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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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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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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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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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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율법 주의적인 실천편에서도 앞(5)장에서는 신앙의 논리가 주로 다루어 져서 다분히 이론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서신의 말미에 와서는 좀더 실제적인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 안부를 묻기 전에 또 한번 할례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이 마지막 장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는 교우 간의 부조화였고 그것은 교회가 처음 생겨난 일세기부터 현재의 21세기까지도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어느 교회나 문제는 있었던 것을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도 봐오는 사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령하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서신들을 보면 개인의 비도덕적인 문제에서부터 음행의 문제나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는 것에서 차별의 문제는 물론이고 신앙의 전반의 문제 심지어는 예배의 주님의 만찬 문제까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 교회가 보이고 있는 성도 간의 부조화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지체 간의 원활한 교제는 교회의 생명의 문제로 교회의 바탕을 흔들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형제 간의 교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야 말로 죄와 세상을 맛서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성령의 사람들의 보다 실제적인 형제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오늘부터 두 시간에 걸쳐서 형제의 허물까지도 서로 나눠 져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성결을 지켜갈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 범죄한 형제를 대함에 있어서의 가르침을 읽으면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형제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내용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야 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그리스도인은 먼저는 각자가 자신의 짐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서 끝나거나 만족하지 않고 남의 짐을 나눠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함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같은 교회 안에 힘겨운 인생의 짐을 혼자서만 끙끙대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어떤 인생의 힘겨움이든지 나눠져서 무게를 서로 분산하는 것이 교회요 형제이기 때문이다. 또 형제간이라고 할 때 힘겨운 짐을 나눠 질 수 있다면 기쁨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는 것은 당연한 지체 간의 관계이다.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이럴 진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쳐보는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
Ⅰ. 자신을 살피라!
성령의 사람들이 죄진 사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을 교훈 하고 있는 것이 첫 부분이다. 안타까운 것은 성령을 거론하면서 늘 또 다른 편에서는 죄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스리시는 교회에 여전히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대로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그늘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은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어쩌면 교회의 역사속에서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 땅에서 만이라는 사실에 위로와 소망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에 그 거룩한 희생과 어울리지 않는 어두움의 일이 있게 되는 원인은 역시 마귀 사탄이 아직도 여전히 활개치며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완전히 잡혀 무저갱에 닫아 잠김을 받게 되기까지(계20:3)는 이들의 활동이 허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육체와 성령의 일로 율법이나 할례의 복음과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구별하여 일깨우려던 바울은 홀연히 갈라디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서 거기에 합당한 권면과 지침을 주고자 함을 볼 수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칭할 때 한 지체의 범죄에서 같은 지체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스스로의 범죄는 당연히 자신이 감당해야 하겠지만 같은 교회내의 죄도 함께 나눠져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또 세상과 구별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라는 데서 반드시 죄의 문제는 깨끗함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미 피 흘려 주신 사죄의 은혜를 바로 적용하여 주님께서 주신 지침에 의해서 성결함을 받아야 하는 것 역시 세상과 다른 방법이다.
여기서도 시작이 “형제들아!”라는 애칭으로 시작한다. 바울의 각별한 호칭은 여러 군데서 봐 온 바다. 그럼에도 범죄의 문제를 두고 이런 다정한 명칭은 역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해결이 가능함을 전제로 한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앞에 사람을 붙이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범죄는 가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총이 이를 위해서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여기서 “범죄하다[παράπτωμα, (옆으로) πίπτω, 미끄러지다, 떨어지다]”의 의미는 고의적이기 보다는 부주의로 범한 죄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하나님과 본인만의 문제이고 그것이 드러나면 관련된 사람들과 관계로 나타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딤전5:24f)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본인도 범죄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로 깨닫게 되는 경우를 율법에서부터 거론하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레4:13~14f)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5:4b)
결국 의식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죄의 허물은 면하지 못할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처리하는 문제는 세상과 다른 것을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주신 교훈 속에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결국 드러난 죄조차도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했는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는 말씀처럼 신령한 자라야 바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령한 사람이 그러한 죄를 바로잡는데 여기에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요 산상보훈의 세번째 복의 항목이었던 “온유한 심령” 즉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방법보다는 성령의 방법, 영적인 원리에 의해서 바로잡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죄의 처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8:3~4) 라고 예수 그리스도와 여인을 함께 죽이려 드는 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더 가혹하지만 사죄의 은총을 입은 은혜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을 본다. 역시 여기에도 십자가 희생의 원리가 신(信) 불신(不信) 간에 다름을 본다.
진정 은혜의 사람이라면 다른 지체의 죄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사람이야 말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분명하다.
Ⅱ. 짐을 서로 지라!
두번째의 명령은 좀더 적극적이다. 우리의 몸의 구조를 영적인 것에 비유하는 고린도전서12장의 내용처럼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임무를 잘 감당하게 될 때 비로소 건강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2f)는 것은 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감당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나 분량을 감당하라는 것인데 여기서도 ‘혼자 지라’는 것이 아니라 “짐을 서로 지라”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b~21)고 억울한 고난을 받는데 대한 이유를 증거하고 있는데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지체의 짐을 지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인데 같은 원리는 3:9f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무엇보다도 이것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b)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의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역시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이겠지만 직접 말씀하신 계명이기도 하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세상에서도 남의 짐을 함께 져주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이것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당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신 같은 원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면 한 사람의 죄라도 용서받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가르치는 바대로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지체의 짐을 함께 져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붙여지는 당부가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 한 것인데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혜의 사람 솔로몬은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26:1)고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NT에도 이러한 사상은 도처에 나타나고 있지만 대표적인 내용이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성령의 사람이라면 절대로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은 교만이고 믿음 속에서 가장 무서운 죄기도 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또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보고 알 수 있는데 스스로는 모르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서 “스스로 속임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범죄의 처리에 관련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가까이 이것을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와 더불어 접근해보면 다른 지체의 짐을 나눠지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로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의 부분이라면 서로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에서 분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의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함께 져주고 생명의 능력을 함께 나누는 것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서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는 두려운 경계를 보게 된다. 같은 경계는 고린도전서10: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먼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이다.
Ⅲ. 자기의 일을 살피라!
언 듯 보기에는 이 말씀은 앞에서 당부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 들리리 수 있다. 그럼에도 깊은 뜻은 역시 조화를 이루는 신앙의 삶의 모습이다. 신앙하면서 전체 속에서의 지체로서 역할과 자기 스스로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으로 바람직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4f) 여기서 “살피라[δοκιμάζω]”는 말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1:7f) 라는 표현처럼 우리말의 살피는 정도가 아니라 제련소에서 광물을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금속을 가려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의 내용이 신앙에 있어서 옳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면 여기 당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주는 교훈의 말씀이다. 사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자체가 먼저는 내가 해야 할 교회 속에서의 역할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이 국가나 사회나 가정에 어떤 역할이나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같이 배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 자유와 권리를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취미라 하면서 함께 타고가는 배에 구멍을 뚫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살피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나 역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나 복음증거 속에서 유익이 되는가를 헤아릴 정도라면 그래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판단과 역할이 제대로 될 때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b)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은 꼭 가진 것이 많거나 건강한 사람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이 자랑이 되며 그리스도께 영광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b~10)
또 다른 측면에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b)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을 맡겨 드림으로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잘한 것을 기뻐하시고 자랑하실 것에 대한 소망을 기대함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하신 마지막의 광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19:17)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 v2에서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해 놓고 서는 여기에서는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하여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짐”은 각각 다른 낱말이 사용되고 있다. “짐[βάρος,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2) “짐[φορτίον, 상징적으로 과업, 업무]”(5)
앞의 “짐”이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것을 의미하여 “죄”와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면 이 v5의 “짐”은 ‘의무’와 ‘역할’을 의미하는 데서 서로 함께 져줘야 하는 공동체적인 의무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몫을 남에게 전가하지 말고 감당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때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이란 구원과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1:1의 관계이겠지만 이 지상의 구원사업을 위한 교회라는 공동체적인 의무와 소임이 분명히 있고 이것을 잘 감당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v6~10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서로 협력할 것을 권면한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과제만 잘 감당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남은 여력과 성령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시험이나 어려움에 힘겨워 하는 다른 지체들의 그것을 함께 감당해야 할 당연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지체들이라면 다른 지체의 범죄가 드러나더라도 그것으로 수치를 받게 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신령한 방법으로 그런 일을 바로잡고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서 그런 죄를 범치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는 그러한 지체의 수치나 아픔조차도 함께 나눠 짐으로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그런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은 그런 사람과 같지 않다는 자기 과신으로 이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사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늘 영적으로 자신을 살피고 경성하여 자신의 영육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함으로 나중 자신의 충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 하시도록 영광을 하늘에 저축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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