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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2:13~16 2024-04-07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고난을 받았느니라,  
바울 일행은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했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걸고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가 이들의 헌신으로 끝났다면 이와 같은 감격의 고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무릅쓰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급을 주시는 것은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손수 비용을 벌며 전한 복음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을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까지 좋은 소문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미 이 편지를 시작하는 1:1~4에서 칭찬한 바 있지만 다시 과거를 회상하면서 저들의 복음 증거의 반응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뒤부분에서는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대적하고 방해하던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죄상을 고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반역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말로 복음을 받으며 고난당한 데살로니가의 지체들을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음은 그 반응에 따라서 생명이 되고 저주가 되는 엄청난 간격도 이 말씀에서 배우게 되는데 자연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하는 도전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13)

성경은 사람의 믿음이 어디에서 나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지적하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특히 메시아로부터 들려지는 말씀은 과거 율법시대 속에서 그렇게도 듣고 싶어하던 말씀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7; 눅10:2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다가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9; 눅8:8, 14:35)하는가 하면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 했는데 귀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말씀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마22:15)라는 기록으로 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지적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곤경에 처하도록 엿보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완악한 백성들로 하여금 오히려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게 하셨음도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11:8)는 말씀처럼 신명기29:4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1:2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 했던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13f) 이라고 데살로니가의 지체들을 향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끊임없이 감사한다고 고백하는데 여기에 대한 이유는 좀 더 분명하게 증거한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13m)라는 이유 때문인데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그냥 ‘어떤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게 되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정작 생명이 되지 못한다.

실제적인 경우를 성경에서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라고 하는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자 저들은 벌써 그 증거되는 말씀에 이미 전제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17:18)

바울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자신들의 생각을 가지고 이 말쟁이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앞서 생각하여 들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쟁이(다른 철학의 부류)나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접근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별로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13m)라는 이 말씀에는 “받을 때” “받지 아니하고” “받음이니” 라고 세번씩이나 ‘받다’라는 표현이 반복되지만 그 쓰인 낱말은 각각 다르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παραλαμβάνω, 데리고 오다, 옆으로 받다] 때에”는 누구에게나 들려지는 객관적인 들음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οὐ]”는 단순히 부정으로 쓰여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δέχομαι, 받아들이다]”는 각자가 들은 반응으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각각 다른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13b) 분명히 바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었다는 의미이고 “진실로 그러하도다”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흔하게 인용하는 이 말씀에 반대되는 내용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는 말씀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메시지를 ‘아 또 이종배가 설교하네!’라고 단순한 제 말로 끝나버리면 그 듣는 교훈은 아무 생명의 역사도 나타나지 못한다.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자라신 나사렛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 가르치심에 놀라면서도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자란 것을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을 배척하는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6:5)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본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13b) 한 것처럼 바울 사도 개인의 말로 듣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그 증거된 말씀이 성령과 함께 권능의 역사를 일으킴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또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히 엄청난 복이지만 그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다면 같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Ⅱ. 믿음으로 인한 고난(14)

이제 그들이 믿음으로 받은 말씀이 어떻게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이들이 비록 지형적으로는 엄청난 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유대에서 처음 탄생한 교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같은 복음이라면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당연한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14f) 했는데 이미 1:6에서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고 하여 자신들과 주님을 본받은 것을 칭찬한 바 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증거한 것처럼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라는 확신은 역사를 넘어서는 확신인 것이다(Renee Cardinale Alves, Tasmania).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을 만났을 때에도 복음은 그들의 평가가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행28:22)는 표현처럼 그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에서부터 박해를 받아 고난을 견뎌야 했고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는 모습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견뎌야 했고 앞으로도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고난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7~18)”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오는 고난을 부정적으로 보다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처럼 기쁘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격려함도 듣는다.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표현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고난을 받았느니라” 는 표현이다. 옥중서신에서 자주보는 표현이지만 이 역시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의미로 영육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면 혼란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보호처이기는 하지만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이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14b) 복음이 유대인 즉,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시작된 그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의 복음에 대한 자세의 차이이자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임을 로마서 9~11장에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복음이 탄생한 민족에서부터 핍박을 받았다면 다른 곳 에서야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나면서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자를 고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당시의 신앙의 지도자들이 가장 싫어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거짓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행4:1~2)

복음은 진리이며 빛이기 때문에 세상은 죄를 짓게 하는 어두움의 주관자들이 다스리는 곳곳마다 자신들의 어두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생명과 빛을 전하는 사람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격려하고 있다.



Ⅲ. 자기 죄를 항상 채우는 사람(15~16)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유대인들이 약속대로 그들에게 오신 메시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행한 잘못들을 네댓 가지 정도로 지적하고 그들이 그러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한다. 이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일이고 쉽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동족을 이방인들에게 고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15) 이것이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의 범죄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①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거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도행전7:51~52 스데반은 이 사실을 지적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예언을 따라오신 메시아를 죽인 무서운 죄를 범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23:29~31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것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②우리를 쫓아내고, 같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예수와 선지자들에 연결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을 쫓아낸 것은 그들이 직접 보아온 사실이고(행17:5~10) 또 베뢰아에서도 쫓아낸 것이 사실이다(13).

③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천사를 붙들고 씨름해서 얻어낸 이름으로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까지 당부했지만 이스라엘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④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하여 모든 민족을 중보 하여 복받게 하려고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셨다고 증거하셨다.

그럼에도 정작 언약된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를 통해서 온 인류를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스스로 온 인류의 대적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배은망덕을 행했던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결과적으로 한가지 죄를 추가하고 있는데 ⑤“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16f)이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선언하였다.

다시 고린도에서 먼저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역시 거절하는 저들에게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18:6) 슬픈 선언을 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들은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할 뿐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자신들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바울을 비롯한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들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비단 이 데살로니가에서뿐만이 아니었음은 우리 모두가 사도행전 속에서 보는 사실이다.

이런 극단적인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는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16m) 라는 비극이다. 복을 이어받도록 부르심 받은 제사장 나라가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거절하므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여 복은 고사하고 저주받을 죄를 항상 넘치도록 채우는 어리석음을 불러오고 만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히틀러에게 대량학살을 당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비극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자처한 것임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어서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고 선언한다.

여기에 간 큰 유대인들은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라고 잠꼬대처럼 큰 소리 쳤다가 처음은 AD. 70에 로마의 티토 장군의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46년간 유대인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헤롯에 의해 세워졌던 유대 성전이 완전히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못하는 처참한 모습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 후손들 역시 그 조상들이 예언했던 대로 흩어져서 포로 된 모습으로 살다가 히틀러에 의해서 가장 참혹한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결국 이것이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16b)는 심판의 결과였음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에서 이 말씀을 끝낼 수 없는 것은 이제 유대인들의 특권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고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의 전처를 밟을 수도 있다는 경계의 교훈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넘치는 중보의 제사장 역할을 우리가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복을 복으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복이 독이 될 수도 있고 죄를 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는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지는 영원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누구를 통하여 심지어는 성경을 읽어 듣는 것까지 너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생명과 빛의 풍성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役事)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경 속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이 땅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까지도 기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면 유대인들처럼 자신들 만을 위한 독선으로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어 죄가 넘쳐 하나님의 노하심의 대상이 되어서 안될 것이다.

이 인류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이 귀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누리는 바울과 데살로니가의 지체들처럼 복된 사람들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