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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3:14~16 2024-10-13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자의 자격을 논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기 전에 이 교회의 올바른 조직과 운용을 바르게 감당하도록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는 이유를 증거하면서 이 교회는 세상의 어떤 기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사람을 위하거나 세상의 법과 방법에 의해 운용되어서는 안됨을 당부한다. 사실 현재의 말씀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교회들은 이 부분에 마음을 두고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살펴야 할 것이다.

또 바울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론이 여러 곳에 기록되고 있지만 어느 서신의 기록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나 구속의 과정을 가장 잘 기록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찬송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역시 이렇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역사 속에 오셔서 완벽한 죄인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데 역시 그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막연한 표현 같지만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운용되는 교회는 다른 모든 우상이나 종교와 다르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과 기둥삼은 거룩한 공동체요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이 우주의 창조자요 운행자 이시면서 제한받는 이 역사에 보이는 사람으로 오셔서 죄인을 위해 하신 구속의 역사를 인하여 천사들에게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상고하도록 하자.



Ⅰ.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14~15)

먼저는 에베소 교회에 디모데를 두고 자신은 사역을 위하여 다른 곳에 있지만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보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경우들에 성령의 지도를 풍성히 누리는 바울 자신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지만 그의 지도를 받고 있는 디모데나 또 디도에게 어떤 교회들의 일들은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은 권위의 문제에서도 바울과 디모데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14) 하는데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든지 아데미신전이 위치해 있고 우상숭배가 적지 않은 에베소의 교회를 위하여 돌아가는 것을 서두르는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지만 나중 사도행전 20장에 보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신앙적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후에도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장로들이나 집사들을 세우는 자격들이나 다른 중요한 신앙적 문제들을 잘 감당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14b) 앞에까지 기록한 당부들은 물론 연이어지는 4~6장까지의 교회의 섬김에 관한 가르침들이고 이것이 직접 말로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글로 써 보내졌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신앙의 중요한 지침이 되게 하신 것도 분명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만약에 디모데를 옆에 두고 일대 일로 가르쳤다면 분명 디모데에게는 더 효과적인 교훈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을 불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대의 교회들을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셨을 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니 오늘날 이렇게 분명한 기록이 주어졌음에도 교회의 중요한 조직이나 운용이 말씀을 많이 벗어나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은데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더 심하지 않았겠는 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진리를 어기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법이 주어지건 그렇지 않건 다르지 않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뒤에서 약간 비슷한 당부를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4:13)는 부탁도 보는데 영적인 지도는 단지 기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다할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편지를 쓰느냐 하는 이유는 분명히 디모데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이나 부탁이 아니라 지금 디모데가 감당하고 있는 일들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시행하신 구원의 역사로 완성된 귀중한 기관인 교회에서의 일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15) 여기에서부터는 바울 사도가 교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신앙적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고백이면서 같은 믿음을 가진 오늘 우리 모두의 교회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이유야 무엇이든지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이 에베소에 돌아가는 것이 늦어질 수 있다는 가정아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바울 자신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지금 어느 곳에 있든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성경을 좀 읽고 아는 사람들은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도둑질한 다음에 두려움으로 외삼촌에게 도망가는 가운데 한 곳에 이르러 돌을 베게 삼고 자다가 꿈 속에 하나님의 천사들의 하늘에서부터 오르내림을 보고 그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사실을 창세기28:10~에서 보고 알지만 그것이 곧 교회의 상징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복음이 들어가 영적으로는 마치 황야와 같던 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전을 삼으시는 것이나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과 그의 보혈로 거듭난 같은 지체들과 함께 모이는 곳이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특히 그 모임 속에서 각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조심하는 일도 흔하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무엇을 하려고 모였다면 우리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신 것을 보더라도 사람만의 모임이 아닌 까닭에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아야 하고 더욱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교회에 모일 때는 더욱 영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임이 되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모일 때는 더욱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어떻게 행할까 조심하는 신앙의 자세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지혜의 왕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솔로몬은 세상의 왕 앞에서도 조심할 것을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전8:3)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만왕의 왕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경계하는 교훈일 것이다. 대부분 신앙적인 모임인 교회에 모이면서도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너무 치중하는 자세는 이어지는 말씀으로도 경계되어야만 한다.

이제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한 것이다. OT의 예레미야는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10:10)라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의식할 것을 당부한다. 또 이런 이유에서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지 말아야 함도 경계한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렘23:36)

무엇보다도 이렇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확인하는 것은 당시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소아시아의 특성을 마음에 두고 그런 사람이 만들어서 세워두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람이 움직여 줘야 옮겨지는 것이 가능한 우상은 복을 주거나 재앙을 끼칠 수도 없는 존재들과 달리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성전임을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6:16) 하였다.

하나님 앞에 모이면서 그 가운데 두루 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우한다면 마치 부모를 뒤에 돌려 두고 불평원망을 하는 것 보다도 더 형벌을 받을 옳지 못한 행동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고 한 집의 구조를 간략하게 증거하는데 “…하나님의 집에서…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건물을 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2가지이다. 그것이 첫째는 터[ἑδραίωμα, 기반, 토대 ← (ἑδραῖος, 확고부동한, 견고한, 요동치 않는, 안정된)]이고 그 다음은 기둥[στύλος, 기둥, 지주(支柱)]이다. 이 구조의 중요성은 건축 양식이 바뀐 지금에도 다를 수 없다. 즉, 목조 건물이든 철골 건물이건 콘크리트 건물이건 차이가 없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탕이나 기둥 모두가 진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말하는 진리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이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f)라고 하신 그 참을 의미하는 진리와 꼭 같은 “ἀλήθεια”가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아는 대로는 진리는 하나님 외에는 어디에서도 나올 수 없는 불변하는 “참”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변하는 것과는 상대되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워져야 하고 지켜져야 하고 운영되어야만 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다.

바탕도 기둥도 진리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럴싸한 어떤 이론도 방법도 여기에는 소용이 없다. 오직 진리위에 진리로만 세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 밖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로 다스려져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이런 이유에서 세상에서 발생한 많은 다른 종교와는 다른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이요 귀한 기관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성별과 구별을 생각해야만 한다.



Ⅱ. 구속의 신비(16)

이 v16은 진리가 바탕이 되고 기둥이 된 교회가 죄악의 인간 세상에 어떻게 세워졌는가 하는 귀중한 구속의 이치를 증거하는 것이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이 엄청난 은혜를 사람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의 신비를 증거하고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앞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던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완전히는 불가능한 하나님께서 지상에 두신 신비의 원인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경건[εὐσέβεια,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있을 수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은혜이면서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진 믿음 자체가 사람에게서 발생할 수 없는 신비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이라 하였다.

또,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는 신앙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다는 데서 비밀이다. 아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신비요 표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짐승의 우릿간에 나셨지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2) 하였다.

사실 구속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그저 한 종교의 선지자나 창시자에 불과한 것은 1세기에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밀[μυστήριον]”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나 디모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비밀일 수밖에 없다. 만약에 자신 속에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로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데서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감격하는 것이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여기서부터 각각 6문장의 찬송시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한 구속의 과정을 증거하는 데서 빌립보서2:6~11의 기록과 다르지 않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의 역사를 감격하는데 있어서는 로마서11장 말미의 (33~36)의 찬양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빌립보서2:6~7에 나타나는 대로 근본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고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셨다. 어쩌면 이 일이야 말로 주님께는 가장 큰 고통 이셨을 것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적이신 분이 결국 제한받는 육신을 입으신 것 자체가 큰 고난이었을 것이라는 이해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님이 가장 고통받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신 것도 그렇지만 처음 낮아지신 사람 되심이 그보다 더 큰 고난이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이것은 단순한 육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을 제압하는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신 것에서 단순한 육신의 저주를 끝낸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라고 육으로 살아남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혼의 저주를 마무리하시는 사죄를 이루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는 과거에서부터 영원에까지 영육에 이루신 사죄의 은총을 증거하는 것이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과정을 통해 영계를 바로잡으시려는 의도였겠지만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가브리엘에 의해 마리아에게 증거되고(눅1:26~38) 탄생의 때(눅2:8~20)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험당하심의 때(마4:11)는 물론 부활(마28:5~7; 요20:12~13)에서나 승천의 과정에서(행1:10~11)까지 천사들이 함께함으로 영계의 존재들에게도 증거되신 것이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2b)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로마서9~11장에 메시야를 기대하며 때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온 인류를 위해서 뒤로 미뤄지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언약이 이루어져서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까지 복음은 전파되었고 지금도 땅끝을 향하여 허락하신 모든 방법을 통하여 증거되고 믿어지고 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을지라도 근본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던 속성은 남아 있어서 복음을 듣기 전에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자연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왜곡된 종교형태를 가지고 있다가 복음이 전파되자 그것을 받아들였고 사실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닌 오늘 나에게 이 복음이 믿어졌다는 사실이야 말로 가장 감사할 신앙적 확신이고 고백이다.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엄청난 고난을 감수하여 인류구원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빌립보서2:9~11에 보는 대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높임을 받아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뿐 아니라 모든 영육의 피조물들에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입히셔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입으로 주님이라 인정하도록 하여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으로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신 것이다.

그렇게 본래 영광의 자리로 복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정된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초라한 짐승의 우릿간의 구유에 누이신 연약함이 아니라 최고의 심판주로 오셔서 자신이 이 역사 속에 오셔서 이루신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외면하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을 거역한 일련의 불순종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무저갱에 가두시고 구속으로 얻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들어 가는 것으로 회복하실 것이다.



Ⅲ. 결론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불교나 흰두교나 무슬렘교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도 전혀 다름이 없는 종교의 한 부류로 생각할 뿐이지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거룩한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 속에 세상에서 가장 신비하고 귀중한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우상 앞에도 존귀를 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기관일뿐만 아니라 그 교회는 구조와 조직이 세상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바뀔 수 없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이뤄지고 세워졌으며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신령한 기관임을 감격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라고 고백하고 구속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과정과정을 감격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완성하신 십자가 중심의 은혜뿐만 아니라 이 땅에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기 위하여 각자가 입은 그리스도를 성결하고 거룩하게 지켜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