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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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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3: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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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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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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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와 일들에서 최종적으로 감사를 드려야 할 대상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원인과 결과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의 제목은 마치 시편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내용과 같다.
오늘 본문은 길지 않은 말씀이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두 바람직한 밝은 빛에서 나오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기쁨, 감사, 보답, 사랑, 넘치게, 거룩” 믿음에서 나오는 밝고 긍정적인 표현들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최상급의 표현들 역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비록 짧은 기간에 박해를 겪으면서도 바람직한 신앙의 상태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감사를 시작으로 1장,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전도할 때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감사했고 2장, 다시 염려하여 디모데를 모냈는데 돌아와 긍정적인 보고를 인해 감사했던 내용이 오늘 ~v10까지였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실적인 역사를 인하여 감사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오늘 내용의 나머지 부분이다. 이렇게 박해와 어려움으로 세워진 교회는 그 희생과 헌신의 수고만큼 기쁨도 주고 있음을 사실적으로 보면서 오늘 같은 우리의 헌신을 불러 일으키는 말씀이기도 하다.
오늘 내용이 기도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바울 서신들 중에서 기도가 많은 것 또한 데살로니가서의 특징으로 꼽힌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5:17) 당부하였고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5:23)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후1: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후2:16~17)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후3:5)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후3:16) 우리도 이런 쉬지 않는 기도와 함께 최고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감사를 …
Ⅰ. 감사는 기쁨의 열매(8~9)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걱정하며 마음 졸이던 바울은 디모데를 통한 저들의 믿음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힘겹게 마음 쓰며 저들을 염려하던 그 안타까움을 이제는 한시름 놓게 되어 데살로니가 교회의 안정과 자신들의 힘겨움을 내려 놓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크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 여기서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는 관계를 그대로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이 “너희가, 우리가”라는 표현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짧은 한 마디이지만 그만큼 간절한 고백을 하고 있음을 듣는 것 같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저들의 믿음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먼저는 “굳게 선즉[στήκω, 서다, 서있다, 확고히 서다, 버티다, 굳게 서다]”라는 표현이다.
요동치 않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음에 있어서 마치 지진에 내진설계가 잘 된 건물을 의미하는 것 같은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는 당부를 준 바 있고 율법주의에 요동하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당부한 것과 같다.
그러나 튼튼히 선 것의 바탕이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는 그 튼튼히 서야 할 바탕은 “주 안에”이다. 옥중서신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와 꼭 같은 표현이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워야 할 견고한 터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한 것처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워져야 만한다.
갈라디아 교회처럼 율법주의의 터 위에 새 언약의 법으로 주신 복음은 세워질 수 없고 아테네와 같은 철학의 바탕위에나 인본주의의 바탕위에나 시시로 변화하는 세상의 문화위에 세워지는 것은 절대로 튼튼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세워져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견고한 요새가 될 수 있다. 다행히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이렇게 주 안에 굳게 선 믿음이었다는 확신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이렇게 바로 섰기 때문에 그 결과로 바울이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마치 급체를 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 그 체가 내려가서 숨을 편하게 쉬면서 ‘이제야 살 것 같다!’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어쩌면 한 교회의 안타까움이 이만큼 바울의 신상에 영향을 끼쳤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바울의 교회 사랑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9)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자신이 살게 된 감사를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이유를 찬양하고자 한다. 너희들이 살고 우리들이 살게 되었으니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이 기쁨의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감격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고 특히 이 데살로니가서에서 이런 표현을 자주 묘사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1:3)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2:19)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아픔도 환란도 기쁨도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이다.
기쁨의 원인은 너희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를 위하여 즉, 데살로니가 교회를 말미암은 것이고 그 감사와 기쁨의 크기는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능히 어떠한 감사로” 묘사할 수 없는 최고의 표현이다. 지금 일어난 감사의 이유는 땅에서 있었지만 그 감사의 대상은 이렇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주신 “하나님께 보답할까”가 모든 믿음의 사람이라면 당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일보다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한 감사를 최고의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오늘 같은 은혜를 누리고 있는 나(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어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Ⅱ. 부족한 것을 채우도록 인도하소서(10~11)
이제 여기에서부터 기도하는 자세와 ~v13는 기도로 이어지고 있다. 기도한다는 바울의 자세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애정과 간절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도 그들을 그리워함에서부터 무엇을 얻거나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 어찌 보면 이 내용으로 볼 때는 바울이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오매불망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거처럼 보일 정도이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밤과 낮으로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용어 자체도 그냥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어려움이나 핍절함을 두고 매달려 간절히 구하는 모습이다.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는 기도의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본다.
사용된 표현들 자체가 일반적인 의미들을 넘어서는 낱말들이다. “심히[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을 넘어서 = ὑπέρ ~위에, ~이상, ~넘어서]” “간구[δέομαι, 간청하다, 구걸하다, 애원하다]” 이렇게 애원하다시피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무엇보다도 “너희 얼굴을 보고”가 먼저였다. 앞의 2:18에서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는 표현이 이유가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밤낮으로 부르짖고 하소연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버금가는 힘이 아니고서는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일행이 단순히 그들의 얼굴을 보자고 그렇게 부르짖은 것은 아니었음은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b)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미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1:3) 라거나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1:8)는 증거를 비롯하여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2:13)는 내용들은 저들의 신앙을 칭찬하는 내용들이었다.
바로 지난 시간에 나눈 v6~8의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내용들도 칭찬의 표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10b)고 보고자 한다는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채워 주려고 하는가 하는 부조화스러운 내용처럼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나 이어지는 내용들 속에서 짐작되는 문제들은 나타나고 있다. 저들이 믿음에 들어온 역사가 짧다는 데서 역시 열정은 있었지만 깊은 신앙적 지식이 부족한데서 부실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문제에서 죽어 있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바울이 직접 언급하는 것을 봐서 또 다른 문제였다.
이 재림의 문제는 단순히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재림이 임박했다는 이해 때문에 일상의 삶에 게으르고(4:11) 천국을 꿈꾸면서 감당해야 할 자신들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덕스럽지 못했던 것 같고 오히려 일을 만드는 사람들까지 있었음을 지적 받고 있는데 더욱 분명하다(후3:6~12).
거론되는 또다른 문제는 영적인 거듭남과 신령한 것들을 말하면서도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는 오히려 부도덕한 행동들이 있었던 것도 다음 4:2~6에 지적되고 있다. 결국 열정은 있었지만 영적인 지식이 모자라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적인 문제들은 오늘 날에도 문제로 나타날 수 있는 신앙의 부분들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11) 여기서부터 ~v13는 기도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루신 역사도 감사로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자세라고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앞으로도 그 선하신 역사를 지속시켜 달라는 기도가 된다.
먼저는 기도의 대상을 부름에 있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11f)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를 함께 동격으로 불러 기도하고 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모범이기도 하다. 구원을 예정하시고 그 구속의 역사를 이 세상에 오셔서 시행하신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기도의 대상으로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다락방에서 가르치신 교훈에 부합된다(요14:13, 요15:16, 요16:23~24).
그 기도의 내용은 여전히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11b) 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필요한 것을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구하는 것은 중언부언(重言復言)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워 달라는 기도이다. 그러나 더욱 성숙된 기도의 내용은 ‘나에게’가 아닌 ‘너에게(다른 사람을 위한)’ 채워 달라는 기도가 더욱 효력 있는 기도이다.
Ⅲ. 재림의 때까지 사랑이 넘치게 하사(12~13)
계속되는 기도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 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 함께 하심으로 피차 간의 사랑이 넘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셔서 천만 성도와 함께 이 땅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구별되고 흠이 없는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 바울의 바램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는 그 큰 사랑이 그들 서로 간에도 연결되어 자신이 그들을 그리워하듯 그 지체들끼리 사랑이 더욱 넘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물론 넘쳐서는 안될 것들도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흘러 넘칠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구한 것을 여기서도 기도하고 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물론 여기서는 그 사랑이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이라고 하였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 간의 사랑인 “피차간”과 그것이 더욱 넘쳐서 교회 밖의 “모든 사람에 대”해서까지 흘러 넘친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이고 이것은 단순한 바울의 바램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즉,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셔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믿음 안에서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περισσεύω, 과잉, 풍성, 초과] 하사”라는 것으로 더욱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 사랑은 분명이 죄인 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미 앞에서 “사랑의 수고”(1:3)를 인정함 바 있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다. 사실 복음 전파는 거룩한 하나님의 죄인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에서 출발하고 그 사랑을 제대로 맛본 사람들이 그 사랑 속에 들어와 살고 그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기도는 현재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당시 믿음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라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는 앞에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과 허물이 없기를 기도한 것이다.
먼저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는 앞의 v2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성전을 삼고 계시는 믿음의 자리요 우리의 뜻을 좌우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계시는 성전으로 흔들림이 없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마음의 성소를 더욱 온전히 세워주셔서 변함없이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램이다.
바울의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13m)라는 표현은 OT 스가랴14:5b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는 표현과 의미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으로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말씀이다.
물론 이 내용은 다음 장 4:16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라면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에 이 세상을 떠나 있던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여 주님의 재림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의 기도의 요지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그 때까지의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뿐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삶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의 내용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b) 우리의 신앙은 현재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당부하는 것처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1:8)한 것처럼 믿음을 마지막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지켜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에서부터 그때까지 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로 서 있어야 하고, 그 모습을 재림의 때까지 지켜 가는 것이다. 언제나 믿음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의식하는 데서 구별되고 흠이 없게 된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모든 것을 행할 때 그것은 자연히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ἁγιωσύνη, 성경 이전의 그리스어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성품 그대로이다]” 모습이 되고 “흠이 없게[ἄμεμπτος, 비난할 것 없는, 흠 없는; α + μέμφομαι 비난하다, 흠잡다]” 되는데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흠 잡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육신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믿음에 바로 선 것 때문에 바울처럼 ‘이제는 살 것 같다’는 고백과 함께 최상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늘 받기를 바라고; 준다고 해도 받을 것을 기대하며 준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만나고 싶어하는 자세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받는 자의 삶이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되 우리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세상의 사람들에게까지 넘치기 위해 기도하고 그 때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지도록 서로 기도하는 하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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