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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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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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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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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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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디모데를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보다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를 당부했다면 여기서부터는 마지막 시대에 있게 될 여러가지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거기에 대처할 자세로서의 교훈을 이 2장에서 주고 있다. 성경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끝날이나 말세라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OT의 표현은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렘23:20)는 기록이고 NT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는 오순절 베드로 사도의 메시지 중에서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1:20) 한 것처럼 이 역사의 마지막에 오셨고 이제 역사에 끝에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가시고 이 역사를 닫기 위하여 다시한번 최종적으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한번 오실 것이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여기에 쓰여진 표현대로라면 ‘마지막 날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말세에 나타날 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어느때보다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 자주 보고 있는 안타까운 사실들이다. 이런 비극을 다루는 것이 결코 행복할 수는 없지만 바울 사도는 반드시 있게 될 사실들임을 디모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결코 행복할 수는 없는 내용들이지만 간략하게 점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이어 다음 시간에는 대처할 교훈을 주고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해답으로 제시되고 있다.
Ⅰ. 말세의 현상들(1~4)
이러한 안타까운 목록들은 NT에 몇 곳과 함께 나타난 뚜렷한 목록이다. 먼저는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마가복음7:21~23(13가지) 하나님을 외면한 이방세계에서 나타나는 목록들이 로마서1:28~32(21가지) 성령이 아닌 육신이 주도하는 삶의 현상들에 대해 갈라디아서5:19~21(15가지) 법이 필요한 경우를 지적한 바로 앞의 디모데전서1:9~10(15가지) 목록들이라면 여기서도 19가지의 죄의 목록들을 거론하고 있지만 먼저는 자신 스스로의 죄가 2가지이고 인간 관계에서의 15가지 죄목과 하나님께 대한 죄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이집트의 술사들을 두고 2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1) 하나님께서 사람관계에서 사랑과 화평을 기대하시고 또 바라시지만 범죄로 인하여 불편해진 상태를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마지막 시대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이런 죄와 관계없이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전체적인 주제에서 생각한다면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임을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영원 속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겠지만, 죄가 절정에 이르는 마지막 시대에는 불편과 때로는 해악을 감수할 각오까지도 하며 살아야 함을 자신이 이런 세상에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사실을 다음 주의 말씀에서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상황을 소돔성에서의 롯을 들어 증거한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2:7)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렀을 때 복음과 함께 고통 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여기에 각자가 믿음으로 답변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 여기에서는 자기로부터 부모로 그리고 점점 옆으로 나아가는 부정적인 목록들을 접하게 된다.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형태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며” 이것은 이웃사랑의 기준일 때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주님을 따르는 데는 경계되는 항목으로 말씀하신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여기 쓰여진 형태가 “자기를 사랑하며[φίλαυτος]” 이 낱말은 v4의 “하나님 사랑[φιλόθεος]”의 반대로 쓰인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돈을 사랑하며[φιλάργυρος] 은[ἄργυρος]을 사랑하며” 이 마지막 시대에 돈은 어쩌면 만능이다. 솔로몬의 증거처럼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잠17:8) 그럼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라는 바울의 경계를 기억해야만 한다.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여기서부터 관계 속으로 확대된다. “자랑하며[ἀλαζών, 허풍선이, 사기꾼으로 본래 시골에서 효과 없는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며 뽐내는 돌팔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실적으로 사람은 아무리 귀중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이런 입장에서 자랑은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교만하며[ὑπερήφανος, ὑπέρ, + φαίνω, ~을 넘어서 나타내다, 남들 위로 자기 모습을 나타내다.]” 극한 교만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위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방하며[βλάσφημος, 중상적인, 모독적인, 모독자, 훼방자]” 바울은 이미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6:4)라고 이러한 모습을 증거한 바 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b) 이것은 사실 사람됨의 기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부모를 거역하며” 율법에서부터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첫째이다(출20:12; 엡6:1). 신명기21:18~21에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돌로 쳐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특히 이런 변화는 건전하지 못한 이단에 빠질 때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부모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감사하지 아니하며[ἀχάριστος]” 누가복음6:35에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로 말씀하신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될 때 맨 먼저 가지게 되는 것이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f)는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감사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거룩하지 아니하며[ἀνόσιος, 불경건한; ὅσιος, 거룩한, 경건한, 신앙심이 깊은]” 하나님의 은혜나 사람의 호의도 배반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마치 누가복음17:11~19에 고침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10명 중의 9명의 나병환자와 같은 사람이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3) 우리는 무정한 사람을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무정하며[ἄστοργος, στοργή, 사랑이 없는, (타고난) 애정이 없는]”는 동물들의 어미와 새끼 사이의 본능적인 애정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무정함은 부모와 자식 간의 본능적인 애정 마저도 없음을 의미하는데 함께 사용된 곳이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31)고 표현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ἄσπονδος, 앙심 깊은, 화해할 수 없는]” 고대 그리스시대의 전쟁에 휴전을 하게 될 경우 화해의 뜻으로 축배를 들 때 그 술을 “σπενδή(σπένδω, 4:6 제주, 헌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휴전이 불가능한 자세를 의미한다는 데서 적대감을 내려놓지 못하는 상태로 원한을 품고 벼르는 마음이다. 원통함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로지 분감으로 대처하는 삐뚤어진 마음이다. 원통함은 당연히 서로의 앙심을 처리하지 못하고 원수를 만들 수밖에 없다.
“모함하며[διάβολος, 중상자, 비방자, 마귀]” 이 말이야 말로 하나님의 대적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저갱에 던져질 마귀의 성품이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절제하지 못하며[ἀκράτης, 무력한, 훈련받지 못한] ←‘절제[ἐγκράτεια, 자제; 벧후1:6]’의 반대말로 감정이나 생리적 욕망을 다스리지 못함을 의미한이다.
“사나우며[ἀνήμερος, 길들이지 않은, 사나운]” 야만적이며 동물적인 기질로 짐승 같은 기질을 의미한다. 인격을 갖지 못한 밀림의 약육강식의 원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을 두 사람의 성경저자가 기록하는 것을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2: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ἀφιλάγαθος, 선이나 선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 φιλάγαθος]” 선한 것을 사랑하는 성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至高至善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비상처럼 싫어하는 어두움의 성품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에서의 자연적인 진행이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4)라는 표현이다.
“배신하며[προδότης, 배반자, 반역자, 배신자]” 당연히 여기에 성경의 모범은 가룟 유다이다. “조급하며[προπετής, 경솔한, 분별없는, 무모한]” 말과 행동이 가벼워 분별력 없는 행동을 가리킨다. “자만하며[τυφόω, 연기를 일으켜 흐리게 하다, 뻐기다, 잘난 체하다]” 쉽게 표현하는 의미는 교만과 다르지 않다. 바울의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는 경계에 속한 사람을 의미한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제물로 주신 하나님보다 육체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채우려는 것으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 간의 관계나 장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순간만을 즐기려고 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마약 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요한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는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런 내용들은 나눌수록 우리 자신들까지 침울해짐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빼내 주신 것이다. 또, 이런 이유에서 밝고 긍정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이 더 감사하고 행복하다.
Ⅱ. 생명의 진리에 이를 수 없는(5~7)
두번째 부분은 신앙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경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이름뿐인 신앙인들, 특히 건전치 못한 이단의 사람들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영적이고 실제적인 경건이 어떤 것임을 거론하면서 서로가 욕심에 끌려 생명의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를 수 없는 좋지 않은 관계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는 표현이지만 종교적인 외형은 갖추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로 오로지 신앙을 보이는 것을 꾸미는데 치중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이 같지 않은 것임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4:20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는 중요한 증거를 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이 바로 되면 좋은 것이지만 이렇게 거꾸로 되면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다.
경건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경건의 모양은 바른 신앙의 상태이지만 이것이 거꾸로 되어 오늘의 말씀과 같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안타까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대단히 단호하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ἀποτρέπω, ~에서 돌아서다, 등을 돌리다]”(5b) 그런 사람들에게는 얼굴을 마주보며 대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로 쳐다볼 가치를 두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6) 항상 건전하지 못한 종교인들의 접근 수법은 비굴하기까지 하다. 가만히 들어가[ἐνδύνω, 기어들어 가다]는 간교하게 눈을 속이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 쓰였다. 여기 표현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ον]란 말 그대로는 작은 여자로 체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유인하는[αἰχμαλωτεύω, 생포하다, 포로로 끌고 가다] 이란 말은 ‘포로로 잡다’라는 의미로 생각이나 모든 행동의 자유를 빼앗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6b)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가지 욕심에 종노릇 하다 보니 죄를 쌓아 그 무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미 건전치 못한 이단에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여자인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7)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17:21의 아덴의 사람들처럼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는 것처럼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마술을 보고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바탕과 근본이 진리가 아닌 허황된 것들에 아무리 시간을 쓴다고 해도 생명의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Ⅲ. 역사의 사례(8~9)
이 이야기는 성경에 직접 언급된 일이 없는 유대의 전통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증거로 바로 앞에 이적을 행했지만 이집트의 술객들 중에도 어떤 경우에 까지는 거의 같은 이적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던 이집트의 술사들로 전승된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8f) 출애굽기7:11에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하였고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22, 8:7) 기록되고 있다. 이 이집트 술사들의 우두머리 임직 한 두 사람 이름의 의미는 “얀네[그는 화를 냈다, 성가시게 했다]” “얌브레[거품의 치유자]”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성가신 자들로 날라갈 거품에 불과한 자들이었고 사실 그들의 역할은 그들의 이름대로 끝났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출8:18) 바울은 당시의 소아시아나 에베소의 영지주의자들이 행했던 행위들을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던 두 요술사에 비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8b)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마음이 부패한 자’가 그 첫째인데 어두움에 사로 잡힌 거짓 교사들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부패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을 받은 자들’ 2:15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라는 것과는 반대되는 “버림을 받은 자[ἀδόκιμος, 시험에 합하지 못한, 가치 없는]”라는 것으로 더 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임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9) 앞의 2:16~17f에서 보는 것 같이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 같은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리가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v19f에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 증거하는 것처럼 이 우주 가운데 어떤 세력도 하나님과 대항해 불 수 있는 세력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갖는 확신이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9b) 한 것처럼 이집트에서도 “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출9:11)는 철저한 패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라는 증거는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역사의 막이 닫힐 징조들은 영계는 물론 보이는 세계에 점점 자주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절대적이 각오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믿음생활 한다는 사람들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믿음을 표현할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나 언약은 분명하다. 항상 배우고 훈련하여 생명의 지식의 충만한 데 이르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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