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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1:6~10 2021-07-11
다른 복음은 없나니,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사도직 뿐만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도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했었다.

오늘은 연이어지는 말씀이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축복이 아닌 저주를 선언하는 섬찟한 내용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주신 귀한 생명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대상으로 비록 하늘의 영적인 존재일지라도 이미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음에 다른 복음 즉, 복음을 변질시키는 대상을 향해서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쪽을 더 좋아하고 쉽게 따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 역사속에서 수없이 이에 대한 경계를 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안타깝게 하는 경우들이 더 많음을 본다.

복음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희생을 통해 이미 완성하셔서 순종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생명이요 평안임에도 그것에 사람 보기에 그럴싸하게 더하고 잘라내는 인간적인 생각을 적용함으로 변질된 복음은 결국 죄인을 구원할 수 없는 허약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일들에 대한 경계가 오늘 본문 같은 일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의 가장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는 아무리 합리적인 인간편의 이론이 있고 또 생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의 복음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OT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12:32)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6) 경계하셨다.

NT에서는 모든 예언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고 경계를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약하고 초라한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으시고 용납하시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주신 어떤 것이든지 사람의 생각대로 고치고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고 저주까지도 선언하시는 것을 본다.

오늘 우리 교회나 각자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그대로가 아닌 다른 복음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서 경계를 가지고 다른 복음은 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으로 말미암아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따라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Ⅰ. 다른 복음은 없다(6~7)

복음은 좋은 소식(εὐαγγέλιον)이다. 물론 이 복음은 돈을 쉽게 많이 번다거나, 좋은 직장을 어렵지 않게 들어간다거나, 어려움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거나, 힘들이지 않고 명예로운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그런 육신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시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리라”(사61:1~3)하신 약속이다.

죄의 무서운 저주로 인하여 마음은 절망으로 형벌의 공포로 옥죄어 오고, 인생을 탄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인생들을 그러한 절망에서 놓이게 하심으로 희락과 기쁨으로 안타까움을 대신하시겠다는 못 고칠 병과 같은 저주에서 나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신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절망에서 살 소망과 저주의 절규에서 기쁨과 평안의 엄청난 변화를 이루신 것이다.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이 은혜를 듣고 누림에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복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갈라디아교회가 유대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사실 그랬다고 바울은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6f) 바울 사도는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4:13) 그 약함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회고한다.

특히 여기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란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사람의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닌 오로지 ‘은혜에 의해서’ 즉,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그의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것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4:15)는 증언처럼 바울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준 것은 그가 준 복음이 너무나 귀중하고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이렇게 행복해했던 그 복음을 바울이 떠나온 후에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가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런 반응이었기 때문에 지금 바울은 “…다른[ἕτερος]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b)고 그들의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다른 복음이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선물이 아닌 거기에 율법을 뒤섞은 변질된 복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를 다음 7절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른[ἄλλος]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라는 것은 이 역사 속에 다른 복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죄에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은 바울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주신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여기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바울의 복음 전하는 것들을 좇아다니며 방해하고 대적하던 그 유대인들일 것이고 ‘너희를 교란하여[ταράσσω]’라는 것은 ‘자극하다, 선동하다, 물을 흐리게 하다’라는 의미처럼 진리에 행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짓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사도들이 활동하는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런 가능성은 더 많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진리로 자유 하는 사람들을 흔드는 존재들은 분명히 어두움의 세력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런 혼란을 주실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사실 가장 사악한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능력인데 그것을 변경시켜서 마치 다른 성분을 많이 섞거나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약처럼 전혀 효과를 볼 수 없는 무익한 것으로 못쓰게 만들려는 시도였음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분명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Ⅱ. 저주를 받을지어다(8~9)

이제 바울의 말투는 점점 강해지고 엄격해진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b) 이라고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증거했던 바울은 그 다른 복음이 설령 하늘로부터 왔다고 할지라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특히 이 부분의 말씀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일꾼들에게 두려운 경계를 주는 교훈이다. 참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면 복이 되겠지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를 내리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입으로 나오는 저주도 두려워하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조심해야할까를 경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주는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는 구도(求道)의 방법조차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로 혼란이나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한글) 확신하고 있다.

특히 4번이나 거론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사용된 낱말들이 각각 다른 것도 특징이다. v6의 “다른[ἕτερος] 복음” v7 “다른[ἄλλος] 복음” v8, 9 “다른[παρά] 복음” 세가지 다른 것을 거론하신 것은 어떤 다른 것 심지어 비슷한 것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8f) 이것은 적어도 가능성의 여지를 완전히 닫아버리는 증거이다.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을 입고 나타난 천사가 성경 외의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인정할 수 없다면 하물며 사람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수긍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경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것보다는 무엇인가 새것에 더 호기심을 갖고 쉽게 빠져드는 일이 쉽기도 하다.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 교우들의 그런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8m) 이것은 적어도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의 완벽함을 확증하는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성경 말씀은 딱딱하고 맛이 없기 때문에 다른 양념을 첨가해야 한다고 하여 사람들 간에 그럴싸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어록을 덧붙이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 라는 고백은 위선이고 거짓이 되는 것이고,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라는 시편기자의 고백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바울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시대인 일세기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 다른 복음은 수없이 증거되어 하나님의 참된 백성과 거짓된 사람을 가리는 시금석이 되었고 이 과학과 문명의 최첨단을 가고 있는 21세기에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오늘의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문화와 과학때문에 성경은 바뀔 수 없는 온전한 것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외면당하는 경우가 안타깝고, 이런 것 때문에 합리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이 믿음을 떠나고 있는 것도 불행할 일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8b) 이러한 표현은 지난 주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기뻐 사용하시는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음 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연거푸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못한 이 표현의 대상은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순종하며 복음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복음에 들어와 살 사람들을 위하여 영광과 위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과거 우리 시대의 부모들은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가 받고 너희들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자세로 고생과 굶주림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여러 번 말해왔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9f) 듣기에 행복한 내용도 아니고 말하는 사람도 어려운 것이지만 바울은 “다시 말하노니”라고 경계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b) 앞의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8m) 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썼다면 여기서는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듣는 사람들과 전하는 사람들의 양면에서 경계를 주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그 다른 복음을 듣는 사람들도 서로 비극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마18:6; 막9:42; 눅17:2) 하신 말씀과 다름이 없는 경계의 교훈이다.

이미 증거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그 변질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저주를 받지 않는 방법은 너무나 쉬운데 그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Ⅲ. 사람이냐 하나님이냐(10)

마지막으로 바울은 왜 교회들에 다른 복음이 증거되는가 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증거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오늘도 신앙을 지도하는 모든 사람들의 과제는 바울과 다르지 않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바울은 인사말에서조차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다고 고백하였고, 저는 이것을 사도직뿐만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은 하늘로부터 만 주어진다고 확대한 바 있다(약1:17).

복음자체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지만 또 복음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주어져 있음에도 복음을 받는 사람들보다는 죄의 해결책으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복음을 생명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분명한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결단을 요구하는 귀중한 자세이다. 진리의 복음은 분명히 사람을 위한 것인데 왜, 이런 혼란을 가질 수 있는가 의문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편에 서서 역할을 하고 또 누구를 의식해야 하느냐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 전혀 어려울 것도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면 즉, 저주를 자초하지 않는 증거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 섞은 복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좋게 하려한다면 물론 구분은 분명히 되어야 할 것은 바울과 같은 영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육신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다 보면 영적인 진리보다는 세상이 더 좋아하는 것들을 섞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10m) 바울 사도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 골3:22)라고 하여 사람은 눈가림으로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는 고백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 모세를 두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고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갚으심을 바랄 때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포기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b)는 고백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복음이든 말씀을 전하는 사자이건 둘 다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큰 능력과 위로를 누릴 수 없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루스드라에서는 그곳에 나타낸 능력만큼이나 유대인들로부터 돌을 맞고 죽기까지 한다.

이런 정도가 되면 인간적으로는 그 일을 다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록 복음의 반대자들에게 핍박을 받을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컷을 것이고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들이기 보다는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것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복음을 위해 선택된 일꾼들 역시 세우심이 주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의 위로보다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일꾼들이다. 이것은 일의 가볍고 중요함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선택된 일꾼이면 누구나 가져야할 자세이다.

오늘 우리는 구원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완벽한 복음을 받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첨가해야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허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완벽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것을 섞어 전하는 잘못된 사자도 성경보다 다른 더 재미있고 그럴싸한 것을 기대하는 듣는 사람들에게도 경계를 주고 계신다.

이것은 적어도 경계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설령 그러한 복음을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전한다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를 주신다.

만약에 사람들로부터 기쁨을 구하는 일꾼이 있다면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고 까지 경계를 주고 있다. 주어진 말씀에 감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구하므로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조롱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