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갈 1:11~17 2021-07-18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미 갈라디아교회에 주신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비록 천사가 전할지라도 저주를 받고 그것을 듣고 순종한다면 그런 사람들까지도 비극이 될 것을 말씀한바 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며 자신이 기존의 사도들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계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런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과거 유대교에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완전한 변화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자신을 갈라디아 교회를 비롯한 이방인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이 일에 뛰어 들기전에 자신의 육신의 가족들과 의논하지 않고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위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고 고백한다.



Ⅰ. 사람, 사람, 사람에게서 가 아니다(11~12)

바울은 비록 늦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이거나 먼저 사도 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며 어떤 교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한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은 사도들이나 바울 같은 일꾼들을 통하여 왔지만 지금은 이런 정신은 계승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시의 실체인 말씀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또 더 필요한 계시가 없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어떤 말씀의 이해는 복음을 삶 속에 직접 적용하여 깨달은 어떤 형제나 자매가 지금 말씀을 정리하여 전하는 저보다도 더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복음의 어떤 부분도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예전과 같이 계시로 알게 하는 일은 없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한마디로 ‘계시는 끝났다.’ 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구원의 계시는 완성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도 인용하였지만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22:18)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계시의 보편성’ 또는 ‘계시의 일반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섬기는 자리가 다를 뿐이지 어떤 신비하거나 특별한 직책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이를 분명히 하였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하였다.

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는 대상은 어떤 특별한 사람을 향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확인시키는 말씀이다.

이제 더 이상 OT시대의 선지자나 레위인 같은 제사장이나 복음의 완성이전의 특별한 계시의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의 완성의 시대에 OT시대 율법적인 절기나 제사의 의식들은 모두 완료되었기 때문에(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 갈라디아서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복음에다 과거의 율법의 어떤 것들을 더하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물론 OT의 율법도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모양과 방법대로 행하게 하셨지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고 모든 율법의 완성인 복음 역시 하나님께로부터만 주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향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1f) 함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OT시대부터도 자신의 백성들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4:22)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행할 줄 모르고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탄식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f)라고 권하고 있다.

먼저 갈라디아 교회를 비롯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b)한 것처럼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f) 했던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동시에 사람의 죄인됨을 알게 하여 이 간격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연결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 것이지 세상의 일반종교와 같이 사람이 도를 닦아 신(神)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는 어떤 사람의 뜻이나 의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 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그에게서 받고 배워야할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은 그렇지 않다.

음식을 잘 하는 오래된 식당에 가서 ‘어떻게 그렇게 음식을 맛있게 잘 만드느냐?’ 묻는다면 ‘친정어머니로부터 또는 시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답변하거나 혹은 ‘전문요리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것’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당연히 음식은 가르침을 받고 실습을 하면서 익힌다면 같은 맛을 낼 수도 있고 어떤 음식점에서는 1대의 창업주가 자식과 같이 경영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는 그 음식의 비법을 아들에게 전수해 주지 않고 자신이 할 만큼 하고 나서 넘겨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복음이 사람의 뜻에 따라 베드로나 요한이 만든 것이라면 바울은 그들 밑에 가서 마치 음식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훈련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에 대한 출처와 받은 과정은 단호하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고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란 덮어지고 감춰져 있던 것을 그 덮었던 것을 들어내어 보게 하였다는 의미를 가지는 [ἀποκάλυψις, 드러냄, 나타나는, 오는, 빛나는, 명시]라는 낱말이 사용되고 있다.

세례 요한의 때까지 복음은 마치 보자기로 덮인 밥상처럼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알 수 없게 깊이 감춰져 있었고 이것을 먼저 사도들에게 열어 보이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도 그 가렸던 보자기를 치워서 보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위해 하나님을 대면하여 뵌 후에 나타난 얼굴의 광체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얼굴에 가렸던 수건으로 비유하고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3:16)고 증거하는 것과 같다.

실제적으로 OT의 모든 예언 속에서는 언약은 주셨지만 복음의 광체는 깊이 감춰져 있어서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보고싶어 대망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는 깊이 감춰져 있어서 믿음의 조상들 조차도 그것을 보고자 하였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Ⅱ. 이전의 열심(13~14)

바울이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사울이었을 때 너무나 적극적인 종교생활을 했고 그 열심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갈라디아서에서 조차 이를 거론하고 있을 정도이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2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13) 이 사실은 이미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8:3)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을 더 괘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고소를 당하고 가이사랴에 호송된 후 아그립바 왕에게 이런 사실을 증언하기도 하였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행26:4)

특히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13b) 하였지만 그것이 바울 자신에게 결코 만족이나 평안을 줄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전도를 하려는 사람도 호의적인 사람은 응답을 빨리 하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만 하면 오히려 더 열성적이고 충성함은 비단 바울뿐이 아닌 요즘도 그렇다.

이렇게 종교성이 많고 정신적인 세계에 심취되기 쉬운 종교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철학을 추앙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17:22)

바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열심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만나기만 한다면 인생을 모두 올 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바울이 아그립바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라는 말처럼 잘 못된 것 인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열심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였다는 고백이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4) 자신의 동년배 즉, 자기 또래의 나이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나칠 만큼 유대전통에 충실하려 하였다는 진실한 고백이다.

오늘 다른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독선적으로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지금의 그 다른 종교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알게 되고 바른 믿음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바르지 못한 열심은 오히려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아는 것부터가 너무나 중요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잘못된 열심을 바로잡아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의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데서 결과적으로 참으로 귀한 열심이 되었다.



Ⅲ.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15~17)

과거에도 더러 거론을 했던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과 멸망으로 선택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브라함 때로부터 이 땅에 메시아를 탄생시키기까지 구원을 위한 일꾼으로의 선택은 성경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스마엘 보다는 이삭을 에서보다는 야곱을 사랑하신 것들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계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1:2b~3; 롬9:13)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하나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사울(바울)에게 침례를 주라고 하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라고 우려하자 그 염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이를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 그리고 그 부르심 역시 바울(사울)의 열심이나 충성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서도 더러 들을 수 있는 고백들이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49:1, 5)

역시 대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예레미야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음을 듣는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이런 입장에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사용된 모든 일꾼들은 그것이 비록 부정적인 역할(물론 그들의 성향을 따라서)을 한 사람일지라도 미리 준비된 사람들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역시 메시아를 이 땅에 탄생시키신 요셉과 마리아 같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많은 일꾼들은 적어도 이런 확신 속에서 일하고 고백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의향을 주님으로부터 듣고 이해한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6)라고 부르심에 합당한 고백을 하고 있다.

사울 당시 사울(바울)의 혈육들은 부모를 비롯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다가 죽이고 형벌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사울(바울)을 ‘하나님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긍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겨야겠다고 의논을 했다면 거기에 흔쾌히 좋아했을까 하는 것은 당연히 ‘그것은 너의 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의 부모들이나 친척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이단자로 알고 있었을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잘 헤아린 바울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일에 자신을 직접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그 일에 자진하여 나선 것은 대단히 영적인 결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역시 같은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먼저 그리스도의 일꾼 된 사람들과 좋은 모양세를 위하여 인정을 받고 교제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충성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사도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역의 구체적인 지시를 주님으로부터 받기 위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7) 모든 인간적인 관계나 모양세보다는 주님께 보다 합당한 역할을 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다고 봐진다.

마치 율법을 이스라엘에 전한 모세가 왕궁에서 자랐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묵상하고 마지막에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을 광야에 계셨던 것과도 비례 될 수 있는 모습이다.

여기 말하고 있는 아라비아는 어떤 마을이나 도시가 아닌 넓은 광야이고 오히려 번잡한 도시와는 반대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지적하기를 어렵지만 묵상과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가진 후에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일꾼들이 거쳐야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머리에 인간적인 신학이론이나 지식만을 많이 습득하는 것보다 조용히 주님과 인생과 사역을 의논하는 영성의 훈련이 있어야 바울 같이 복음을 위해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뵌 후의 바울 사도의 삶은 자신의 지식이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적인 입장이나 가족적인 관계 또는 개인의 영달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는 바울처럼 직접적인 계시는 아닐지라도 완전히 기록된 계시인 오직 성경의 명령과 말씀에 의해서 살고 움직이는 인생이 될 때 영적인 삶이 되고 영원속에서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