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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5:22~26 2021-12-19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뿐이다. 이미 육체의 일을 경계하는 서두에서도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는 바울의 당부를 들은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에서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엡5:18)는 권면을 남긴 바 있다.

앞의 v19~21에서 육체의 열매들을 살펴보았다. 어찌 보면 현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삶의 열매이면서 자신보다 주위에 안타까움을 끼치는 땅에서 나서 자라고 배운 가장 일반적은 삶의 모습들을 나열하고 있다.

앞의 육체의 열매들[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은 중심이 자신이고 그 결과로 주변의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겹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들은 그와는 반대로 자신은 육체적으로는 불이익과 힘겨운 것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평안함과 기쁨을 주는 것들이라는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창세전부터의 예정과 계획을 따라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거듭난 분명히 땅에서 났지만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들 속에 와 계시는 성령의 열매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결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비감도 없고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은 그렇지만 현재의 우리들의 일상에 흔하지 않은 그런 목록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열매는 사실 육체적으로는 자신에게는 오히려 힘겨운 것이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특성이 있는 목록들이다.



Ⅰ. 성령의 열매(22~23)

이 말씀은 가장 빈번하게 다루는 메시지 제목이고 어떤 경우에는 한가지 항목별로 다루기도 하지만 증거되는 말씀만큼이나 삶에 쉽게 나타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실천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다룸에 있어서 각 항목의 이해보다는 좀 더 다른 면에서 접근해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 이것을 열매라고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과일처럼 보고 따먹을 수 있는 그런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나타나는 결과들로 의도적이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는 양분이 되는 걸음과 관리가 중요하다. 무화과나무에 적합한 걸음을 포도나무에 준다면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성령의 열매를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하고 이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진리와 생명의 영양분을 잘 공급받을 때 가능하다.

주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내려져야 할 것이다. 성령의 신령한 열매를 바라면서 세상의 양분을 공급하면서 신령한 열매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신앙지도자들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다.

열매는 정직하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

열매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 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7~28)

낱말 하나 하나의 의미는 자주 거론된 내용인만큼 전체적인 내용과 관계속에서 다루고자 한다. 먼저는 출발이 “오직 성령의 열매는…”(22ff)이라는 표현은 앞의 반대되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19ff)라고 한 세상에서 출발하는 일들과 전혀 다른 그 출처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임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육체로부터 나타나는 일들은 하나같이 벌레 먹고 병든 과일처럼 일그러지고 상하여 보기조차 안타까운 형태들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상한 것이나 병든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단순히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주어 지는 것들은 어느 것도 불완전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서 잘 못 다루고 자신의 것들을 섞으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완벽한 것만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너무나 유명한 신앙의 세 기둥이라고 하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한 것처럼 여기서도 사랑이 첫째이고 먼저이다. Bengel이라는 주경학자는 성령의 열매 중에 사랑이 아버지로서 나머지 은사들인 가족을 이끈다고 하였다.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이해이다.

율법에서부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계명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나로 압축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마22:37~40; 눅10:27)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여기의 “사랑[ἀγάπη]”은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이 바탕이고 그 사랑위에 마치 보석으로 지은 건물처럼 나머지는 하나같이 아름다운 열매들로 이 사랑을 완성하고 있다.

“희락[χαρά]”은 이 하나님의 사랑받음에서 오는 거룩한 기쁨이며 “화평[εἰρήνη]”은 범죄로 원수 되어 있던 사람이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고 역시 죄성으로 스스로를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데만 관계했던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람들 간의 화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 이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순서에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앞의 3가지가 하나님에서 이웃으로 연결되는 것들이라면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두번째 목록은 보다 사람과의 관계에 자기 희생으로 나타난다.

범죄한 마음은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이 불가능하여 조급할 수밖에 없다. 화평한 마음이 느긋하게 여유를 갖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시며(롬2:4)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나(약5:7) 사람간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자비[χρηστότης]는 로마서3:12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여 죄의 속성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자비를 사죄 속에서 누리는 남에 대해 부드럽고 인자하고 친절하게 선을 행하는 것이 자비라고 할 수 있다.

“양선[ἀγαθωσύνη]”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롬15:14)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엡5:9) “모든 선을 기뻐함과”(살후1:11) 앞의 자비보다도 좀 더 적극적인 사람 간의 덕행을 의미한다.

세번째 항목들은 이웃에서 자신으로 이어지는 덕목들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앞의 둘은 역시 이웃과의 덕목이라면 마지막 것은 자기 자신의 제어를 성령의 열매로 다루고 있다.

“충성[πίστις]”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되는 용어이기도 하지만(롬3:3, 12:3, 6) 사람에 대한 신실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다. ‘저 친구는 믿어도 손해날 것이 없다.’할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의 반대이다.

“온유[πραΰτης]”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에서뿐만 아니라 산상보훈의 복에서도 세번째로 나타나는 복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절제[ἐγκράτεια]”는 앞에서 “술 취함과 방탕함”(21)과 같은 자기를 방탕에 내던지는 것과는 반대되는 자기 절제로 그리스철학자들도 덕목으로 취급하던 내용이지만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육체의 욕구이다. 앞의 모든 열매가 가능한 것은 또한 자기 조절이 가능한 가운데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3) 했는데 ‘이러한 것을 금지할 율법이 없다.’는 의미이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세상의 법에도 저촉됨이 없이 오히려 칭찬받을 모습이다. 또 다시 확인하는 것은 이것이 세상에 난 육체의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Ⅱ. 육체로는 죽은 사람들(24)

이것은 지극히 사실이지만 겉으로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다. 또 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마른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미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자신이 이미 죽은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로마서6:6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죽는 이유를 증거한다. 오늘의 내용과 함께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육체의 일이 아닌 성령의 열매를 위한 것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의 과거 자신이 죽기전의 이름이 사울이었고 그 죽음의 시기나 장소는 분명히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충성된 다메섹의 하나님의 종 아나니아를 통해서 침례를 받은 순간으로 이해하여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번째의 제목 역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있는 당부라고 하는 데서 무게가 있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나름대로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열정과 의지가 살아서 한 모든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b)는 책망을 들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의 삶의 원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삶의 자세요 변화이다.

육신으로 난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삶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사실 수 없기 때문에 옛 주인인 내가 육체적인 것에 따른 모든 것이 죽어야 비로소 성령께서 주인 노릇하실 수 있기 때문에 주시는 명령이다.

이름이나 소속자체가 바뀐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이것은 땅에 어떤 가문이나 정당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표현하는 의미이다.

우리가 적어도 이런 이름으로 불려 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물론 그냥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더 소속이 분명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땅에 속한 어느 그룹이나 정당이나 명예로운 이름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불려 질 수 있다면 그 영광은 세상의 어떤 것에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믿습니까?

좀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뒤에 따라오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b)는 상태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인 이유가 된 것은 당연하다. 정욕과 탐심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것이다.

정욕과 탐심은 혼자 스스로는 절대로 죽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가능한 육신의 죄성이다.

사실 “정욕[πάθημα, ← πάθος, 고난, 색욕, (지나친)사랑]”과 “탐심[ἐπιθυμία, 동경, 정욕, 욕망, 갈망]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는 조금은 동물적인 근성을 가지는 표현으로 세상에 다른 방법이나 법으로는 도저히 다스려질 수 없는 것들이라는 데서 문제가 있다.

πάθος가 고난인 이유는 그것을 누리기 위해 처절하게 도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4:2f)했는데 사실 영적인 도전이 이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것을 다스리는 것은 죽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는 방법 외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의 도덕이나 법율로도 다스려지지 않아서 지금도 가장 많은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

야고보는 정욕과 탐심을 가장 쉽게 표현하는 것을 우리의 혀에 비유하고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정욕과 탐심을 채우기 위해 별 짓을 다하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아서 범죄하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다스려지지 않아서 망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가 우리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사실에 큰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할렐루야!

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ἐσταύρωσαν, ← σταυρόω의 직설, 과거, 능동, 3인칭, 복수](24)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과거완료형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무덤에 있어야 마땅한 우리의 정욕과 탐심이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역할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정욕과 탐심은 우리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는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처럼 스스로에게 이웃에게 끊임없이 피해를 가져오는 안타까움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걸 십자가에 죽이고 서야 그렇게도 기대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Ⅲ. 성령으로 행하라(25~26)!

마지막으로는 성령으로 사는 삶은 사라질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분노를 일으키거나 질투하거나 욕심내지 않을 것이라는 권면으로 끝내고 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이어 말한 바울은 다시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앞의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두가지를 두고 다시 [만일]이라는 가정과 함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자신을 권면의 대상에 포함시켜 더욱 간절히 그리고 가까이 당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 앞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18) 그리고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16) 하였다면 여기서는 다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자신의 의지나 세상의 도덕적 규범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하였는데 여기 “행하다”[στοιχέω]는 ‘줄을 지어 걷다, 군대가 정열하여 질서정연하게 발을 맞추어 행진하다, 경건과 덕을 이루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므로 “성령으로 행할지니”는 영적으로 흐트러짐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분명히 믿음의 삶은 언제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가 정연한 삶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면서 무질서한 고리도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f)거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 명령한 것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φθονέω, v21 φθόνος]”(26) 바로 앞의 v25이 성령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것은 육체의 일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헛된 영광[κενόδοξος, ← κενός 텅빈 δόξα 영광]” ‘자기 기만, 자부심이 강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스스로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영광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경계되는 사실이다. 이제 다음 시간에 이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겠지만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6:3)는 안타까운 표현을 읽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성령을 따라 성령으로 행하겠지만 그와는 반대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려 하는 텅 빈 껍데기를 구하는데 소요되는 모습이 서로 화평이 아니라 분 내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빼앗고자 하는 투기와 시기를 일삼게 됨을 경계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고 성령을 따라 성령으로 행하면 맺어지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열매이지만 역시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 때 가능하다.

성령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온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사람들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미 죽은 자신이 계속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죽은 육체속에서 사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영광을 얻기 위하여 상대를 노엽게 하고 투기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텅 빈 헛된 영광으로 그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아닐 때 있게 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