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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3:1~7 2024-04-21
참다 못하여, 참다 못하여,  
유대인들과 동족들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당하여 복음으로 살게 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잃게 될까 봐 염려하여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방해 속에서도 다시 데살로니가에 돌아가 저들의 믿음을 붙잡아주고 싶은 바울의 안타까움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지난 시간에 나눴다.

어떤 상황에든지 항상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귀하고 또 그런 최선을 바라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불가능한 것을 시키시거나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능한 것 만을 명령하시고 심지어는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자신이 친히 개입하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 보고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주 외우면서도 사실에서는 잘 적용하지 못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신뢰하는 믿음의 아들(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이요 신실한 일꾼이 디모데를 보내고 기도하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말씀이다.

이 3장의 내용이 당시 사실적인 상황에서의 고백으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게 된 이유와(1~10) 다시 돌아와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그리워하는 것 못지 않게 존경과 믿음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서 생명을 얻게 해준 바울 일행을 보고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을 나머지 부분(11~13)에서 읽게 된다.

약간 내용의 간격은 있지만 역시 이 3장의 내용을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눠서(1~7, 8~13) 상고하고자 한다. 역시 당시의 육신적인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견딘 상황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마음에서 같은 어려움을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믿음으로 해결하는 승리를 기대해 본다.



Ⅰ. 걱정을 걱정으로 끝내지 않았다(1~3)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나 욕망을 참지 못하여 행동에 옮겨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나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행동에 직접 나서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바울이 바울인 것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1) 앞장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어려움에 있는 그들을 격려하고 다시 믿음을 끼치려는 기대는 사탄의 방해로 거절 된 사실을 두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조치를 시도하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이미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에게 밀려 다시 아덴에 머물고 있지만 바울이 증거한 복음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생명의 복음이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그것을 막았던 사탄의 역할을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 못 간 것에서 끝내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의지하며 방법을 찾은 것이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2f) 자신이 가지 못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디모데를 보내는데 물론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실라도 있지만 실라는 반대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시 반대자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 적임자로 디모데를 택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영적인 일의 해결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 못지 않는 영성이 있는 영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또 데살로니가의 교우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디모데를 선택하여 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디모데는 앞에서 거론 한 대로 바울의 믿음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어디에 보내 놔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신앙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에게 디모데를 소개함에 있어서 “우리 형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 된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라 “우리 형제”이고 바울과 다르지 않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명의 일꾼임을 추천하고 있다.

그를 보내는 이유를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2b) 적어도 2가지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먼저는 “너희를 굳건하게” 즉,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가 먼저이고 두번째는 믿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안팎으로 여러 환란을 당하는 저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보낸다고 목적을 분명히 한다. 결국 디모데는 이 두가지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보낸다.

이미 앞에서도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라고 밝혔지만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3f)고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기에 “흔들리지[σαίνω, 개의 꼬리를 흔들다→ 아첨하다, 알랑거리다, 비위를 맞추다; 움직이다, 동요시키다, 교란하다, 괴롭히다] 않게(μηδείς, 부정의 의미)”라는 의미로 확대되는데 개는 주인에게 좋다고 꼬리를 흔들지만 믿음 생활을 이런 형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3b) 이 말씀도 두가지 정도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전반절과 함께 이해하면 바울이나 실라나 디모데가 복음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어떤 어려움 중에도 흔들림이 없이 세우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대신으로 보낸 디모데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확신이다.

두번째는 다음 v4과 함께 이해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는 것은 이미 예고했던 대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견디도록 세움을 받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는 목적이 다른 하나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경외한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도 더러는 어려움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남아 있음을 생각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경우들이 있지만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는 도전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사용하여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역사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걱정이나 안타까움이 끝이 아니라 허락하신 약속안에서 믿음의 도전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Ⅱ. 환란이 믿음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4~5)

어떤 일이든지 힘쓰고 시간이나 물질을 투자한 일들이 헛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일이라도 그럴 것인데 하물며 생명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다. 특히 데살로니가처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곳의 교회가 믿음을 잃어버려 문을 닫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바울 일행(2:8)에게도 분명히 비극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려운 가운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부터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데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이미 예고를 해서 준비시켰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4)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만나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듣기 좋은 천국만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약하게 만드는 일이고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이미 많은 어려움 속에서 주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고난에 대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것 역시 빠른 교회 쇠퇴의 원인이기도 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는 시작부터 자신이 빌립보에서 그곳에 이르기까지 겪은 고난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죄 많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에 대한 경계를 미리 주었고 그러한 안타까운 예언도 그들에게 그렇게 된 것을 그들이 보고 아는 사실이라고 확인시킨다.

세계 각 지역마다 또 민족마다 본래 하나님을 섬기던 데서 왜곡된 온 갓 미신 그리고 토속적인 무속적 습성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배경으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전하는 사람들도 생명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귀중한 일이다.

그렇게 어렵고 힘겹게 전하고 들은 복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자체가 귀한 일인데 어두움의 세력이 이런 복된 역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바울 일행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한 생명의 역사가 헛되게 버려 두실 하나님은 물론 아니지만 그 생명의 역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전한 사람이든지 받은 사람이든지 또 다른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5f)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 가고자 하던 것을 사탄이 막아서 “참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냈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환란이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것이 사실로 나타나 자신들이 떠나온 그곳의 믿음의 사람들이 ‘과연 그 환란 중에도 지속적으로 믿음을 지키고 있을까’ 확인하려고 참다 못하여 역시 디모데로 하여금 확인케 하여 온전케 하려 했다는 말이다.

“참다 못하여”를 반복하는데(1, 5) 그 의미하는 바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μηκέτι στέγοντες, μηκέτι(이미 ~아니다, 그 이상 ~아니다; στέγοντες ←στέγω, 덮다, 감추다, 비밀로 하다, 보호하다, 막다, 제지하다, 참다, 견디다, 유지(지속)하다)] “더 이상 감출(견딜) 수 없어서”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못 참아!’라는 것보다는 좀더 안타까움을 가진 표현이다.

그렇게 “참다 못하여” 보내고 알아보는 이유가 단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보다는 더 애절하고 건설적이다. “…이는 혹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5b) 우리 말에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본다.’[축계망리(逐鷄望籬)] 세상에서도 많은 일들이 잘 되기 보다는 허탈함을 느끼게 하는 안타까움으로 끝내는 것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히 하나님의 일꾼들은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알았다면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한다. 세상의 귀한 것들은 잃을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믿음을 잃는 것은 곧 영원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이나 핍박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끈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효케 하는 것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믿음을 잃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라심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마18:6; 막9:42; 눅17:2)고 공관복음에서 경고하신 바 있다.



Ⅲ.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6~7)

여기에서부터 ~v10은 디모데를 보내게 된 이유보다는 그가 돌아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실적인 형편을 전하는 내용을 듣고 오히려 감사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의 염려보다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행하고 있는 믿음이 바울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형편이 그렇게 녹녹하지 못한 환란 가운데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한 감사와 격려를 가지고 그들 나름대로는 오히려 바울을 염려하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은 바울의 기대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런 감격을 가지고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 감사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나머지v11~13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신비임을 배우게 된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6f) 이 데살로니가서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을 칭송한 내용에서 이미 신앙의 실제적인 세 기둥이라고 하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 함이니”(1:3)라고 칭찬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믿음과 바울 일행에 대한 사랑의 기쁜 소식을 디모데를 통해서 가져왔다고 감사하고 있다.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안다면 그 사랑을 자신들에게 전해준 바울일행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6b)라는 사랑의 응답이었다. 여기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하는 것은 바울의 마음에 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바울을 생각하는 것의 수식어가 “항상, 잘[ἀγαθός, 좋은, 선한]” 생각한다는 고백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간절히[ἐπιποθέω, 간절히 바라다, 사모하다, 욕구하다]”가 너무나 애절하다. 마치 보고 싶은 연인을 생각하듯 그것은 바울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의 성도들 역시 바울 지지 않게 자신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그렇게도 간절히 보고자 했던 것으로 서로의 사랑이 다르지 않았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바울 일행의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교통하는 신령한 사랑으로 그리워 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간절함의 모든 상황이 어려운 바울에게 큰 위로 즉, 힘이 되었다는 고백이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7)는 감사이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하고 그러나 보니 생명의 복음을 전함에도 언제나 넉넉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넉넉했다면 사실 이런 격려도 별로 힘이 되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렵고 힘겨운 가운데 염려하고 마음 썼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는 간절한 소식은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안부를 전하면서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이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1)는 고백한 바 있다. 대부분 동족인 유대인들 모두가 자신을 거역하고 배척하는 가운데 같은 할례 파 유대인 가운데 희귀하기는 하지만 자신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한 사람이 바울의 입장에서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전하고 있지만 소아시아에서 에게해를 건너서 빌립보에서부터 아가야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계속 동족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고 빌립보 교회와 같은 이방 교회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격려와 같은 위로를 다른 곳에서는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자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이 말씀을 대부분 각각 개인의 믿음 생활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앙인 서로 간의 믿음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경외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염려하면서도 신뢰했던 결과는 역시 디모데를 통하여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되돌아왔다. 우리가 한 교회 지체 간의 관계에서도 이렇게 서로를 믿고 고백하는 깊은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신앙생활이 한결 편해지고 든든해지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다. 같이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끼리 불쌍히 여기고 위로 한다는 의미의 四字成語이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에서부터 현재 머무르고 있는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유럽이었음에도 계속 핍박을 당하며 왔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환란이 더욱 실감이 났을 것이다.

거기다 바울은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뵙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를 이미 듣고(행9:16) 각오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믿음을 갓 시작한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환란에 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든 그들을 돕고자 했던 바울의 사랑과 관심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런 바울의 배려에 데살로니가 교우들 역시 믿음으로 응답함을 본다. “더 이상 감출(견딜) 수 없어서” 시도한 믿음의 도전은 서로에게 더 큰 확신과 믿음을 나누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