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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후 1:7~12 2024-06-30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당하던 모든 성도들에게는 그 동안의 체증이 해소될 정도의 영화를 약속하시는 반면에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악함과 오히려 성도를 핍박했던 것에 대한 형벌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의 주 내용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기서도 세상 속에서 불러 내시고 구별하여 약속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물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먼저이고 그 영광을 이루는 것도 사람의 어떤 방법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와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의 예정과 그것을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기도 속에서도 고백한다. 오늘은 순서를 따르기 보다는 연관된 내용 중심으로 상고하도록 하겠다.



Ⅰ. 놀랍게 여기게 될 것이다(7, 10)

오늘 첫 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7b) 라는 선언은 지난 시간의 v6에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것이면서 믿음의 사람들의 핍박과 환란의 종말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여기 또 한번 영광의 임재를 공포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비록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불이익과 안타까움을 경험했을 것이지만 복음이 완성된 후부터 그것을 믿고 산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믿음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주님께서 이 땅에 가지고 오실 영광을 생각한다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는 바울의 격려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오히려 이 마지막을 기대할 것을 격려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행여 지금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며 안타까워하는 지체가 있는가? 그것이 진정 믿음 때문이고 주님 때문이라면 주님 다시 오심을 기대하거나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비교될 수 없는 영광과 존귀로 갚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졌던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는 실제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우리가 같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겪는 신앙적 자세를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결정하는데 사실적인 도움을 끼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거나 ‘저런 모습이라면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까!’라는 다른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환란에 대한 자세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앞에서 베드로전서4:13을 인용한 바 있지만 다시 v14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함으로써 혼자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심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의 사람들의 보상 받을 때를 주님의 재림의 때로 확실하게 공표하고 있다. 앞의 전서에서도 이미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f)라고 증거했던 것처럼 v7b “…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영광을 돌려주시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연결되어지는 말씀은 불신의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형벌의 내용이기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연결되는 v10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자.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0)

먼저 재림의 날인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인데 메시아의 재림의 날은 OT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내용이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2:11, 17) 앞의 v6의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했던 내용과 함께 이 v10의 내용이 함께 선언되고 있음이 신기하다. 다만 “그 날”에 대한 예언은 성경이 완벽하게 감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10m) 여기 “그의 성도들”에게나 “모든 믿는 자들”은 물론 다르지 않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우리 번역에 나타나지 않은 한가지 표현은 옥중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ἐν(안에) Χριστῷ 라는 표현과 같이 여기에는 “성도[ἐν ἅγιος] 안에” “믿는 자[ἐν πιστός] 안에”라고 하여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먼저는 믿음의 백성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게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묘사하면 그를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영광을 반사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평상시에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성도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덧붙여지는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0b)는 내용이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귀중한 신앙적 고백이 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구원을 이루신 역사가 사람에게 믿어지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기적이 분명하고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만져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들이 누구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믿어지는 것이 기적이다. 감사하지 않은가!

신비감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나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재림하셨을 때에는 더욱 감격하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2천년 전의 시간은 물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관습도 다를 뿐 아니라 전혀 만나보지 못했던 이 복음의 신비가 오늘 우리 속에 확신 되었다는 것 자체가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함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역사의 결과임을 오늘의 시간 속에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다시 오시는 우리 주님 앞에서 더 큰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0) 이 말씀을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적용한다면 감격이 더 클 것이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김종엽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김종엽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김종엽에게 믿어졌음이라)” 우리가 바른 믿음을 지켜 간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산다면 이 고백은 바로 나를 위한 고백이 될 것이다.



Ⅱ. 형벌의 시작이 되는 사람들(8~9)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들고 섬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놀라운 감격과 환희와 영광이 되겠지만 창세전부터 마련하시고 수 천년에 걸쳐서 이루신 이 귀한 구원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안타까움이 될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8) 주님께서 마지막에 오셔서 형벌을 내리실 사람들을 먼저 거론하고 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인데 앞의 데살로니가전서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라는 경계를 준 바 있는데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여기 표현된 대로 무조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형벌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하신 것처럼, 옳고 그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지 않고는 판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확신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의 내용에 쓰여진 대로는 이어지는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과[καί, 그리고, ~와, 즉]” 접속사가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결국 이 사람들은 두 종류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데살로니가를 비롯해서 유대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 이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그 복음을 순종하여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로 남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불신자로 남느냐 하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전혀 복음을 듣지 못해서 이방인으로 남은 사람들에게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공의의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복음을 듣고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는 완악함에는 형벌 밖에는 대가가 없을 것은 당연하다. 이런 입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한 경고를 주고 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2:3)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9) 바로 앞 v8의 사람들에게 임할 형벌을 확인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 “주의 얼굴”은 OT에서조차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민6:25~26)하여 은혜와 평강을 의미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긍휼이나 보호를 누리지 못하는 가련한 인생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우리 주님의 힘의 영광”은 우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하기도 하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없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다. 특히, 이 역사의 마지막에 이런 비극을 당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소망도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있음에 충분한 감사를 누릴 수 있다.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9b) 한 것이다. 은혜와 사랑의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어둠의 인생들에게 남는 것은 분명히 빛과 진리의 반대편이기 때문에 저주와 형벌 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7)

아무리 육신적으로 성공하고 이름을 내고 성공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반대편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두려운 결과만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극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이 더욱 안타까운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비록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고 어려움을 감수했을 지라도 그러한 인생들에게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은 온전한 영광의 시작이 되어 영원에 이를 것이다.



Ⅲ. 주님께 영광, 우리에게 영광(11~12)

이제 앞에서 말해온 신앙의 논리와 과제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다. 먼저 “이러므로[εἰς ὃ]”는 골로새서1:29에서는 “이를 위하여”라는 같은 표현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v5~10의 내용을 두고 결론적이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한 시작의 의미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10f) 마치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하는 고백과 같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시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골1:9f) 언제나 어느 교회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가지고 나가는 신앙의 사람 바울의 자세를 보는 것이다. 앞의 5:16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실제적인 모범이다. 그런 다음 구하는 내용들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 첫째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11m) 한 국가의 높은 지위의 권세자에게 부름만 받아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자요 구세주로부터 부르심 받은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부르심이 처음에는 일반적인 것이고 거기에 응답한 사람들에게는 비로소 구체적인 부르심의 효과 즉, 신령한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1:18)인가를 알게 해달라고 역시 기도한다.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시작일 뿐이고 더 바람직한 것은 구원을 위하여 어두움과 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면 사람의 소원보다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는 복음에 합당한 자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복한다!”

다음으로 기도의 제목은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b)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완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요청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인류 모두의 소원이지만 자연적인 사람에게 서는 선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로 당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사람은 선이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위로부터 다시 날 필요가 있다(요3:3, 5). 그런 진정한 사랑의 사람만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라는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b) 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했던 것 중 하나가 역사하는 믿음이었었다(살전1:3). 그러나 이미 행한 믿음의 역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하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한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주도되어야지 사람만의 각오나 노력은 별 의미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수고하고 애쓰는 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2) 성도나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이다.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교회나 성도여야 그 교회나 성도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 반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 역시 사람의 계획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역시 육신으로 난 자연인에게서 영광은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들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그동안 쌓았던 영광을 잃고 마는 것들을 더러 본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12f) 하나님의 은혜 즉,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정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함을 가르치고 그 목표가 바로 될 때 역시 그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사람들에게도 영광이 됨을 바울 사도의 기도중에 배우게 된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12m) 앞에서는 은혜의 과정과 통로를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라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직함이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 말씀하신 바 있으시고 이 v12을 시작하면서도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라고 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하나는 역시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15:5) 하신 원리를 여기에서도 보게 되는데 그것이 개인이 아닌 “너희 가운데”하신 것으로 교회 지체 간의 통일성을 말씀하심으로 하나된 교회 속에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음을 지적하고 계시다.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2b)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구별된 삶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결과적으로 또한 성도들 역시 주님안에서 주와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하여 세상 속에서는 대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으로 인한 손해나 환란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당한 모든 불이익은 불신의 사람들은 절망할 우리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당한 것과 비교되지 않을 영광으로 갚으실 것이다. 그 때 오히려 우리가 믿어서 그런 상급을 받음이 신기하게 여겨질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며 하나님의 진리를 비웃던 사람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어두움에 쫓겨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우리의 기대와 바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복음으로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든 선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우리도 그 영광의 광채에 참여하도록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