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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2:6~10 2021-08-08
또한 내게 역사하사,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라비아로 가서 계시를 받고 다소에서 십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계시를 성경으로 확증하고 그리고 그것을 본래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예루살렘에 올라가라는 계시대로 올라 갔었노라고 증거하였다.

올라가서 이러한 자신의 경험과 사역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나 이름있는 지도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제시하여 인정을 받았지만 과거의 율법이나 할례를 주장하는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한 순간도 종 노릇하지 않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함께 선교에 참여했던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다만 지난 시간에 중요한 주제였던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b)는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되짚었으면 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이름에서부터 말씀인 성경, 그리고 그분의 계획과 예언을 비롯해서 불변하시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모두 진리라고 말해도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특히 진리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하심으로서 이 진리를 사람들이 어떻게 알게 되며 그 진리가 주는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는 죄와 무지에 있던 사람들을 그 안타까운 메임에서 풀어 자유케 해 줄 것이라는 아주 중요한 생명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위해 행하신 구속사역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꼭 같은 삶을 죄 없이 사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내신바 되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다가 그 자신의 희생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실 약속이 중심을 이루는 인류에게 있어서 최종의 진리인 것이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족장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사도 지나칠 수 없는 엄청난 진리로 물론 거기에서부터 메시야는 예언되고 있지만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가 중심에 둬야할 진리는 아니다.

족장시대 말미에 모세를 통해서 사람의 죄를 낱낱이 발가벗기는 율법도 분명히 완전히 지키면 살 수 있는 진리이긴 하지만 사람의 죄성 때문에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데서 역시 우리 교회의 중심에 둬야할 진리는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중심 한 진리만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완성하신 구원의 진리로 오늘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품고 살아야 할 진리이고 교회가 받들어 섬겨야 할 중심된 진리인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족장들에게 주었던 진리나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어떤 진리도 중심삼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b)는 말씀을 깊이 헤아려야만 한다는 말씀이다. 복음의 진리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진리 중에 업그레이드된 가장 최신버전이라고 확신한다면 과거의 율법의 어떤 부분을 가져올 필요가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셔서 복음의 일꾼을 삼으신 것 자체가 사실 인간적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고 여기에 감히 ‘왜, 그렇게 하셨나요?’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유명하게 만드셨다. 그런가 하면 또 모세나 바울처럼 공부를 많이 시킨 사람들도 거기에 맞게 훈련시키셔서 적절하게 쓰셨다. 사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사도들은 그다지 유명하거나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먼저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들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그들과도 교제를 가지기를 원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들을 만나고자 했지만 그들은 순순히 만나 주지도 않았다.

교회 속에서 이름이 있고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그들일지라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 더 중요하거나 유리한 것을 주지 못했다. 아라비아나 다소에서 직접 확인한 것에 더해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겠다고 증거한다.



Ⅰ. 하나님의 맡기심에는 차별이 없다(6)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 알려진 분이셨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전하는 사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적과 표적을 행하면서 기존의 유대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역시 유명한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바울 자신을 비교해 보면 다메섹 같은 변방(邊方)에서 시작한 바울의 입장에서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베드로를 비롯한 본래의 사도들이 유리한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베드로와 다르지 않은 이적과 표적들을 행하게 하셔서 역시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심을 증거하셨다.

베드로 -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5~16)

바울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인정이나 도움을 받아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어떤 신앙적 교훈이나 행해야 할 것을 더하여 주지 않았다는 바울의 확인이다.

여기에 또다른 이해는 이 v6의 ( )안에 기록되고 있는 내용이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것은 바울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유명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꾼으로나 관계에 있어서의 자격을 다루는 내용이다.

먼저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라고 하여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명인사이든지 능력이 있고 없는 것에 자신은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실제로 바울 자신을 두고 생각해도 그럴 것인데 하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일꾼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본래 충성된 사도들 가운데서 뽑아 쓰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고 거역하던 자신을 사용하신 것에서부터 감격과 신비가 있었다. 자신의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도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명성이 있고 없는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의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다르지 않은 즉, 자신의 이러한 성격이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것은 분명 이 서면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적으로 뽑았다면 분명히 나와 같은 사람보다는 더욱 외모적으로도 잘 갖춘 사람을 뽑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겉으로 나타나는 세상적으로 잘 나고 훌륭한 사람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순종하려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Ⅱ. 역사하사, 역사하사(7~8)

분명히 바울과 베드로는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이나 모든 것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이들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셨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독특하게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기를 “무할례자, 할례자”로 표현한 것이다.

앞에서도 최초의 이방인 전도는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였음(행10장)을 말한 바 있고 거역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선언한 사실을 다룬 바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는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흔적들도 교회의 확장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행18: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19: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7)이것은 자신과 베드로에게 업무분담을 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 차별없이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생명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이미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대로 두 사람을 준비하셔서 각자에게 적절한 역할을 맡기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인간적인 눈으로 봐도 적절한 것 같이 보인다. 당시 지혜와 학식을 가치 있게 여겼던 그레꼬로망 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바울 같이 외형적으로도 준비된 사람의 역할이 더 효과적인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바울이 사람의 지혜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고전1:18~2:8)과 배움이나 학문적 식견이 부족한 베드로가 같은 말을 하는 것과는 그것을 듣는 그리스인들에게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직임의 구분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맡은 역할의 힘은 역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다음 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8)

이 말씀의 중심은 두번씩이나 “역사하사, 역사하사”이다. 이 “역사하사[ἐνεργέω, 에너지를 주다]”는 낱말의 의미적으로는 ‘활동적이게 하다, 효과적이게 하다’라는 뜻이지만 더 깊은 의미는 역할이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에너지 즉, 힘이나 능력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에너지 즉, 능력을 주신분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학문이나 지혜나 능력이나 심지어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고백은 단순한 겸손으로 볼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어떤 것으로 하려고 덤비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의 지혜인 철학, 사람의 힘인 권력, 사람의 능력인 돈, 사람의 동원능력인 정치 이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해서는 별로 유용한 가치가 없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서 감당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이다. 성경은 신앙하는 사람의 당하는 시험조차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임을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그분의 일을 한다고 하는 일꾼들이 더욱 이러한 원리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바울조차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8)고 말하고 섬기며 일한다면 오늘 우리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이 이 마지막 시대의 일꾼들이 이러한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덤빈다는 사실이다.

또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8)는 고백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람의 차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면 누가 일하려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탈출할 때나 요단강을 건널 때 흔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나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신 기적만을 생각하기 쉽다. 만약에 수영을 해서나 배를 타고 건너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예외 없이 발로 걸어서 건널 수 있게 기적을 베푸신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에 건너가는 즉, 들어가는 조건이 모든 사람이 다 가능하다는 의미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에 수영이 가능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배제되었을 것이고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면 그 배를 이용하지 못한 사람은 다 제외되었을 것이지만 걸어서 건넜다는 의미는 어린아이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홍해나 요단의 기적을 그냥 기적으로서만 아니라 이런 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기적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셨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 하나님만 가능함을 그 사건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베드로에게 에너지를 주셔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같은 능력을 주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역사하셨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각자 역시 생명을 전할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이 마지막 시대에 모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구하는 …



Ⅲ.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였다(9~10)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계시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사도된 이들을 결코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의 거듭남을 믿지 못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회심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하고 접근을 더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행9:27).

그러나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는 말씀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바울과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나에게 주신 은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도 인정하는 겸손으로 가능함을 서로에게서 보는 것이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9f) 여기에 거론되는 인물들의 순서가 좀 독특하다. 대개 사도의 수장인 베드로를 먼저 거론하는데 여기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가 먼저 거론되고 베드로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든 요한 사도까지도 거론하고 있다. 마치 NT성경의 공동서신의 순서처럼 표현하고 있다.

또 이 부분을 볼 때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올라 간 때에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율법문제의 적용을 다룬 사도행전15장의 상황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이해도 가능할 것 같다. 그 회합의 최종적인 결론을 정리한 사람이 사실 야고보이기 때문이다(행15:13~21).

여기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는 것이다. 잘못되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자신에게만 주신 은혜를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는데 여기에서 바울의 겸손을 보는 것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세 사람 그들을 개인적으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감당하는 일들을 보면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은혜주신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올바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도 바울처럼 인정하는 사람이다.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9m) 그들이 처음에는 비록 바울의 회심에 의구심을 가졌을지라도 바나바로부터 바울의 경험한 은혜를 확인하고 자신들과 같이 일꾼됨을 인정하고 같은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자로 받아 드렸다는 결과를 증거하는 것이다.

비록 섬김의 영역이 다를지라도 같은 복음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b) 자신과 바나바는 처음부터 이방인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들은 할례자들 즉,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것을 서로가 인정한 것이 교제의 악수를 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복음으로 더해 준 것은 없었지만 그들로부터 부탁받은 것이 한가지는 있었는데 그것은 평소에 바울과 바나바 또는 실라와 더불어 복음을 전하면서 힘써오던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그다지 새로운 문제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증거하고 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10) 이것은 예루살렘에 처음 교회가 탄생에서부터 자연스러운 것(행2:44~45, 4:34~37)이었고 이 구제의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질 때 예루살렘 교회는 그 일을 위하여 특별히 일꾼을 뽑아서까지 그 일을 전담하게 했던 것을 사도행전6장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부터 이 일에 본을 보였던 바나바가 함께 한 바울의 전도여행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이방에 끼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에는 이방인 교회가 이 일에 동참했던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11:29~30; 롬15:26~27 -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10)는 바울의 고백은 조금도 꾸밈이 없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유명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복음을 맡기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겉으로 나타난 것에만 가치를 두시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몸을 구성하는 그분의 지체된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은 자세로 사람과 복음을 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만들어진 그대로를 하나님 나라에 쓰신다. 베드로에게 바울에게 복음을 위해 일할 에너지를 주셔서 쓰셨다면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원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는 기둥같이 귀중하게 사용하는 일꾼이 있을 수 있고 가벼운 역할을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일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어떤 직책을 맡았든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나뿐 아니라 또 다른 지체들에게는 나와 다른 은혜를 주셨음을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협력하여 복음을 확산시키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