중 서신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바울 사도는 롬8:1~2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새롭게 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될 수 없지만 당시의 불신자들은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비방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우리들이 듣게 되는 비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당부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2:12)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런 오해를 받고 참고 지내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도 누가 옳고 그름을 하나님께서도 드러내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렇게 비방하던 자들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 이미 2:19~20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같은 증거는 뒤의 4:13에도 다시 언급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럼에도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자신의 백성들이 고난 받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17f)라고 붙여서 읽고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b) 전반절과 대비되고 있다. 악인들의 고난은 당연히 그 악을 행한 것에 대한 대가이다. 그럼에도 의인의 고난은 잘 감당한다면 욥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결과에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를 볼 것인데 악인의 고난은 부끄러움을 겪게 되겠지만 의인의 고난은 거기에 따르는 영광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다면 두려움 대신에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주인 삼아 구별된 삶을 산다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의 이유를 물을 것이고 그럴 때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답변은 그리스도의 품성인 온유함으로 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선행으로 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기대하는 생명의 삶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