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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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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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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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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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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시작에서부터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을 경계하였고 자신의 하나님의 일꾼됨의 은혜를 찬양한 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준 후에 교회의 공식 직분자들의 자격을 다룬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경건의 신비를 찬양한 것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지난 시간까지의 진행이었다.
이제는 다시 교회를 위한 디모데의 섬김을 격려하면서도 거짓된 교훈으로 복음을 혼란케 하는 잘못된 경건주의에 대한 경계와 함께 선한 주님의 종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될 것을 이 4장에서는 계속 가르치고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1세기에도 건전치 못한 교훈은 끊임없이 경계되고 있는데 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는 바른 교훈을 떠난 사람들의 결과적인 면을 다시 거론함을 본다.
여기 후일[ὕστερος, 뒤에 있는 것, 나중에, 뒤에]에 라고 그런 일이 있을 시기를 조금은 막연히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도 자신의 다시 오심 직전에 이런 일들이 더 자주 있을 것을 공관복음서들에 기록하고 있다(마24, 막13, 눅21장). 그러므로 재림의 징조들이 더 빈번하고 있는 우리시대에 더욱 경성하여 하나님의 건전한 말씀에 거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Ⅰ. 성령의 영적인 경계(1~2)
이 땅위에서 주님의 백성들의 바른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천국 행 지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그 말씀의 바른 이해를 위하고 그의 백성이라는 인침과 모든 어두움으로부터 지키시는 성령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나 분명하고 다르지 않은 말씀과는 다르게 성령의 역사는 조금은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심지어는 거짓된 영이 성령을 흉내 내려고 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런 이유에서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는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1f) 물론 기록된 말씀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라는 바울의 가르침이나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는 기록처럼 성령께서 하신 일이지만 여기에서 →v5 기록되고 있는 후일에 있을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계 역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것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절대로 애매하거나 희미하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기 때문에 “밝히 말씀하시를,”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ἀφίστημι, 물러가다, 유혹하다, 배반하다, (능동적으로) 반란을 선동하다]…”한 것으로 봐서 언제나 옳지 못한 거짓 교훈이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 있던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에서 떠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는 경계이다. 비슷한 경계를 요한 사도가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을 말하는 가운데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고 증거한 바 있다. 우리 대한민국이나 세계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단들은 본래는 신실하게 보일정도로 열심이 함께 신앙하던 사람들 가운데였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저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를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고 말하는데 어떤 경우 일상의 삶에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출처에는 관계없이 점점 신령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유혹들이 이런 형태로 가는 것을 본다. 이런 경계는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1:3b~4)
일반적으로 들은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주요 이단 교주들이 대부분 본래는 대단히 신령한 것을 좋아하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듣게 된다. 성령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록한 말씀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령한 것이랍시고 맹목적으로 따르다 보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건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노리는 어둠의 영들의 역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교회들 속에도 이런 위험은 항상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가 다가올수록 이런 영적인 부분에 더욱 경성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경계에서 바울은 계속 당부하기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딤전6:3~4f) 했는데 이런 이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런 수순으로 갈 수 있다는 경계이다. 또 이런 이유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불변하는 바른 하나님 섬김의 가치가 크다고 하는 고백이 되기도 하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2)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게 된다. 바로 앞의 3:16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음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한 복음의 사실을 왜곡하거나 비슷하게 꾸미는 것에 연결되는 것에서 경계하고 있다. 당시 1세기의 엣세네파나 영지주의 같은 복음에서 이탈된 부류들이 보이는 육신의 삶 속에서도 진리를 거절한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2)고 표할 수밖에 없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마귀 사탄은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소유로서 불도장을 찍어 완전한 자신들의 것으로 삼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이 참 경건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외식하게 되고 진리 된 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런 이유에서 이단에서 바른 진리로 돌아오는 것은 불신자가 믿음을 갖는 것보다도 어려움을 현 역사가 교훈 하고 있는 사실이다.
참으로 두렵고 안타까운 이야기들이지만 그렇다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은 전혀 없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성령으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요한 사도의 증거가 힘이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즉 우리를 산 소망으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순종한다면 역시 불변하시는 주님의 보호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신앙이 곧 금욕주의는 아니다.
당시 에베소에 있었던 바르지 못한 교훈들이 주로 금욕주의를 주창했던 엣세네파나 1세기에 요한1서를 쓰게 만든 영지주의나 아니면 이 두가지가 혼합된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바른 교훈이라면 어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도 거스르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복음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롬1:27).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3f) 이것은 OT에서는 어떤 부분에서 금기시되었던 부분들이 있기도 하였다(출19:15; 삼상21:4). 그러나 결혼 제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처럼 여겨졌던 1세기에 결혼에 대해 혼란을 겪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2)고 오히려 바른 삶을 위해서도 혼인을 긍정하고 있다. 또 경건을 주창하는 히브리서에도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 오히려 혼인을 귀히 여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울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교하기까지 한다(엡5:22~33).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3fm) 바울은 이러한 신앙의 논리를 다음 두곳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14)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오히려 모든 것이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
다른 한 곳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는 디도에게 이런 증거를 하고 있는 원인도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1:12)라는 평가처럼 옳지 못한 삶의 자세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3bm) 음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완성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 12, 18, 21, 25) 하셨고 모든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f)고 기뻐하셨다. 지고지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기뻐하신 모든 것은 당연히 선하고 좋은 것들뿐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그러한 선한 피조물들이 악용될 때 자연은 탄식한다고 증거되고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그런 이유에서 먹는 음식이 되었든지 어떤 것이든지 선하신 하나님의 뜻안에서 사용된다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롬14:14f) 증거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주님을 떠난 죄의 굴레에서 사용된다면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추하고 더러운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이어지는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3b)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누구에게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게 되어 있다.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아는 자들은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아름답고 귀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Ⅲ. 주님의 뜻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하다,
사실 이 말씀은 이미 나눈 앞의 v3의 확인이다. 우리 주님의 육신의 혈육인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b)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 바 있다.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지으신 것은 어떤 것도 악한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 귀하고 선한 것들을 늘 순리가 아닌 역리로 사용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4f) 앞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지으시는 것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고 창조의 역사에서 기뻐하셨던 사실을 증거한 바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모두 6번이나 쓰이고 마지막에는 그냥 좋았더라에서 끝나지 않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나님의 감격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사람이 범죄한 후에는 끔찍한 약육강식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는 안타까운 장애요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확신이다. 여기서 확인은 어느 것도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선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런 모든 선한 것들이 일그러지게 된 것이 죄라는 도식을 계산해 보면서도 죄의 비극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사야를 통한 예언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는 언약이다. 우리가 동물의 왕국을 보더라도 짐승들이 다른 동물을 잡아 피를 흘리며 먹는 것을 보고 있으면 결코 유쾌하지 못함을 경험하곤 한다. 그럼에도 모든 만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회복되어 최종적으로는 처음 태초의 창조보다 더 완벽하게 회복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4f)라는 확신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거듭난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우리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선하심을 키워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4f)가 계속 선하심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제는 불평하고 참소하는 어둠의 습성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b) 한 것처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거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코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는 유용한 삶이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와 선을 순종하려는 우리가 역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나, 감사함으로 받으면이라는 이유로 선하게 지으신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버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조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가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마지막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 식물은 어떤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거룩하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한 대로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라는 조건에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탄식하고 있는 자연 세계조차도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8:21)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남녀의 결혼의 문제이든지 활동을 위한 음식물의 먹고 마심 이든지 그런 일상의 삶이 분명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선하신 삶이 되기 위해서나 감사함으로 받는 삶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삶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믿음의 삶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는 것으로 말씀과 기도생활은 점점 경건에 나아가는 거룩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소지는 어떤 음식이 부정한 것인데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당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하는 거룩한 삶이 된다면 그것을 위한 에너지를 위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 행위 자체가 선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거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글을 쓰고 있는 1세기가 되었든지 주님께서 재림을 예언하신 징조들이 자주 나타나는 이 역사의 종말이 되었든지 너무 신령 하려는 유혹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와 함께 선하신 진리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어 양심이 마귀의 화인을 맞게 되고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떨어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선하게 지으신 것들조차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한 바울의 고백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f)라 하였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b) 하였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는 당부처럼 이제는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될 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선하신 주님의 뜻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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