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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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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 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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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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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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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두번째 로마에 투옥되어 마지막을 앞두고 쓴 편지라는 데서 결연한 의지와 슬픈 감정이 교차되는 내용들을 더러 볼 수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이 서신이 바울 사도의 가장 마지막에 쓴 서신이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라는 데서도 그렇다.
바울 사도의 죽음에 대한 의지는 이미 빌립보서에서 증거한 바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v23에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육신에 남아 있는 것이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한 것이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도 오로지 걱정거리는 교회들과 사역자들이었다. 그런 감정들이 이 서신에도 은연중에 나타나고 거짓교사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2:14~19)는 전도자들의 사명감과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전달받고 함께 사역하는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역자들이 비록 자신이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로써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서신이기도 하다.
이 편지가 디모데가 아직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때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지역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때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러한 바울의 의지는 여전하고 자신이 갇혀 있는 것에 절대로 기죽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8),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12)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16)”고 용기를 주고 오직 하나님께 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2:15)고 당부한다.
베드로 사도도 같은 격려를 주고 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비록 자신이 세상을 떠나 가르침이나 격려를 줄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영적인 사역을 능히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저 유명한 말씀의 능력도 이 서신의 특징이다(3:15~17). 이 1장은 전체의 서론이면서 디모데에 대한 애정과 개인적인 부탁 까지도 담고 있고 2:1~4:8 실천적인 당부는 없는 반면에 여러가지 교훈들과 격려들을 주고 있고 마지막 4:9~22는 개인적인 사정과 문안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결론 X
Ⅰ.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축복(1~2)
먼저 디모데전서의 서론과 별 차이가 없는 인사를 나누고 있지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서에서는 자신의 사도됨이 물론 하나님도 언급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다면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라는 좀더 강조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
이런 바울의 확신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이라고 표현했다. 유대교와 복음에 혼란하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적어도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증거한 바 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사도권은 그 출처도 중요하지만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자신이 사도 된 것을 강조함으로써 디모데에게도 이 사실을 확신시키고 있다. 이미 디모데전서4:8b에서도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던 것처럼 복음 안에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의 약속”이고 이것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끝나는 언약이 아니라 다음 생에까지 연결되는 약속이기 때문에 귀중하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 한 것은 디모데전서1:2과 차이는 단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했던 것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진실된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를 마지막을 앞둔 시점에서는 사랑하는 아들로 더 애정이 가고 안타까움도 남았던 바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 비록 전서와 같은 내용일지라도 더 깊은 기원이 들어 있는 축복일 것이다. 이 땅을 디디고 사람 중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필요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일정부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대부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여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순서도 그냥 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순서를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행14:17b)는 은혜를 차별 없이 주신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순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도 유효하여 죄의 용서를 누리게 되고 두려움으로만 대했던 하나님은 어느새 확실한 보호의 하나님이 되시고 마음에 주시는 평강도 제한 없이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쩌면 일반 은총만을 누리는 사람들과 크게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당연한 사랑을 누리고 있음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것들이 “네게 있을지어다!” 축복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하면서도 서로에게 주는 확신과 같은 것이다. 우리도 서로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에게 있기를 빕니다!”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Ⅱ.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한다(3~5)
여기에도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애정과 그의 신앙 인격에 대한 칭찬을 주고 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3) 중요한 역할을 맡긴 만큼 그 일이 세상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3f) 여기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모두 “밤낮, 쉬지 않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3:10)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3b) 밤낮 기도하고 항상 생각하는 이유들을 고백하고 있다. 믿음이 바로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단 양심이 바른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것도 깨끗하게 씻겨진 양심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의 집사직의 선정에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 라고 하였다. 문제는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는 것처럼 그것을 스스로는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주변의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청결한 양심인지 화인 맞은 양심인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어쨌거나 디모데는 믿음으로 함께 사역하던 성령의 사람 바울이 볼 때 청결한 양심이었다는 평가를 본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4) 믿음의 사람에게 왜, 눈물이 많을까? 그것은 적어도 두가지 정도의 이유에서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은혜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는 부족함에서 흘리는 눈물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넘침으로 인한 감격의 눈물일 수 있다. 둘 다 바람직한 눈물이고 디모데에게는 자신에게는 위대한 믿음의 스승이요 아버지와 헤어짐이 슬픔일 수 있었을 것이지만 바울이 보는 디모데의 눈물은 이 모두에 해당하는 경건에서 나오는 눈물이었기 때문에 기쁨이 가득하여 눈물 흘릴 수 있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5) 디모데는 바울이 쓰고 있는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도 대단히 경건한 사람으로 확신 되어 지는데 이러한 디모데의 믿음의 출처를 밝히지만 v3에 본 대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유대교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5f) 쉽게 감격하고 또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는 디모데를 보고싶어 하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 속에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주변의 역사는 사실 신기하고 감동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실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예정이요 계획이라고 하겠지만 오늘 우리 모두도 이렇게 부족하지만 믿음안에 머무르고 있는 근거 역시 이방인을 위해 준비된 바울이라는 한 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믿음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 바울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한다고 한 것은 주변에 역시 거짓된 믿음의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4:14~15에는 그런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5m) 디모데의 어머니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구체적으로 그 이름은 거론되지 않지만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행16:1) 한 것인데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기록되었지만 이후 더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디모데의 어머니 쪽의 계보는 확실히 유대교의 바탕위에 하나님을 섬겨왔던 것으로 생각되고 나중 디모데를 통해서 복음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3m)이라거나 3:15f의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한 것으로 봐서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신앙적인 양육이 이렇게 문제 있는 교회를 치료하는 역할가지 감당하는 사역자로 준비된 것으로 보여 역시 어려서부터의 신앙양육은 대단히 소중함을 확인하다.
이러한 믿음이 최종적으로는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5b)는 바울의 고백이다. 아무리 부모들의 믿음이 칭찬 된다고 해도 그 칭찬 듣는 믿음이 다음 세대에까지 연결되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믿음은 당대에 끝낼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데서 그렇다. 특히 여기 말미에 “확신하노라[πείθω, 납득시키다, 확신시키다, 설득하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과 설득을 시킬 정도로 확실하다는 묘사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가까운 예를 들어 과거 故이병련이라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 듣는 분의 믿음이 그의 아들 이명재에게도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래서 또한 믿음의 자녀들의 신앙 자세는 중요하다. 자녀들의 믿음이 그 부모의 믿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Ⅲ.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6~8)
여기서부터 앞에서 확인한 디모데의 믿음을 전제로 앞으로 지금보다 더 힘겨운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바울의 가르친 복음에 충성하기 위하여서는 더 큰 싸움을 감당해야 할 것을 당부하면서 바울 자신의 복음전파자가 된 경험도 함께 하여 더욱 친근하고 감격적인 부탁을 듣는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6) 디모데의 든든한 신앙적 배경을 확인한 내용을 전제로 “그러므로”로 말을 이어가는데 ‘이렇게 하여 오늘의 너 디모데가 있었다면,’이라는 표현과 같다.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앞의 디모데전서4:14에서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라고 권한 바 있지만 어쩌면 스승의 당한 어려움으로 의기소침해져서 영적으로도 낙심 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다시 자신의 안수함으로 디모데의 가진 은사를 다시 불타게 했던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고 있다.
안수는 하나님의 일 즉, 사역을 위한 위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 같은 경우도 다메섹에서 눈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로 아나니아가 안수함으로써 다시 보게 되었고(행9:12, 17) 사도행전13:3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방의 전도를 위해 바나바와 함께 교회로부터 안수를 받았음을 볼 수 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바울은 고전12:4~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한 것처럼 은사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위한 것으로 각 사람이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임을 로마서12:3~에서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6b) 영적인 은사도 주변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다. 항상 성령에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이나 사명을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옥죄는 어려움이 우리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어두운 세력의 영향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표현은 조금은 시들어진 숯불을 풍로로 불어서 이글이글 다시 피어오르게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이래서 과거의 좋은 신앙적 경험을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는 것은 필요한 회상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1:3~4)한 것처럼 디모데에게도 좋은 경험을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7) 이 말 앞에는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이유가 쓰여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7f)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했는데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롬8:15f)라는 내용이 이를 확인해 준다. “두려워하는[δειλία, 겁, 두려움, 비겁, 무서운] 마음” ‘비겁한 마음’이란 의미로 이해되는데 신앙의 사람은 절대로 비겁할 수 없이 당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허약한 존재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뒤부분은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7b) 여기 기록되는 3가지의 은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반드시 가추어야 할 내적인 은사들이다. 또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라고 부정했다면 여기는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이 앞서 오고 “능력[δύναμις, 힘, 세력, 능력, 역량]”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다이나마이트 같은 힘을 의미하여 복음전파에서 겪을 수 있는 고난이나 역경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랑[ἀγάπη]”은 인간적인 애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처럼 죄인을 사랑한 수 있는 은사를 의미한다(갈5:22) “절제하는 마음[σωφρονισμός, 자아통제, 절제, 분별력, 신중]”은 자신을 절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온전해지도록 영적인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으로 이미 디모데는 이런 입장에서는 바울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 여기에서는 바울 자신의 복음을 위해 당하는 입장을 그대로 증언하면서 오히려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자신을 본 삼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갇히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디모데도 같은 고난을 감당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8ff)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받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이라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8f)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한 것처럼 복음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증거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갇히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역시 자신의 죄로 인한 갇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인해서 갇힌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같은 복음을 증거하는 디모데에게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b) 권면하는데 이 당부에도 능력이 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은 사람의 방법으로나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불이익이나 고난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당부하신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둠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고 훈련의 고난의 투쟁을 지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영원한 죄의 저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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