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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6:1~5 2024-12-01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  
이 마지막 장은 첫 부분까지는 가족 구성원 중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데 함께 믿음안에 있는 관계 속에서 서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1~2). 나머지 부분은 앞에서 다 하지 못한 것들을 당부하고 있지만 특히 건전하지 못한 신앙의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이 편지가 이단에 대한 경계를 주기 위한 서신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1:3~17, 4:1~11에서 이단에 대한 지적을 한 바 있지만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경계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다.

요즘 금시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과거 돌반지를 선물하던 때에 비해 약 10배정도가 올랐다. 신앙은 더 말할 것 없이 반드시 가치와 유익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세상이나 순간에 얻어지는 유익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영원히 가치가 있는 유익이다(금보다 귀한 믿음, 벧전1:7).

안타까운 것은 영원의 가치를 찾는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세대가 되어 갈 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진리를 벗어난 신앙의 상태에서 그렇다. 경건은 반드시 진리와 함께 생각할 수 있고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이 가면서 바뀌고 가치를 잃어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위로부터 거듭나지 못하고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앙조차도 평생에 쓰다가 버리고 갈 세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개 건전치 못한 교주들은 세상에서 가치 없는 물질은 모두 자신에게 바친다면 영원한 가치로 변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고 나중에서 자신의 수하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물질과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모두 빼앗아 버린다. 1세기에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진리의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이런 잘못된 교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지키도록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요 함께 복음의 사역자된 디모데에게 경계를 주고 있다.



Ⅰ. 믿음 안에서의 종과 상전(1~2)

NT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권고가 상당히 많고(엡6:5; 골3:22; 딛2:9; 몬; 벧전2:18 등)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내용은 주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든지 포악한 불신의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세로 잘 순종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그러다가 설령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보상을 주인이 해 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분의 대가를 주실 것이라는 요지의 가르침이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1)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도 결국 종으로 섬기는 삶의 올바른 행동에 의해서 복음이 빛나게 되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권고의 교훈이다. 1세기의 종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거론해왔던 이야기이지만 어쨌거나 종의 운명으로 멍에 아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서럽고 안타까운데 그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러한 형편에서 충성하라는 가르침이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1f) 사람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 복음이고 이러한 불합리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만들어져 있는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라면 이런 부조화의 사회구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바울이나 성경의 가르침이 옳지 못하다는 인본 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물리적으로 이런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충돌이 되고 사람이 상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복음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무저항 주의 이면서 사람들의 내적인 어두움을 제거하고 빛으로 인도하여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부조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희생과 사랑의 방법이다.

사람이 멍에를 메고 있는 것 자체가 힘겨운 것이고 오늘날 인권이라는 사회규범만으로도 모든 멍에를 벗게 해야 한다는 것이 사람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모든 짐이나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 만으로 홀가분한 것이 사람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 사랑을 실천하신 것처럼 사랑이라는 삶의 에너지를 위한 멍에는 서로 감당하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이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1f)라는 상황이 현재에는 사회에 함께 살기 위한 일터에서의 모습이기 때문에 종의 신분이 아닌 직원의 신분에서 믿음의 사람이라면 더욱 감사해야 할 조건이고 순종해야만 할 말씀이다. 특히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라는 말씀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순종정도가 아니라 “공경할[τιμή, 값, 가치, 영예, 존경]” 자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의 주가가 올라가면 당연히 거기서 일하는 자신의 가치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여기에도 신앙적 가치를 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1b) 그것이 사회적인 가치상승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교훈[διδασκαλία, 가르침, 교훈, 교설]” 즉, 신앙적 가르침이 비난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그렇게 될 때 이를 접하는 사람들조차 함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비록 사회적으로 불리한 노예의 신분으로 살지라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2) 앞의 내용이 불신의 주인에 대한 자세였다면 여기서는 좀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좋은 위치를 더 가치 있게 사용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 또 이 원리는 당연히 현재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믿음의 삶의 이치이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2f) 베드로 사도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8~19) 라고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아야 한다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겠는가 만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주종의 관계라면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지만 사람의 안일함은 이런 좋은 조건에서 오히려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는 불합리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이왕에 편하고 감사할 상황이라면 당연히 “더 잘 섬기게 하라”는 당부는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종의 신분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여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 속에 형제관계는 무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조심하고 더 헌신하여 서로에게 유익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2m) 서로가 믿음 때문에 더 귀하게 여기고 존중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먼저는 같은 믿음을 가진 주인이든지 종이든지 서로에게 유익한 것은 당연하고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 아버지께도 더욱 사랑을 받을 것은 사실이 될 것임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익과 사랑이 서로에게 미친다면 그런 복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2b)는 권면은 앞에 말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교훈일 수도 있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건전치 못한 신앙의 지도를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는 말씀이다. 즉,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주종의 관계에 대한 신앙적 권면일 수도 있고 바르지 못한 교훈으로 혼란한 신앙적 자세를 경계하라는 당부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는 당시 그레코로만 시대의 주종의 관계는 없지만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교훈일 수 있고 주인이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이든지 함께 신앙하는 주인과 고용인의 관계에서도 유익이 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복된 교훈이다.



Ⅱ.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라(3~4)

이제 이 편지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자족하는 자세와 함께 이단자들을 경계하는 내용이 →v10의 교훈이라면 영적 생활에 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당부하고v11~16, 물질에 의존하려는 부자들에 대한 경계를 v17~19, 바르지 못한 지식을 피할 것에 대한 교훈을 v20~21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다음 시간에까지 나눠서 바르지 못한 신앙의 교훈의 경계들을 상고하고자 한다. 우리의 신앙이 곁으로 나가는 것은 나중 최종의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지만 처음에는 쉽고 가볍게 여기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데서 특히 조심해야만 한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3) 우리가 건전한 신앙을 지켜간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그 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단(異端)의 사전적 해설을 찾아보면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 옳지 아니한 도’라고 기록하지만 여기 “다른 교훈[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1:3b), ἕτερος, 다른 + διδάσκαλος 가르침, 교훈]”은 기존과 다른 이론이나 가르침을 의미하는 낱말이 쓰이고 있다. 먼저 쓰인 다른 교훈은 건전한 신앙의 사람들이 반드시 거절해야 할 믿음의 논리를 의미한다면 뒤에 쓰인 “바른 말[ὑγιαίνω, 건강하다, 건전하다, sound words]”은 여기에 해설하는 것처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앞에서 말한 다른 교훈과는 완전히 다르게 “[εὐσέβεια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 διδασκαλία]”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런 하나님께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진리에서 벗어나고 말싸움을 좋아하게 되는 결과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이미 바울은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했던 것처럼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교훈들이나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계시로 주신 교훈들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면 빗나갈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언제나 시작은 미미한 작은 것을 허용하는 것에서 빗나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교훈이나 진리의 교훈이 아니면 거절해야만 한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4)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진리를 거절해 버리면 나타날 수 있는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신앙의 미덕인 겸손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게 되어 다른 것은 몰라도 죄인이 구원받는 원리인 신앙적 논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본 바탕을 거절해 버리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거절한 어떤 사람의 행동은 연속선상에 있을 수 있는 과정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3b~4f)라는 과정으로 가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도 주님의 말씀과 신령한 진리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다음 단계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4m)라는 상태를 지적하는데 그런 이유에서 연결되겠지만 딤후2:23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는 당부를 주는 것이다.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 단어는 “좋아하는[νοσέω, 병들다, 앓다]”이라는 낱말이다. 이런 가치 없고 쓸데없는 논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나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세상 속에서의 지식이나 교훈에서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이런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치에서 벗어난다면 1세기 당시의 철학자들이라고 하는 Sophist 즉, 궤변론자들처럼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게 되고 인생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4b) 여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여기 거론되는 부정적인 항목들은 마치 로마서1:29~31에 하나님을 거절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온 갓 부정적인 항목들에 들어 있는 내용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자신과 같지 못한 생각을 가지는 상대에 대하여 나눠지고 미워하게 되고 비판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적대감을 가지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9~10; 요일4:16)거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요한 사도를 통한 당부가 얼마나 귀한지 모를 일이다.



Ⅲ. 진리를 잃어서는 안된다(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바탕한 진리와 사랑을 떠난 종교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을 거론하면서 오늘 메시지는 마무리되고 있다. 어떤 것도 처음부터 썩는 것은 없다. 그 환경이 썩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면 부패 하여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신의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지나칠 정도로 구별하고 금하신 것들을 율법 속에 보게 되는데 그것은 오늘의 위생에서 분석해보면 부패하기 쉬운 식물로 자기 백성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금하신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먹을거리의 부패는 육신의 건강을 상하게 되지만 오히려 이것보다 위험한 것이 부패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님과 사람관계를 해치게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정결의식으로 시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7~18) 가르치신 바 있다. 진리를 떠나면 첫째로 나타나는 것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5f) 했는데 부패한 사람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만 깨끗케 할 수 있고 그 정결을 지켜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밖에 없다.

마음이 부패하여 질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앞의 v3 보는 대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직분을 가지지 않고 열심히 신앙하려는 사람에서부터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 다음으로는 “진리를 잃어버려”라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논리가 된다.

대부분의 이단을 만드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진리에 충실 하려던 사람들임은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다. 무엇이든지 귀중하게 여기고 지키려 한다면 잃어버릴 염려는 적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가 다른 것에 마음이 팔려 등한히 여기게 되면 잃게 되고 잃은 후에는 별로 중요성도 갖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적어도 진리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한다.

환원복음을 부르짖던 교회와 지도자들이 어느 순간인가 진리를 회복하고 지켜야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다른 교회들처럼 사람을 많이 모으고 싶고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들도 하도록 허용하다 보니 기존에 가졌던 신앙의 바탕도 명칭도 예배도 대부분 잃어버리고 애써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교회들처럼 사람들이 모아지는 것도 아니고 초기에는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자긍심마저 잃어버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되고 만 것이 오늘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이제 진리를 잃어버리는 데까지 이르면 인생의 가치가 바뀌게 된다. 영적인 가치가 어느 순간에서 인가 육신적인 가치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평가를 가지게 되는데 전에는 ‘세상을 다 잃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잃지 않아야 한다.’는 가치에서 ‘어떤 종교적 수단으로 라도 세상의 돈이나 금은 보화를 모으고 명예를 얻어야 한다.’는 세속적인 가치가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이런 과거와는 다른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화평은 깨어지고 다툼이 잃어나게 되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께 범죄하여 화평이 깨어지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자연과도 불화하게 되고 사람 간의 화평은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 이유에서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는 화해의 주님을 모시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권력을 가져도 돈을 많이 가져도 화평이 아니라 다툼만 무성한 것은 범죄한 세상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물론 이것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시고 그분의 말씀과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경영주가 되었든지 고용인이 되었든지 서로의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언제나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이신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가도 역시 사람이 다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언제나 신앙인으로써 주의해야 할 것은 진리가 아닌 다른 교훈을 하지 말아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는데 마음을 두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말다툼하는 것을 좋아하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함께 악한 생각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수순으로 가는 것은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려서 신앙을 점점 세속적인 이익을 찾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화평을 잃고 다툼만 일으키는 멸망으로 가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