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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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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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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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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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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서는 새로 세워진 교회에 최고의 사랑을 담아 보낸 편지들이고, 같은 박해를 당하고 있음에 격려하고 다같이 재림 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전서를 보낸 후 그 편지에 답해 온 내용에 다시 쓴 답변으로 전서를 기록한 장소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서두에 주는 인사를 봐도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이라고 하여 꼭 같은 인물들이 보내는 것으로 봐서 전서를 보낸 후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들을 본 때 전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시에 양서 간에는 차이도 확실한데 ①편지를 읽는 감정에서 전서가 애정이 넘치는 어버이의 말투인 것에 비하면 후서는 엄격한 교훈형태이다. ②재림에 관하여 전서는 갑자기 도적처럼 그 날이 임한다는데 비해, 후서에는 그 전에 있을 배교적 사실들을 들어서 전서와 같은 급박감을 가라앉히고 있다. ③그 재림의 가르침의 형태가 전서는 일반적인데 비해, 후서는 상당히 유대적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본 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의 유대인 지체들에게 보냈다는 이론까지 제기되기도 한다.
모두 3장으로 되어 있는 이 후서도 서론과 감사를 담고 있는 1장과 재림의 교훈을 다루는 2장과 이러한 교훈들을 전제로 실제적인 삶을 당부하는 3장으로 나눠져 있다. 오늘부터 다루는 1장은 문안과 감사 그리고 기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편의상 두부분으로 나눠서 상고하려고 한다.
때로는 아프게 책망하는 바울을 통한 메시지들에 안일한 상태의 믿음의 자리에서 다시 우리의 믿음으로 갈 앞길을 확인하고 경성하여 지속적으로 이런 교훈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신앙의 삶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특별한 결론을 말하지 않겠다.
Ⅰ. 인사와 축복(1~2)
인사는 전서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전서1:1의 내용이 더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1:1) 어쩌면 전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했었던 반면에 여기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하여 가운데 “우리”를 더하여 친밀감을 한결 더한 것 같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1)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은 역시 데살로니가에 익숙한 세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고 발생된 문제에 함께 개입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이다. 어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마치 안디옥에서 율법과 할례문제로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대표를 뽑아 문제를 가져가는 그런 좀더 공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익숙하고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권면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도 이 데살로니가전, 후서에서는 다른 바울 서신들의 일반적인 사도권에 대한 권위를 서두에서도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있다. 다른 여러 교회에서는 물론 바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였겠지만 나중 사도의 계열에 더해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문제는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1b) 나중 바울이 철학의 토론장이라고 하는 아테네에서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17:16) 한 것처럼 안디옥을 포함한 소아시아도 그렇지만 이 마케도니아나 아가야 유럽지역에도 의외로 우상 숭배가 많았고 그런 허황되고 어리석은 사람들과 문화 속에 저들이 선택되어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다는 자긍심을 주기 위해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일반적인 서신의 양식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적어도 두가지 정도의 의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우상이나 헛된 신들로부터도 인생에 가장 필요로 하는 “은혜와 평강”은 거저 얻을 수 없었다. 제물을 바치고 여러가지 방법들로 그들의 신들로부터 진노를 면할 수 있다는 이론은 있었지만 어떤 것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큼 인류에게 값없이 사죄의 은총을 주신 대상은 역사 속에 없었다.
본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절대적인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진노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사실 화평 즉, 평강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택받았다는 히브리 인들이 “샬롬[שָׁלוֹם]”을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사실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가능함을 몰랐다. 성경을 접하는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지 못해서 잘못 오해했고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은 바른 진리나 교훈을 접할 수 없어서 어리석은 짓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는 약속이 확인되고 어떤 선행이나 참선이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라는 거저 주시는 선물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의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라는 권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신 평강과 화해를 하나님과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복주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누리는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같은 복음과 믿음으로 축복한다. 우리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다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처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진리를 전하여 함께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Ⅱ. 감사(3~4)
데살로니가 교회의 안타까운 상황에 처방으로 쓰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전, 후서의 안부후의 내용은 감사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 일행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 복이다. 1:2에서도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고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시작이 마찬 가지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3f)라고 고백한다. 물론 여기에 교회에 하나같이 귀중한 역할을 했던 세사람의 기도나 바람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라는 표현이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항상 감사하는 이유를 증거한다.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3b) 먼저는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데 그 당연함의 이유를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①“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전서 1:3는 좀더 넓게 칭찬한 바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신앙의 세 기둥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면 후서에서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저들의 “믿음이 더욱 자랐”다고 격려한다.
사실 신앙의 지도자들이야 자신의 역할에 가장 기쁨을 느끼고 감사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자라는 것 이상이 없을 것이다. ②“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라고 역시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기둥에서 사랑의 수고는 더욱 풍성해졌고 여기의 범위는 “다, 각기, 서로”로 넓혀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실 앞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드렸던 기도의 응답이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3:12)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랑의 넘침은 그 교회에 이루어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기도의 응답이라는 이중적인 감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신앙의 세 기둥을 언급한 바 있지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만 최선을 다해 실천한다면 소망의 인내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신비한 믿음의 공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없이는 소망의 인내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인데 핍박과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이 이렇게 믿음과 사랑을 실천함으로 당연히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안타까운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거기에 따른 감격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4) 여기 중심은 같은 형태를 두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즉, 견딤과 인내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소망과 관련되면서 성령의 열매로서는 “오래 참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삶 속에서 확인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너희가 견디고” 라거나 “너희 인내”와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 “인내[ὑπομονή, 견고히 섬]”란 압력을 견디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확실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신앙안에서의 인내이고 각자가 이렇게 인내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세상의 어떤 압력이나 마귀의 간교한 술책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든든히 버티는 기둥역할을 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런 신앙적 자세를 바울이 칭찬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4)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확실한 믿음을 증거하는 교회들에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런 신앙적 자세를 스스로 자랑한다고 증거한다. 이러한 자랑은 단순히 자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다른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동족들과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환란 중에서도 믿음이 더욱 자라고 지체들 간에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과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견디고 인내와 믿음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자랑을 한다는 고백이다. 이들의 이런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가 2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의 교회에게도 이 메시지를 통해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오히려 믿음이 더욱 자라고 지체들 간에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했다면 우리의 형편은 분명히 그들보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좋은데 우리의 안일함을 깨어나게 하는 저들의 도전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이 이모저모로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이 때에 이런 모범 된 교회의 말없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때에 진리를 지키려는 교회가 부족함에도 그래도 우리 교회를 인해서 감사하는 것은 어두워가는 이 역사 속에서 진리를 회복하겠다고 모든 신앙의 과제들을 성경말씀으로 되돌아 가겠다고 교회의 이름조차도 그리스도의교회로 내건 대부분의 교회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가운데서도 진리를 고수하겠다는 작은 우리의 자세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선교적 과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북한을 향한 메시지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임을 확신하고 이런 칭찬 듣는 산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도전을 함께 시도하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
우리는 누구며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같이 십자가의 복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인하여 감사하기까지 이 안일한 시대에 믿음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로 남아야 할 것이다.
Ⅲ. 그 나라를 위하여(5~6)
이제 지금까지 감사하며 칭찬해온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과 삶을 좋은 모델로 증거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그렇지 못한 신앙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내용을 ~v10까지 증거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런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전진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이 서론인 1장이 마무리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하고 세상은 점점 악해 가는 현실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현재 참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시행될 것인가에 라는 회의감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상황에서 올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믿음으로 인한 고난이 그런 의롭지 못한 어두움이 형벌 당할 증거라는 논리로 격려를 주고 있다. 참으로 의로운 심판이 없다면 과연 박해와 환난을 견디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며 선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있을 것인가라는 의심을 진리를 행함으로 핍박당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불의한 지금의 세상 속에서 악에 대한 징벌이 없는데 의를 행하며 살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심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계속 의롭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답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OT의 합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바 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1:2~4)
그럼에도 이 선지자가 얻은 결론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였고 바울이나 NT의 서신들에서 이 말씀은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롬1:17; 갈3:11; 히10:38). 그리고 그 믿음을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의로운 신앙적 삶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심판의 표”가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5:22에서 예수님은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행하지 않으셨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합리화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핑계치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특히 여기 “심판의 표[ἔνδειγμα, 나타난 표시, 증거]”라는 의미이므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의를 행하며 살 수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증거가 그 옆에서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형벌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5m) 칭찬을 받고 있는 내용 치고는 상당히 수동적인 묘사이다. 사람의 노력과 애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죄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고난은 따라올 수밖에 없음을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5b) 증거하지만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으로 과거에서부터 지속되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바울이나 사도들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안에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도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것임을 증거하신 바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베드로 사도 역시 이러한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임을 말하면서 격려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이러한 믿음을 인한 고난에는 최종적으로는 영광이 있을 것임도 확인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들어 다시한번 확신을 주고 있는데 지금 범죄하는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이라는 확인이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6) 이제 다음 시간에 나눌 내용에 연결되지만 반드시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보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심을 다음절까지 증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결국 고난으로 갚으시겠다는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과 이 역사의 말미에 어둠의 종들이 당할 환란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지체들의 세상과 구별됨 이 불의한 사람들에게 심판의 표로 하나님 나라에는 합당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나중에 영광으로 갚으실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기까지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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