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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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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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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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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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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의 말씀에 조금 보충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b) 복음은 사람이 아무리 좋은 소식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끝까지 복음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뜻으로 만들 수 없고 온전히 하나님의 지혜에서 준비되고 선언되고 실현된 사람의 지혜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이다.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사는 원리는 꿈에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살게 된 복음은 오히려 사람의 지혜에 있어서는 미련한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장에서 이것를 몇 번 언급한 바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18)이라 하였고 v21에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 했으며 v23에서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지혜인 복음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앞에서 거론했던 다메섹과 아라비아를 부연하면 다메섹은 바울에게 있어서 삶의 이정표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다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이 붙잡힌 바 되어서 지금까지 가던 길을 완전히 U-Turn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인들에게 그 주님을 증거하고자 성령의 부추김을 받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자신이 증거해야 할 복음과 역할을 주님과 신령한 교제로 명령받는 또다른 전환의 장소였다.
지금까지 박해하던 그 교회를 즉,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은 과거의 모든 그릇된 배움이나 생각을 쏟아버리고 라야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새롭게 되짚어 보는 복음의 새로운 지식을 채우는 곳이기도 한 곳이 바로 아라비아였을 것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한번쯤은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하겠다는 열정과 사명을 의식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부족했던 것들을 해결 받는 그런 그리스도와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채워지면 다시 준비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반드시 돌아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지난 시간 마지막에는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7)고 자신의 역할의 회복을 증거하고 있다.
중세에 까지도 많은 수도사들은 수도원이라는 곳에서 경건을 훈련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내는 일들을 역사 속에서 보는데 그것은 이 바울 사도가 보여주는 모범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아라비아는 반드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메섹을 위하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냥 아라비아에서 계속 머무는 것으로 끝내면 안된다.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으로 돌아가서 오늘은 다메섹과 아라비아와는 전혀 다른 복음의 발생지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 술회하고 있다. 아라비아에서 얼마를 머물렀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그곳에서 주님과 신령한 교제를 끝내고 다메섹에 돌아온 바울은 상당 기간을 사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다메섹을 빠져나오는 것도 유대인들의 바울을 죽이려는 흉계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도움을 받아 밤에 광주리를 타고 빠져나온 것으로 사도행전9:23~30과 고린도후서11:32~33에 함께 기록되고 있다.
사실은 이때까지도 바울이라는 이름보다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구브로(키프러스) 섬의 바보라는 곳에 가기까지는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나타나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13:9)라는 역사를 계기로 이름은 바울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다루는 전체적인 내용은 앞에서 이미 말했던 대로 사도들 같은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적인 증거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보름 동안의 짧은 기간동안 그곳에서 베드로와의 만남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조차 만난일이 없다고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예루살렘에서는 이런 길지 않은 기간동안 머물렀고 이 때도 사도들은 바울의 회개를 믿지 못하여 만남을 꺼려했던 것 같고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 답게 바나바가 바울의 다메섹에서의 변화를 증거해서 사도들을 설득하고(행9:26~27) 그 결과로 베드로 조차도 만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 부분은 내용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겠다.
Ⅰ. 베드로와 야고보와 만남(18~20)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방문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오랜 기간이 아니라 고작 보름정도의 기간에 불과해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도들로부터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배울 만한 만남이 아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18) 대부분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에 돌아오고 그후의 3년이라는 표현보다는 최초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3년이라고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아라비아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역사를 직접 계시로 알게 되고 이렇게 알게 된 바울의 계시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또 다른 신비를 보게 된다.
쓸데없는 생각일지라도 바울이 육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은혜의 역사를 조금만 빨리 바르게 알았더라면 다메섹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재판으로 죽인 스데반을 포함한 사람들의 수가 조금은 감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람들의 안타까움이고 그 순교한 사람들의 희생이 찰 때까지 바울이 핍박자로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이해도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계시록에서 확인하게 되는데 6:9b~10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라고 묻고 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v11에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순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안에서 가능함을 배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라는 우리 사람으로서는 안타깝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 흘림의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는 것으로 봐서 피 즉, 생명의 헌신이 어쩔 수 없음도 보게 된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18f)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게바”는 물론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따르고 가르침을 받았고 약속대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베드로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강권적으로 선택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의 만남은 그 만남 자체도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어느 종에게나 다르지 않아 최후의 만찬석상에 있지 않았던 바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을 이방인들의 교회에 그대로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5)
“…그와 함께 십 오 일을 머무는 동안”(18b) 아무리 베드로의 가르침이 교육학을 전공한 교사적인 소양이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15일 동안에 복음의 전부를 다 가르치지는 못할 것이므로 보름 동안 베드로와 머물렀다는 것은 바울이 받은 계시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도들로부터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확증하는 내용이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9) 이어지는 내용역시 베드로 외의 다른 사도들은 전혀 만나보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야고보 만을 만날 수 있었다는 나름의 고백이다.
이 사실은 다음 장인 2:9에서 다시 확인을 하고 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20) 바울은 자신의 진실성을 나타낼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후2:17, 4:2).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렇게 확신을 주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의 사도권이 선배 사도들에 의해 받은 것이 아님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 같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이런 진실성의 증언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 [맹세]를 사용하는 것처럼 거짓을 말하면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을 쓴다면 말할 수 없이 큰 죄가 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적어도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는 진실이고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역시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상대의 이런 표현에 신뢰를 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어디에나 변함없이 계시고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말할 수 있는 진실은 믿음의 세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말뿐 아니라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확신과 고백으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꼭 하나님을 들먹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들의 말이라면 서로가 신뢰를 가질 정도의 신앙이 중심된 삶과 관계가 된다면 오늘의 이 안타까운 시대의 교회들의 위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롬3:4f)라고 하여 하나님의 진실됨을 증거한 바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 역시 진실됨으로 대변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사도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이 중요함 같이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말이 바울처럼 진실 됨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다.’라는 정도의 신앙의 풍토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호소력이 있어질 것이다.
Ⅱ. 박해자의 변화로 인한 영광(21~24)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행전9:26~30의 내용과 일치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바나바의 역할은 말하지 않았지만 바울을 꺼리는 사도들에게 바울이 다메섹에서 겪었던 일들로 사도들을 설득시켜서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행9:27).
특히 이 뒷부분의 내용은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행9:29~30)는 사도행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다가 죽이려는 위기를 당하게 되고 바나바를 비롯한 바울을 아끼는 형제들에 의해서 수리아를 거쳐서 길리기아의 바울의 교향으로 보내짐을 이해하게 된다.
아라비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이심을 계시로 체험하는 귀중한 기회였다면 이제 바울의 고향이었던 다소에서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좀더 깊이 있는 OT 성경연구가 이루어지고 자신이 받은 계시에 성경적 논리를 더하여 이방인들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전도자로 사도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21) 두 곳 모두 중요한 요충지로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은 나중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중심지로(행13: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일이 있기 전에 바나바가 다소에 가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가르친 것으로 나타난다(행11:25)
다른 한곳인 길리기아는 그리스 문명을 꽃피운 헬레니즘의 중심지라고도 하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수도인 길리기아 역시 1세기에 유명한 도시였다. 어쨌거나 다메섹에서 죽임을 당할 뻔했던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도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결국 그의 고향으로 보내지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을 만나기 전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사실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6)
그러나 또 한가지 쉽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22) 한 것처럼 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고 역할을 했던 바울의 얼굴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제외한 남쪽 지역을 말하는 유대의 사람들이 바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유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제거하려 한다는 안타까움으로 예루살렘 밖에서 라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들 역시 바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는 것을 꺼렸던 이유 때문에도 가이사랴를 거쳐서 길리기아로 보내졌던 것 같고 이 역시 바울을 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만약에 그의 고향 다소에서 신앙적 성숙을 갖기 전에 선교에 나섰다면 바울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결국 바울 자신의 복음을 위한 열정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이러한 일련의 이유들이 최종적으로는 바울을 바울 되게 하는 섭리였음을 바울 자신조차도 나중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 나온 고백이 바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유명한 선언이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은 바울뿐만 아닌 그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데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록 얼굴로는 알지 못하는 그들조차도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23) 라는 반응이었다. 바울의 그리스도를 만나 변한 그의 삶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각자의 그리스도인 된 사실도 바울만큼은 아닐지라도 많은 교회나 사람들에게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앞에서도 이미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지만 늘 교회에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사람의 그리스도인 되는 변화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던 사람의 변화는 그만큼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복음에 우호적인 사람에게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할 이유를 보게 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4) 바울에게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전하는 반전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고백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고백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 자신이 구원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은혜이지만 우리의 구원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하고 이것에 마음을 둔다면 우리 주변에 많은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던 사람이 사실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가 된다면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일이 아닐지라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울과 같은 변화된 삶이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주님의 신부된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임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한다. 우리 모두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4)는 바울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 변화는 다음 장에서 고백하고 있는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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