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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4:13~18 2024-05-19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신앙적 자세에는 전혀 나무랄 것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현재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순종하는 자들을 영원한 영광에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심에 대한 지나친 오해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데살로니가서의 주제를 재림 즉,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시작부터 말한 바 있고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부터 이 신앙적 과제를 증거한 바 있고 앞에서도 계속 주지시켜 온 것으로 나타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10)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대하는 신앙적 과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2:19) 이러한 재림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면 바로 그 마지막 순간까지 구별된 삶으로 허물없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면도 있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13)

그러므로 어찌 보면 오늘부터 다루어지는 과제들이 이 데살로니가서의 중심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고 이러한 교훈은 ~5:11에까지 연결되고 이런 가르침을 주었음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서 후서에 더 강하게 지적되고 있다고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의 최종적인 신앙의 목표는 오늘도 여전히 마지막 영광의 약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사죄를 위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의롭다 함을 위하여 부활하신 사실을 로마서4:25에서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확인하시지만 그 은총을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때까지 지켜가지 못하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미 OT에서부터 오히려 경계의 교훈을 주고 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5:18) 이제는 모든 고통과 안타까움을 갚아 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고 있는데 준비치 못하고 그 날을 맞는다면 그 날이 절망의 어두움이 될 것을 경계하는 교훈이다.

이미 우리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이나 부활의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부터 또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서도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다루어진 내용이다. 오늘 읽은 내용은 신앙을 하다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에 어떻게 될 것이며 현재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게 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그 때나 이 때나 그곳 유럽에서나 오늘 이곳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로 죽어 있든 살아 있든 그 영광의 순간에 반드시 주님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Ⅰ. 자는 자들에 관한 이해(13~14)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신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또 혼란해하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하고 신비한 믿음의 이론을 시작하면서 애정 어린 말투로 부르는 표현이 “형제들아!”로 저들의 어려움을 기꺼이 해결해주려는 사랑과 격려가 담긴 바울 사도 다운 표현이다. 물론 여기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주님의 재림 때에 있게 될 신비를 이해하게 하여 저들의 안타까움을 해결해 주려는 것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13f) 성경에서는 죽은 자들을 “잠잔다”고 하는 표현을 OT에서부터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1세기의 헬라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 우리의 문화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영면”이라는 말과도 비슷한 표현이지만 그 의미하는 내용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

“잠잔다”라고 하는 것은 다시 깨어날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철학이나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이런 기대를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 말 그대로 영원히 다시 깨어날 가능성이 없는 죽음의 상태(永眠)를 묘사하는 것인 반면에 성경이 가르치는 “잠잔다”는 의미는 영적인 부분이 깊이 감춰져 있는 OT에서부터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라는 표현은 복음 속에 있게 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사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면 잠자리에 들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에서 조차도 다시 깨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죽음에도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죽음의 절망을 친히 십자가에 감당하신 우리 주님의 속죄의 은혜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바르게 알기만 하여도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램으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런 귀중한 이치들을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확신하는 믿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활의 사실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신령한 것들에 무지(無知)하지 않기를 원하는 데서 비슷한 표현들을 몇몇 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롬11:25)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12:1)라는 표현들이다.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b) 결국 믿음 없는 불신자들처럼 죽음이 영원히 끝나버리는 이별로 이해하여 안타까워하고 탄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같은 믿음을 지킨다면 깨어나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15:51)

사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것은 아침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건강치 못한 상태로 세상을 먼저 떠난 성도들도 부활에서는 완전히 치료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더욱 기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14f) 앞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표현할 때는 “자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오히려 “예수께서 죽으셨다” 라고 표현하는 것도 의미가 다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당하신 사실적인 죽음이시기 때문에 특히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라는 확신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b) 여기 사용되는 두 가지의 표현이 중요하다.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즉, 생명의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한다면 비록 현재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의 우리의 운명은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과거는 죽음에 삼켜졌던 죄의 사람들이 이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 다시 부활에 하나가 된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에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 된다. 이제는 자신이 친히 죽음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향하여 호령하시고 오히려 죄와 죽음을 완전히 절망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아침을 기대하며 슬픔이 아니라 소망과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Ⅱ.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15)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자들과 현재 믿음으로 살고 있는 자신들이 마지막의 순간에 어떤 모습일 까가 궁금했고 디모데를 통하여 바울에게 이 사실을 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저들의 궁금증은 어쩌면 단순히 이미 죽어 있는 자들의 상태의 궁금한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실 때 어떤 형편이 될 것인가도 염려되었던 것을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저들의 이러한 질문이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도 확신을 주게 된 것도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가 되었다. 어쩌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난 믿음의 선배들도 중요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는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과연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더 실제적인 과제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15f) 당시의 철학적 사상이나 세속적인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어 믿음을 가진 확신으로 증거하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실 때부터 자신의 영광의 심판 주로 오실 것과 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신 부분들은 마태복음24~25장을 비롯하여 복음서들에 더러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다는 데서 우리는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한 저들의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이런 신앙적 이론에 무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사의 교회속에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고린도나 기타 교회들을 통해서 이미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앞에서 바울의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13m) 했던 것처럼 믿음의 어떤 부분이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로 준비된 것이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b) 이미 앞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의 순간에 깨워서 주님께서 데리고 오시리라 하였지만 뒤에 연결되어지는 가르침으로 볼 때 당시에 육신적으로 살아있는 모든 자들 역시 함께 영광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죽어 있는 자들보다 앞설 수 없는 것은 조건이나 형편에서 나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믿음의 사람들의 조건은 먼저 죽어 있던,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건 그것이 차이가 되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죽어 있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살아 있는 자들의 경건도 오직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야 할 것을 권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다 영광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가 제외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강림하실 때(16~18)

우주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임하시는 영광의 순간을 묘사하지만 역시 땅의 이해를 가진 한계로 표현할 수 있는 대로만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이해의 한계를 가진 세상의 표현이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신비한 이해나 가벼운 이해도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후5:6)라는 아쉬움을 표현했던 것처럼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죽어 있는 몸이든지 육신으로 살아 있는 몸이든지 주님 안에 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실감하지 못했던 임마누엘이 실제적으로 바뀌는 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참으로 영화로운 순간이 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16f) 주님의 재림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 독특한 것은 3가지의 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하나의 소리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①호령[κέλευμα, 부르는 소리, 외침 신호, 명령,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하는 호령]과” 이것이 소리들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②“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③“하나님의 나팔 소리” 생각만 해도 위엄차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천사들을 명령하시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는 “친히” 나타나시고 그동안 하늘의 보좌우편에 계시던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라고 하여 오순절날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21) 했던 것처럼 이제는 때가 찼을 때 그 계시던 하나님 우편에서 친히 내려오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16b) 이 말씀도 요한계시록 20장의 말씀과 더불어 지나치게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구원 얻을 첫째부활과 사실상 멸망을 의미하는 둘째부활을 이 말씀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요지는 현재 육신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죽어 있던 성도들 보다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는데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가르침일 뿐이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염려했던 주님 오시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자들에 대한 걱정은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맡겨두고 아직 살아 있는 오늘의 각자의 신앙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17f)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마치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하늘로 점점 멀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0b~11)는 신비한 체험을 누가는 기록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만인이 그를 보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을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사람까지도 영광스럽게 오시는 주님을 보고 탄식할 것에 대한 기록이 OT 스가랴서에 까지 기록되고 있고(슥12:10) 요한계시록에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세상에서 온 갓 불이익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헌신의 대가를 받게 되는 영광의 순간이 되겠지만 복음을 순종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움과 슬픔의 탄식의 때가 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2) 바울이 부활을 찬양한 이 기록에서도 믿음 안에 죽은 자들과 복음 속에 있던 자들의 변화의 신비를 증거하고 있다. 죽은 자들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의 변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또, “우리도 변화되리라”는 순간의 역사는 또 어떤 것일까? 믿음의 사람들의 신비한 경험의 기대는 모두가 바래도 좋은 약속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b)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죽어 있었든지 살아 있었든지 이제 그렇게 영화롭게 만난 예수 그리스도와는 이제는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실제적인 임마누엘이 되어서 죄와는 관련이 없고 상함도 해함도 없는 주님의 영광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복음을 순종했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이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격려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는 도전이다. 물론 여기에 “이러한 말로”는 앞에서 바울이 거론한 재림의 역사를 표현한 여러가지 교훈들을 의미할 것이다. 불신의 사람들은 죽음의 뒤에는 절망 밖에 나눌 이야기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 뒤의 약속까지 서로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 역시 믿음 안에서만 누리는 감격이며 특권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6:9~10)라는 호소를 본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11) 답변하신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약속의 확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은 육신 속에 갇혀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버린다. 그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의 것으로 믿기만 한다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실적인 생명의 변화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부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이 재림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복음 속에서 이 사실을 제외한다면 땅에서 생긴 종교와 하등에 다를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죽었던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공중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만나는 이 역사야 말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라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