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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5:22~33 2024-02-11
이 비밀이 크도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반적인 신앙적 실천을 당부한 내용이었다면 좀더 실제적이고 가까운 가정의 관계에서 직장의 관계로 확대해 나가고 그런 다음 영적인 싸움에 대한 준비와 무장을 하라는 당부와 함께 이 에베소서가 마무리되고 있다. 여기서부터 ~6:9의 내용은 같은 옥중 서신인 골로새서3:18~4:1에서도 여기보다 자세하지는 못하지만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주님의 백성들의 부부생활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자주 그리고 여기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이 고린도전서 7장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베드로전서3:1~6에 같은 내용으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그리스도인들의 부부관은 진보하는 일반 문화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나타나는데 특히 아내들의 복종 같은 것들은 남녀 평등이나 여권운동 쪽에서 볼 때는 납득하는 것이 쉽지 않고 부모에 대한 공경이 부부의 관계를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동양의 윤리관에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 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관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창조 질서에서 문화의 변화에서도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위계 질서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하고 또 어느 문화권의 윤리 도덕과도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된 교회의 관계에서 어떤 종교에서도 비교되지 않는 성스러움까지 보게 된다.

이 내용도 편리상 3부분으로 이해하되 신앙의 실천부분을 시작하면서 계속 당부하고 있는 “복종하라”는 당부가 여기서는 아내에게 당부되고(22~24) 그럼에도 그 복종은 당연히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교회를 위해 주신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증거한다(25, 28~29).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쪽에만 당부하지 않으신다. 에덴동산 에서처럼 관련된 모두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의무를 주신다.①

그런 다음에는 세상의 본능으로 지배되는 동물과 다른 신성하고 충실한 부부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거룩하고 흠이 없는” 둘이 한 육체가 된 교회 공동체와 같은 신비하기까지 한 부부의 삶을 권면하고 당부한다(v26~27, 30~32). 이런 가르침에서 夫婦란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됨이 완전히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v33은 결론 같은 당부로 주어진다. 오늘날의 가정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가정 지침이 어겨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내용은 마치 결혼식의 주례사 같은 감을 어쩔 수 없다.



Ⅰ. 복종하라(22~24)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가르침에서는 사람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질 때 관련된 모든 것들이 바른 질서를 잡게 되고 부부의 관계 역시 복되게 유지될 수 있다는 하나님 경외의 삶의 지침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 바로 앞에서도 설명을 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도 두 번씩(22, 24)이나 “복종하라[ὑποτάσσω, ὑπό ~아래 + τάσσω 배열(치)하다, 정리하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성도 간에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이 되었다면(21) 아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대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복종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자기 남편에게만 하는 것이다.②

이유 또한 분명하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23) 즉 남편이 한 몸인 부부에 있어서는 머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다른 서신 들에서도 더러 읽어볼 수 있다. 최초의 범죄 후 하나님께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고 명령하신 바 있다.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 교회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인간적으로는 불평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5)는 표현까지 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남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하라!”고 기준을 제시한다. 이것은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는 모범을 보여주는데 왜, 그러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두번째 주제에서 따르고 있다.

오늘 첫번째의 메시지는 어찌 보면 대단히 편견스럽고 男女平等이라는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되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③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어는 한 쪽에만 절대로 불리하게 명령하시거나 주문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구원에 있어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한으로써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의 은총을 입는 데는 어떤 인종의 차이도 없고 여기에는 性別의 차이도 없다는 증거이다.



Ⅱ. 사랑하라(25, 28~29)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절대복종을 당부하시는 부분적으로만 들을 때는 남자들이 쾌재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복종보다 더 막중한 아내에 대한 의무가 남편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감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의 모범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는 거의 맹종처럼 복종을 하는가 하는 데는 분명한 당위성 즉, 이 유가 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신 그 사랑을 깨닫는다면 그 사랑에 복종치 않을 강심장은 적어도 사람이라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주님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따르고 섬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응답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 사랑은 단순한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무를 넘어서는 즉, 법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이다. 자주 거론하는 것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법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였고 이 사랑의 관계만이 영원까지 지속적으로 갈 수 있는 관계이다.④

그럼에도 이 사랑의 관계가 허물어져 버렸을 때 그 관계를 억지로라도 지속시키려고 끼어넣은 것이 법의 관계임은 성경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된 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본래는 없었던 것인데 추가된 것 즉, 끼워 넣어진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의 크기를 분명히 하고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사랑하라!는 것은 당연하고 그 사랑의 깊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 이 사실은 빌립보서2:5~8에 나타나는 대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희생을 남편들은 당연히 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사랑 없는 남편에게 복종할 여인은 당연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어서 사랑하는 남편에게 라면 복종하지 않을 여인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없는 동물일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28) 이 말씀은 좀 더 큰 호소력을 주는데 그것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해 놓고 다시 연결되어지는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29f) 한 것처럼 자신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⑤

이런 이유에서도 이웃 사랑의 기준도 율법에서부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b) NT에서도 이 법은 바뀌지 않았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4; 약2:8)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셔서 부부가 되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4~25)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한 몸이고 또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부끄러움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씀이다.

이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시험하려고 올무를 놓는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9) 여기서도 자기 육체를 위하고 보호하는 기준이 단순한 사람의 기준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9b)라고 최고의 기준을 주고 있다.

사실 서로 간에 이런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런 부부의 관계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지만 이러한 귀한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이런 귀한 약속이 있음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나눠질 수 없다는 몸이 쪼개지는 아픔을 겪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⑥

처음 아담과 하와의 관계속에 죄가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사람구원에는 이렇게 깨어지는 가정들의 회복도 역시 십자가의 희생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랑의 관계 속에서는 문제가 없던 것들도 문제가 생기면 많은 핑계를 상대에게 전가시키는 것도 죄의 영향력이었음을 에덴의 첫번째 부부에게서 도 보는 사실이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오늘 깨어지는 부부들의 핑계도 이러한 내용들과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하라는 당부에도 우리는 너무 핑계가 많고 변명이 많다. 만약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핑계하려 하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중에 있었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우리 주님께서 교회와 우리를 위한 사랑이 자신의 아내를 위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어야 할 것이고 이렇게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던져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복종하지 않을 아내는 없을 것이다.



Ⅲ. 깨끗하게 하라(26~27, 30~32)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실제적인 목적과 함께 결과로 부부간의 관계가 이렇게 교회처럼 구별되고 깨끗해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세상과 구별하신 교회가 거룩하듯이 부모에게서 분리되고 세상의 다른 관계와는 구별된 부부 관계의 신비성과 순결성을 당부하고 있다.⑦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2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사랑의 절정은 바로 죄인 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독특한 것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라는 두가지의 도구가 언급되고 결과에 있어서도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라는 두가지이다.

물론 이 말씀은 v25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말씀에 연결되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누었다. 주님의 희생의 목적이 창세전부터 예정되고 계획된 세상밖으로 불러낸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포함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흐름의 내용이 신앙적 논리를 설명해가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런 신령한 가치가 부부의 관계속에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 “물로 씻어”는 복잡하지 않게 예수의 희생에 하나가 되기 위한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받는 세례로 단순히 이해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도구로 나타나는 “말씀[ῥήμα, 말, 말씀, 말한 것]”은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이 절대자로 인격을 부여했던 [λόγος, 많은 33가지의 의미들 중에 기록된 말씀, 그리스도 자신이신 말씀 등등]와는 다른 낱말이다.

우리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비슷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는데 물론 의미에서는 같지만 단어에서는 다른 말씀이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한 말씀이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는 내용이다.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도 순서에 있어서도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도 진전되고 있다. 즉,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과 구별됨으로 이해할 수 있다.⑧

결과적으로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7)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신앙의 실천면을 증거하고 있는 부분으로 교회론을 해설하는 부분도 아닌데 왜,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 그것은 부부간의 신비와 귀중성의 가치를 교회와 같은 비중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에 있는 교회이지만 하늘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나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또 신랑 되신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혼례식을 치를 때까지 그 영광스러움을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7b)를 지켜 감도 계속되어야 만한다.

또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7)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데서 부부의 관계를 지켜 감의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 부부의 관계는 사람끼리 만 지켜가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사실 가정, 부부는 교회의 기초이면서 사회와 국가의 기초라는 데서 그 귀중성을 절대로 약화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치로 만나고 이런 가치를 유지해 간다면 그런 가정이 과연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아내를 교회에 비유하고 있는 데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아내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7)는 이해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너무 부부를 거룩하게 표현해 버려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청년들이 있을까 봐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하다.⑨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30) 결국 한 부부일지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온 우주 안의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유기체로 움직이는 몸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부부들이라면 그 거룩하고 신비한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말이다. 기초가 거룩하지 못하면 전체가 거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거룩하고 신령한 이론을 전계 해 온 바울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31) 이것은 바로 결혼의 성혼선언문이다. 신묘한 부부의 관계는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영과 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육체도 하나여야 하는 증거이다. 특히 여기 “합하여[προσκολλάω, 부착하다, 달라붙다, 결합하다, 합일하다 = πρός, ∼를 향하여 + κολλάω, 달라붙다]”라는 의미는 마치 아교풀로 붙여진 나무처럼 떨어질 수 없는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제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된 결과를 말하는 내용이 다음 귀절이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2) 남녀 부부간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가 사뭇 의아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도 교회의 지체된 부부의 가치를 이렇게 귀하게 여긴다는 데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비밀[μυστήριον, 감춰진 것, 비밀, 신비]”은 지금까지 언약의 민족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를 이루는 신비를 표현해 왔다면 같은 원리를 이 부부의 관계에다 응용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최초의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고 그 하와가 다시 아담의 배필이 되어 그 몸으로 돌아가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는 신비를 이름이다.⑩

결국 부부간에 간직하는 비밀이 많을수록 그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다. 요즘 세상은 남들과 나누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발설하는 것이 오히려 부부 간의 신비나 비밀을 가치 없게 만드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부부간에만 이해하는 신비한 언어에 남을 참여시킬 수 없는 비밀은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목수가 망치로 깊이 때려 박은 잘 박힌 못을 다시 한번 망치질하는 것과 같은 교훈을 생각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헌신은 언제나 자신이 먼저이기 때문에 희생적인데 이것은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오늘 말씀을 함축적으로 역어서 다시 한번 당부하는 말씀이다.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33f) 아내에게 복종을 당부하던 시작 부분과 여기는 순서가 바뀌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늘 끔찍이도 위하고 챙긴다. 그런 자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당부이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 다만 여기에서는 복종[ὑποτάσσω, 아래에 두다, 복종시키다, 종속시키다]이 아니라 존경[φοβέω,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놀라다, 존경하다, 경외하다]하라 로 바뀌었다. 결국 모든 이치를 설명한 후이기 때문에 좀더 조심스러움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생명 다해 사랑하는데 아내는 여전히 그러한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결국 서로에게 당부하는 교훈은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