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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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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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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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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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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서의 논증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신 이는 선배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거기에 관련된 사실들을 들어서 증거하였다면 이 2장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 조차도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했고 베드로 같은 수사도일지라도 소신을 잃고 행동할 때 그를 얼굴을 보면서 책망할 정도로 동등함을 증거한다.
이것은 사도권에서 만이 아니라 복음 속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율법시대처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모든 신앙과 예배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은 더 이상 없다.
OT시대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계보가 있고 그에 속한 계급들이 있었지만 복음속에서 이것은 모두 완료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제사하던 레위가문에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다면 복음속에 모든 성도는 각자의 마음을 성전 삼으신 하나님의 제사장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중보자 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5:10, 20:6; 벧전2:5, 9)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요, 온전함을 위하여 계속 세워져 가는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포함한 구별되어야 할 예식들에나 믿음의 과제들 속에서 거듭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나누어 감당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성례] 라고 하는 것을 성경속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맡겨지지 않았다. 오직 한 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종(從)으로서가 아니라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ἀπόστολος(ἀποστέλλω), 사절, 복음의 사신, 그리스도의 전권대사, 사자, 보냄 받은 자]”라는 직분(행1:21~22)은 사람이 세우거나 키울 수 있는 그런 직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보내심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서 배우고 길러지는 사람이라면 이미 사도라고 할 수 없다.
특히 계속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이런 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 아시아와 유럽에 뿌린 복음의 가치가 추락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지나치리만큼 자신의 사도권과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힘쓰고 애쓴 것들이 사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다메섹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러한 복음의 반대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핍박자였던 자신을 그 복음의 일꾼으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고 아라비아에서 주신 계시와 물러나 있던 자신의 고향 다소에서 받은 계시를 성경을 상고하면서 예전에 열심이었던 율법을 비워내고 확인한 것으로 충분히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나름대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바울이 선교의 동역자로 다른 사도가 아닌 바나바와 함께 한 것은 다른 사도들은 바나바 만큼 바울의 변화를 믿지 못했고 포용력이 있는 바나바 만이 바울의 변화를 확신하고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의 일로 나눠져서 대신 실라와 함께 하였지만(행13:13, 15:36~41) 바울을 바나바와 함께 엮어 주신 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배척당했고 그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으로 인하여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고 선언을 하고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이방인 상대로 복음을 전한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처럼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할 수 있는 이방인교회는 주로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고 나중 이 문제는 사도행전15장에 예루살렘교회에까지 이슈로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수 천년의 세월동안 계승되고 전승된 율법이 과연 당시에 짧은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복음만 못하겠는가!’하는 의구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더 오래되고 전통 있는 율법도 지켜져야 하지 않느냐!’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었지만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기간이나 사람의 많고 적음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 원리는 오늘도 여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오래 계승되어 오던 전통이나 관습보다는 ‘어느 것이 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는가!’를 찾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사실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증거되고 확산되는 복음이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기를 원해서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고 이것 역시 자신의 의향이기보다는 계시를 따른 것(2)이라고 증거한다. 바울의 사역은 그와 함께 하였던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에서 보더라도 언제나 자신의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움직였음을 보게 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는 내용에서 아시아의 북쪽으로 가기를 애쓰는 바울의 생각과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성령의 의향속에서 바울은 성령의 계시를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좀 많아 진 것 같지만 오늘의 논지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받고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받은 복음을 OT의 하나님의 언약속에서 확인하고 이것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직접 따랐던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았다는 확신이다.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역시 믿고 행하는 각자의 삶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소신 있게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부정적인 ‘~않게’라는 두 제목으로 생각하고 마지막 v5을 결론으로 나누고자 한다.
Ⅰ. 복음을 위한 일들이 헛되지 않게(1~2)
어떤 경우 우리는 실컷 수고하고 애쓰고도 그 애쓴 것들이 가치를 잃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나 어떤 사람들의 위신을 생각하다 그런 경우들을 더러 당하게 된다. 바울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자신이 올라 간 것은 자신의 입지나 위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들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증거한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1) 자신과 주로 사역하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적어도 이유와 목적이 있었음을 다음 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십사 년 후에”는 V18에 “그 후 삼 년 만에” 라는 표현처럼 예루살렘방문 시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물론 당시에 이 편지를 받아 읽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분명히 알겠지만 오늘의 시점에서는 분명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14년인지 앞서 1:18 방문한 후로부터인지 아니면 다소에 머문 후 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또 시간적으로는 좀 차이가 있더라도 사도행전15장의 안디옥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이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때인지 여러 가능성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요점은 아니다. 다만 바울은 이런 시간에 대해서도 분명함을 본다.
함께 올라간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한가지로 인정하는 사람인 바나바와 이방인 출신인 디도를 함께 데리고 올라 간 것도 물론 바울의 복음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을 허문 모습 그대로였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가문 사람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바나바는 그의 별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나바, Βαρνάβας (랍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행4:36).
디도, Τίτος (돌보는 사람, 양육자)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살피고 돕도록 보내져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고후7:6~7) 역시 바울에게 중요한 동역자였던 사람이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
예루살렘 방문은 단순히 자신의 원함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계시를 따라 올라가” 라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복음에 충실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계시가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은 직접 받는 계시는 완료되었지만 기록된 완벽한 계시가 있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4:6m)고 경계를 하여 주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창12:4)고 기록되고 있다. 바울은 어디를 가도 계시를 따라 움직였다면 우리 역시 믿음의 어떤 역할이든지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2m) 이 부분의 말씀을 따르면 사도행전15:12의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라는 내용과 같아서 예루살렘 회의 때 올라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깝게 여겨진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적을 베푸셨던 경험을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에게는 개인별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 이유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고 증거한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b) 가득이나 유대인들의 반대를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본래의 사도들로부터 이단시된다면 그동안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방인 구원의 역사적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의 전체에게 또는 각 사도들에게 사사로이 증거했다는 고백이다.
어쩌면 우리 믿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헛일이 될 수도 있고 우리 한 사람의 경건한 삶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 거짓에 종 노릇하지 않게(3~4)
우리가 세상에서 죄에게 종 노릇 하다가 복음을 순종하여 자유하고 의의 종으로 사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나 이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이다. 그럼에도 짐짓 잘못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거짓에 종 노릇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도 건전치 못한 신앙인들에게서 얼마든지 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감히 부탁하건데 종교의 종 노릇하지 말고 진리의 자유를 누리라고 부탁하고 싶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종노릇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노릇은 다른 표현으로는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지만 섬김에 있어서는 생명을 다하는 종으로 섬기듯 충성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3) 이 말 자체는 두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디도가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바울이 강요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나 주변에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끝까지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말렸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일과 더불어 비교해볼 수 있는 인물이 바울과 함께 한 사람 중에 디모데가 있다. 디모데의 경우에는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여자인 것으로 나타나지만(행16:1) 이어지는 v3에 보면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는 완전히 이방인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두 사람의 동역자들에게 바울은 각각 다른 형태로 이 할례의 문제를 받아들이게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역시 복음의 확산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고린도 교회에 증언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b)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b, 22)
그렇다고 바울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괜찮다는 식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자유를 실제적으로 누리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복음으로 한 사람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입장이 어떻게 되든지 오히려 그것을 선택할 정도로 진리와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중 다시 보게 되겠지만 5: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믿음의 귀중성을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m) 하였고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9) 증거하고 있다.
물론 할례는 율법 이전의 족장 때부터 내려온 것이고 정확하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바로 직전인 99세때에 주신 언약(창17:9~14)으로 이삭과 야곱 대대의 후손들에게 전승되었지만 율법속에서는 오히려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율법의 집결판이라고 하는 신명기에서는 오히려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신다(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30:6b-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
우리 주님께서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0:1b)라고 말씀하셨는데 “가만히 들어온[παρείσακτος, 모르게 들여온, 밀항, 간첩], 가만히 들어온 것은”은 분명히 당당하지 못한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다. 또 “거짓 형제[ψευδάδελφος, (ψευδής, 거짓된, 잘못된, 사기의, 사악한 + ἀδελφός)]들 때문”이라 한 것도 마태복음24:24의 “거짓 그리스도[ψευδόχριστος]들과 거짓 선지자[ψευδοπροφήτης]들”(막13:22)과 같은 형태이다.
여기 “거짓 형제”라 한 것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믿음의 백성들에게 사용하는 “형제”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 보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호칭이 형제였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쓰고 있는 것이지 긴밀한 우정과 사랑을 담은 “형제”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 여기 자유란 당시의 사실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을 생각하며 사용한 것이고 종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은 그 자유를 얻었던 사람을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는 안타까움을 마음에 두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과거에는 죄와 사망의 종 노릇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믿고 순종하므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8)는 바울의 선언을 듣는다. 바울의 이 안타까운 표현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의 정죄아래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거짓 스승들에 대한 경계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고 이방인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경계되는 중요한 교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 하는 삶을 살다가 거짓된 유혹에 빠져 경건치 못한 부류의 무리에 들어가 정열을 다 바치거나 또 다시 세상의 죄악 된 지배아래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렇게 되지 않을 방책을 오늘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Ⅲ. 결론(5)
그런 거짓된 교훈에 한 순간도 복종하게 되지 않는 방법이 바로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닌 복음의 진리가 항상 가운데 있어야 한다.
항상 사람의 생각이나 입장, 그리고 문화가 고려될 때 “복음의 진리”를 잃게 되기 때문에 한 순간도 거짓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은 기회를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나는 거짓된 것 잘못된 것을 듣는다고 해도 적어도 진리와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는 교만 아닌 교만으로 잘 못 가는 어리석음을 더러 볼 수 있게 되는데 차라리 그런 자기과신 보다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중심에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복음을 위한 다른 사람들과 나의 수고와 애쓴 것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의 지시나 명령에 철저해야 한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명히 구분하고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에게 기회를 주거나 종 노릇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경계하고 있다.
이것을 위한 장치로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우리 가운데 다른 것을 둬서는 안된다. 언제나 복음의 진리가 중심이 되는 교회와 성도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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