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삶은 과거처럼 육신의 소욕을 좇는 어두움의 삶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생활이다. 신앙 생활에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성령과 육체 중 삶을 주도하는 분명한 차이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육체의 약점이 얼마나 많은 가를 바로 알지 못하면 성령을 의지하지 못하고 희생의 십자가의 가치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성령의 열매는 자주 거론하면서 육체의 일들은 자주 거론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의적인 육신적으로 사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이 인류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일곱 세대가 사라져버린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모습이고 11:1~9에 인간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1:28~31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했는데 읽기조차도 행복하지 못하다.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15가지의 일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로마서에서는 무려 21가지의 하나님 없는 죄악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불신의 세계속에서 있을 수 있는 것들임을 새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경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바른 사람으로서의 삶은 오늘 제목처럼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만이 누릴 수 있는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속에서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오늘 내용에서는 먼저 육체적인 일과 성령의 일을 비교(16~18)한 다음에 먼저는 육에 속한 일들을 거론(19~21)하고 다음에 다음 주에는 자주 거론되는 내용이지만 성령의 일들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 각자의 실제적인 삶을 확인하고 적용했으면 한다.
Ⅰ.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라(16~18)
이 말씀은 v18에 v16이 도치(倒置)된 듯하다. 이미 성령의 인도는 거듭남의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만 한다면 이제는 더이상 육체의 소욕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쉽게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가야 할 것을 권면하면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물론 이 당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는 권면인 동시에 또 거듭난 사람들에게 만이 가능한 명령이기도 하다.
육체의 이끌림을 받기 쉬운 우리에게 바울은 먼저 당부하기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16f) 여기서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듯 호소한다. 또 이것은 어쩌면 바울 사도 자신이 철저히 경험했던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호소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자신이 바리새인의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괴롭혔고 심지어 하나님의 참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였던 육신적인 열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깨달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 매를 버는 배은망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경계하는 것은 성령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은 반드시 이해하지 못할 신비한 어떤 역사만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보혜사이신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로 지도하시고 위로하시고 책망하셔서 지극히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확정을 위해서 주셨던 그런 신비로만 성령의 인도와 역사만으로 이해하고 시도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중 성령의 역사를 언급할 때 더욱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지만 성령의 인도는 곧 복음과 함께 주신 새 계명 즉, 사랑의 말씀과 함께 하여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켜 삶을 하나님의 의지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가끔 동찬이 형제가 교회 단톡에서 쓰는 Fix your eyes on Jesus! 예수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하라! 는 말씀이 사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권면과도 관련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과거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Fix your eyes on Jesus!를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직장을 보고 가정을 보고 교회를 보고 형제를 보는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으로 살 것을 가르치는 표현이다. 사실 우리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는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할 때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삶을 당부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요청이다. 특히 여기 뒷부분의 “행하라!”는 명령을 좀더 가까이 이해하면 “행함[περιπατέω, 살다, 행동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너희의 관념이나 생각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물론이고 삶과 행동 모든 인격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인격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항상 문제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라 산다고 하면서 삶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b)는 약속이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아무리 신앙을 잘 해 보려고 애써도 그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 더 쉽고 분명한 것은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과거 육체의 소욕 보다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v16은 v18에 도치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가 사실적으로는 오히려 앞에 있어야 할 내용이다. “인도[ἄγω, 이끌다, 운반하다, 권유하다, 끌어넣다]”라는 말이 어려운 말은 아니다.
또 이 v18은 v16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조건과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 믿음은 내 자신이 무엇을 해 보겠다는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고 하였다. 믿음이란 언제나 수용(受容)이고 의탁(依託)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성령에 이끌려 삶을 맡기는 자세는 이미 조건의 계명인 율법에 매여 있는 삶이 아니라는 데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는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신앙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가까이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의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따라 이런 표현까지 써보고 싶다. 믿음은, 신앙은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다. 좀더 순화하면 나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지 못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고 애쓰고 세상 종교와 별로 다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영이 나의 인생전체를 운반[ἄγω]해 가시는 것이다. 언제 어디까지? 나의 일생 다 가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라는 두 시간적 긴장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중간에 끼여 있는 v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절대로 이 두가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육체의 소욕[ἐπιθυμέω, 마음을 두다, 즉 갈망하다, 탐하다, 바라다, 기꺼이~하다]”과 “성령의 소욕”은 하늘과 땅의 전혀 다른 출발지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절대로 함께 할 수 없고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17f)
당연히 이 둘은 서로 협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쪽 모두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b) 그럼에도 이러한 고민은 믿음의 사람들 만이 가지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은 갖지도 하는 어려움이다.
세상을 거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만이 겪는 갈등으로 이러한 갈등 속에서 자신이 도저히 불가능함을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포기하고 성령을 따라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로마서를 강론하면서 바울의 갈등과 함께 거론한 바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8~19)라고 탄식한다.
그러한 자신을 향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한탄하지만 다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f) 라며 그런 육체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음을 감사함을 볼 수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 이 말씀을 또 다른 면에서 이해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율법에서는 이미 자유로운 사람 즉, 육체의 소욕을 좇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양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느 쪽을 따르느냐 하는 것은 신앙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이왕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다면 그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이나 단순한 마음의 결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하늘의 열매를 맺는 믿음을 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
Ⅱ. 육체의 일들(19~21)
여기서부터는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일들을 나열하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 어두움의 모습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경계하는 말씀이다.
별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복된 것은 더더욱 아니므로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는 이유는 사실 이런 현상이 신앙하는 사람들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므로 경계적으로만 간략하게 생각하였으면 한다.
사실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를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2~23)고 증거한 바 있다.
그럼에도 신앙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영원한 영광의 약속인 영생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늘 하는 말씀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인생의 마지막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부터의 삶의 연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뒤집어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거론되는 열 다섯가지의 범죄는 십계명처럼 하나님께 그리고 부모나 이웃으로 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여 진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관계되는 내용들 별로 나눠보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 같기도 하다.
※가장 일반적인 육체의 욕구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부부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성적인 욕구의 모습이라고 보여지는 대로 맨 첫 순서에 나타나고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19)
소돔성에서 천사가 롯을 찾아 갔을 때 그 성 사람들의 태도에서 나타나(창19:5)고 하나님의 법에 어두운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 때의 베냐민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같은 태도로 레위인을 대하고자 했다(삿19:22). 그런가 하면 요즘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유튜브조차도 여기에 소용되는 약품들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고 있다.
이런 발상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숭배의 산물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죄를 두번째로 언급하고 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20f) 바울은 로마서1:23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우상숭배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우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범위가 넓다(돈 명예 권력 등등).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이라 이름 붙인 것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여기 나타나는 “주술[φαρμακεία, 약물, 약학, 마술]이란 미신에 의한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우상숭배로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대인관계의 문제들로 형제 사랑을 잃어버린 부조화의 죄로 일어나는 일들이 가장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20b~21ff) ①원수 맺는 것은 사랑의 반대 개념으로 뒤에 이어지는 모든 죄들의 원인이 되는 보다 근본적인 사람관계의 부조화이다.
②분쟁과 시기는 “다툼과 시기”(고후12:20b)로도 원어상으로는 같은 낱말이다. 마음의 원망이 분쟁으로 나타나고 시기는 원망하는 대상보다 열등감에서 올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③분냄과 당 짓는 것은 시기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분노가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분냄은 좋아하지 않는 상대의 반대편에 당을 짓게 되는데 “당 짓는[ἐριθεία]”이 ‘고용되어 일하다’라는 어원에서 볼 때 분노에 고용된 상태로 행하는 것이다.
④분열함과 이단은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라 인간 관계속에 부조화로 앞의 당 짓는 것이 보다 구체화된 것으로 분쟁을 일으켜 편당으로 나눠지는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⑤투기는 사람 간의 부조화의 결론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마음 상태로 하나님께 붙잡힘을 받은 선의(善意)의 상태가 아닌 악의(惡意)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앞에 비슷하게 시기가 있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이 이 투기(φθόνος)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악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죄목들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21f) 자기 자신에 대한 무절제의 죄들로 순서를 바뀌어 있지만 마지막 시대에 금지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권면에 나타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13:13) 분명히 하늘의 영원한 유업을 바라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이런 것들의 경계는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뿐만 아니라 끝임없이 항상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경계해야할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이기 때문에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21m)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별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부정적인 것을 하지말라는 주문 보다는 오늘 제목처럼 이 모든 것을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도 남는 보다 적극적인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신앙의 자세가 오히려 더 바람직한 것은 당연하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마지막에 붙이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b) 이러한 내용도 히브리서에서 같은 권면으로 들을 수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다시 로마서에서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하여 육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계속 죽어가는 삶이 되어야 영원히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함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생명이 풍성한 삶의 원리이며 다음 시간에 다루게 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적극적인 삶의 비결이다.
그렇게 될 때 육체의 소욕은 그 이름조차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유업을 받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