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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5:9~16 2024-11-17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  
지난 시간에 이어 교회가 반드시 도와야 할 참 과부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도 이어진다. 분명한 의무인 만큼 도움에도 확실한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이 3장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의 자격과 다르지 않은 경건으로 오로지 하나님께 헌신한 경력과 삶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도움을 주는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가려야 하는가?’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드려진 귀한 물질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 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영육의 삶이 세상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영적인 삶이기 때문에 세상으로 부터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신앙의 여인들임을 증거한다.

오늘 메시지 제목이 비록 별로 유쾌하지 못한 가련한 여인들이지만 바울이 칭찬한 빌립보 교회의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고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교회의 구제의 대상으로 기록된 이름이 아니라 여기에 합당한 신앙은 반드시 생명책에도 흐리지 않는 이름일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요한 사도를 통하여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 21:27b)고 믿음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깨끗한 흰옷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산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반면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신앙에 바르지 못한 부분도 상당히 자세하게 경계의 교훈으로 나열하고 있다. 과부들이 만약에 육신적인 욕정을 다스릴 수 없는 정도로 젊음의 열기를 가졌다면 그런 사람들은 역시 혼인하여 죄를 지을 가능성을 없애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러한 삶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오히려 재혼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14) 신앙에는 절대로 억지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 순리를 말씀에 맞게 따르는 것이 자신과 주변과 인류의 모두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계속 말해 오는 것이지만 이 교훈은 단순한 과부에 대한 교훈이기 보다는 모든 성도를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성명사로 불리고 과거 우리를 불행하게 했던 남편이었던 죄를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인 체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천로역정의 길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혼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우리의 성결을 당부하는 성령의 거룩한 당부로 들어야 할 것이다.

시대적 변화에 많은 혼란을 겪고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에 있는 우리에게 항상 불변하는 원칙을 제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기를 원하고 무엇보다도 주시는 교훈에 순종하여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하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은 결론이 없다.



Ⅰ. 명부에 올릴 자(9~10)

이미 v3에서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교회가 어려워서 하나님께 만 소망을 두고 있는 현재 과부가 되어 있는 입장의 여인들에게 [참 과부]라는 명칭이 쑥스럽기도 하고 친숙하게 들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늘 직선적이고 돌려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표현이나 당부도 사람을 부끄럽게 하거나 서운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신한다면 오히려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9) 지금 우리 나라의 평균 연령이 많이 길어졌지만 이 글이 쓰여진 1세기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은 예전에 우리가 오래 살았다고 기념하던 회갑(回甲)의 나이와 같은 연령을 대상으로 하고 수절 과부(守節 寡婦)를 명부에 올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령에 한계를 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스스로 생계를 벌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고 그런 이유에서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성결 한 삶을 살아온 여인들로 뒤에 나타나는 것처럼 아직도 육신적인 욕구가 삶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임을 이해하게 된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결혼 생활을 단 7년간 하고 홀로 되어 84년을 주님 의지하고 살았던 한나같은 여인(눅2:36~37)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여인들의 신앙적 덕목들을 나열하는 내용이 5~6가지 정도로 증거되고 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10) 시작과 끝이 모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는 독특한 구조로 표현하고 있다. 앞의 장로의 자격에서도 그 첫째가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3:1)”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거론되는 “선한[καλός,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 가치 있는] 행실” “선한[ἀγαθός, 탁월한, 우수한, 좋은, 훌륭한] 일을 행한”은 각각 다른 낱말이 쓰여서 신앙 안에서뿐만 사회안에서 도덕적으로도 추앙받을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는 시작과 마침의 표현 속에 거론된 덕목들이 신앙 안에서 거론됨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실[ἔργον], 선한 일[ἔργον]”이 미래적인 기대나 가능성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증거나 완료형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도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에 사실적으로 나타난 덕목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앞 뒤의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는 가운에 덕목들이 4가지로 나타난 것들을 살피도록 하자.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어머니들의 가장 위대한 일은 자녀를 바른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일 것이다. 앞의 3:4의 장로의 자격에서도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하였지만 특히 홀로된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일은 영적으로도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고 밖의 어떤 일보다도 가까이에 둔 자녀들을 가정에서 영적으로 지도하는 것은 삶과 기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임은 성경에서조차 더러 나타나는 일이다. 디모데의 어머니처럼 비록 이방인인 남편과 살았지만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을 보면서 배우고 자랐음을 바울이 지적한 바 있다(딤후1:5).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무슬림 속에서도 나그네 대접은 종교적 덕목으로 나타나고 히브리서13:2에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나무 아래에 지나가는 천사들을 향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3~5)라는 접대로 이삭의 탄생을 예언 받은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아직 교회들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주로 순회하는 전도자들이 생활의 보장이 되지 못한 데서 그런 사람들을 접대한 한 것은 거의 교회의 공식이었고 이런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장로의 자격에서도 본 바 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3:2) 하였고 1세기 말엽에 기록된 요한3서5~10에는 이러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v10 에서는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라고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책망하고 있다.

OT 열왕기하4:8~11에는 늘 지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잘 접대하는 수넴여자의 가정을 볼 수 있고 이런 정신은 NT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고 자신과 전혀 이권이나 관련이 없는 사람을 접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과부들에게는 여러가지 경계되는 것이 있었을 것(경재, 독신)임에도 주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접대한 것은 주님께서 음식을 차릴 때에는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청하여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게 될 것이라(눅14:12~14)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지위가 높거나 이름있는 사람이나 존경스러운 이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종들은 자기 주인의 발을 씻는 것 역시도 자신의 꼭 해야 할 일로 감당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에 다락방에서 마지막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요13:3~14)은 베드로가 거절하는 것처럼 당시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에서 그분의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의 영원한 수치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 자체로 죄악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역사였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신 후에 다시 자리에 앉으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하셨고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중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f) 하신 말씀 역시 새겨 들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므로 이미 온 몸과 영혼이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세상 속에 살며 발에 먼지가 묻는 것처럼 수시로 씻어야 할 먼지 묻은 발 같은 허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라는 것은 결국 성도들의 허물을 가려주고 씻어주는 귀한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믿음안에,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허물을 들추고 손가락질하기 쉬운 것이 이 마지막 역사 속에서 교회의 한 단면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과 함께 우리가 다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지체들의 허물을 들춰내고 흉보는 대신 그의 깨끗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일깨워줘서 허물을 씻어주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과부들 만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서로 간에 감당해야 할 사랑의 짐으로 확신하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는 덕성을 거론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는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라는 덕목이다. 별 탈 없이 잘 살아가는 지체들은 돕지 않아도 별 어려움을 모른다. 그럼에도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반대적인 입장의 신앙을 바로 하려고 하면 환난을 당할 것은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도 증거하신 바 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또 복음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말씀과 성령과 함께 이런 환난을 잘 감당하는 것을 바울이 칭찬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경우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1:4) 한 바 있다.

결국 “환난[θλίβω, 압박하다, 억압하다, 괴롭히다, 누르다, 짓누르다, 압착하여 짜내다, 둘러싸다, 가두어 넣다, 괴롭히다, 방해하다, 좌절시키다]”이란 온 갓 힘겨움의 별명으로 사실 신앙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한 것은 이런 사람들을 그 환난에서부터 끌어내는 데까지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함으로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제를 감당해 내는 모습이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 하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힘들어 할 수도 있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을 견뎌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부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은 부정적인 부분은 간략하게 진행할 요량에서 그렇다.



Ⅱ. 올리지 말아야 할 자(11~12, 14)

앞에서 교회가 명부에 올려 생활이 가능하게 할 신앙으로 살아가는 당시의 노년의 과부들의 자격을 그들의 덕성을 따라서 확인했다면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부분은 도움에서 제외하고 적극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신앙에서도 더 덕스러울 수 있음을 되도록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11) 구제의 대상으로 올렸다가 오히려 본인이나 교회에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는 대상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나열한다.

여기 젊은 과부는 당연히 아직 나이가 육십이 덜 된 여성으로 아직 육신적인 혈기가 영적인 부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홀로 사는 여자들이다. 그 이유와 결과 까지도 경계로 지적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욕으로[καταστρηνιάω, 방탕하게 되다, 사치(奢侈)]”라는 표현으로 요한계시록18장의 바벨론 멸망과 관련된 표현에서 자주 사용되었다(3b, 7f, 9f). 바울은 여기서 재혼을 정죄하는 것도 아니고 금욕을 권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육체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믿음을 버릴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2) 여기 처음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알고 감격하던 그런 확신이 아니라 문맥을 볼 때 신앙적으로 살겠다고 서약했던 교회와의 약속을 버린 것이라는 이해가 더 지배적이다. 약속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반드시 지켜져야 만한다.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처음 믿음이든지 그 믿음으로 인한 언약이든지 반드시 지켜져야 만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14)는 권면은 정죄가 아니라 대안이다. 바울은 자신이 독신으로 살았지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 권한 바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14b)는 증거이다.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삼하12:14f)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여기 젊은 과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거나 빗나가면 밤낮 참소하는 마귀로 하여금 비방거리를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Ⅲ. 이런 사람들의 게으름의 경계(13, 15~16)

신앙에 든든하게 서지 못한 젊은 과부들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결국 정욕 적인 사람이 되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멀리 생각되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는 본인에게서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에게까지 적잖은 어려움을 끼치게 되는 것을 결과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이 오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문제는 처음부터 크게 발생할 수도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두면 점점 커갈 수 있다는 경계를 주는 교훈이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13) 이 말씀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지나치게 집착한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의 사람들처럼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3:11)라는 지적을 받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문제는 둘 다 “게으름”이 그 중심이다. 이들의 문제는 크게 두가지이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13f) 자연적으로 게으르게 되는 것도 문제인데 “익혀[μανθάνω(μαθέω), μαθητής(제자), 배우다]”라는 것으로 배울 것이 없어서 게으름을 배운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베드로 사도가 지적하는 것처럼 경건을 훈련하지 않으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4)는 경계를 준 바 있다.

1세기 당시에 나이 든 여자들에게 주어진 일이 디도서2:3~5에 나타나고 있는데 신앙적인 교육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명목이었지만 오히려 게으름을 가르쳤던 안타까움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두번째 지적되는 모습도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13b)한 것인데 “쓸데없는 말을 하며”는 교회에나 개개인에게 덕이 되지 못하는 남의 허물을 들추거나 비방하는 전혀 유익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일을 만들며[περίεργος, 간섭하기 좋아하는, 마술에 속한(행19:19)]” 한 것은 은사적인 것처럼 어떤 시도를 하는 것으로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는 신앙에 있어서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말이므로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은사적인 시도를 한 것일 수도 있다.

더 심각한 결과는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15)라는 것이다. 여기 “사탄[Σατανᾶς, 반대자, 대적자]”인데 이런 무질서를 그대로 둘 마귀 사탄이 아니다. 앞에서 상황에 맞게 다르게 이해를 하긴 했지만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2)는 말씀과 함께 이해할 때 당연할 결과일 수도 있다. 마지막절은 지난 시간에 충분히 다루었고 이해가 어려운 말씀도 아니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16) 신앙하는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늘 말한 바 있다. 항상 덕스럽지 못한 말들도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함으로 믿음에 합당한 권면으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는 권면처럼 서로를 세워가는 지체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