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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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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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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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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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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고 고백함으로 서로에게 익숙하고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나누는 것이 자신에게는 쉽고 상대에게는 안전하다 라고 한다.
반면에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불신의 세상 사람들임도 철학의 토론지였던 아테네에서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 전하고 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
변명이 될 수도 있지만 성경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강론하는 것이 안전하고 혼란하지 않은 적절한 양식이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동쪽 지역으로 배경은 사도행전 13~14에서 볼 수 있다. 주로 바울의 전도여행은 갈라디아 남부지역으로 1차 전도여행 때는 비시디아 안디옥(시리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까지 갔다가 다시 데베에서 되돌아 갔지만 2~3차 때는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데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 쪽으로 진행을 하였다.
문제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방해를 당하고 심지어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일까지 당하게 되었다(행14:19~2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의 율법의 의무 같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 문제도 유대인들이 제기한 문제로 바울 일행을 좇아다니며 방해하던 일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루살렘에서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에 대한 규례를 만들어 이방 교회에 보내지만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던 갈라디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좋지만 율법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믿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되고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은 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써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쓰여진 시기와 장소는 주경학자들 간에 다른 이론들이 더러 있지만 A.D. 55~57 경에 안디옥이나 에베소 또는 고린도에서의 집필을 말하고 있으나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신앙적인 부분만 간략하게 다루는 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 서신의 기록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인들에게 직접 항의와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바울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1, 5:2).
로마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비슷한 내용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문장 구조까지도 비슷한 곳도 있을 정도이다. 여러 곳이 있지만 예를 들면 OT합박국2:4b의 같은 인용이기 때문이겠지만 3:11b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로마서1:17b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곳만 더 예를 들면 4:6b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로마서8:15b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는 내용 같은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관계없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를 너무나 논리 정연하게 해설한 책이라면 이 갈라디아서는 어떤 바울이 쓴 서신들 보다도 강한 말투가 특징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바울 자신에 대한 삶을 고린도후서나 빌립보서에서 상당히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만큼 자세히 밝힌 책도 없다. 특히 1:18~2:17 경우는 바울의 사람됨을 연구하는데 자료로 쓰일 정도로 자서전적인 책이라고 한다.
고린도후서와도 많은 면에서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 때문인데 주로 고린도후서 10~12까지의 내용과 비슷하고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오늘부터 다루는 1~2장에서도 그렇지만 자기 개인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기 보다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가치를 손상할 수 있다는 데서 그런 것이다.
사실 최초로 이방인을 구원으로 이끈 사람은 바울이기 보다는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나는 대로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한 베드로이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2:9에서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는 주님께서 주신 역할의 차이를 증거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비록 나중 사도의 계열에 올랐지만 수사도라고 하는 베드로가 복음에 합당한 자세로 행동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데까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일꾼으로서 당당함을 보이기도 한다(2:11~12).
전체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늘 서론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되는 1~2장은 복음과 사도권의 변호로 되어 있고 3~4장은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5~6장은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복음에 합당한 삶의 실천편이다.
그럼에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로마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갈라디아서가 무수한 이론의 논쟁으로 끝나는 이념적인 기록이 아니라 역시 복음에 합당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고후9:6)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이 갈라디아서가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한 율법에서 자유 하지 못하여 혼란하고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되고 세워진 신약교회의 환원운동을 주창하고 있는 신앙인들조차도 율법적인 내용에서 자유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을 흉내 내고 본받는 안타까운 모습들도 반드시 진리를 알게 될 때 자유 하게 되리라 하신(요8:32) 우리 주님의 가르침으로 돌이켜야 할 것이다.
Ⅰ.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1)
첫번째 부분부터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영원과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있어야 할 것과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만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감격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영육의 모든 시작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단순이 보이는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라는 증거에서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1f)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땅에서부터 난 죄의 사람들을 한번도 긍정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특이 많은 부분에서 이 갈라디아서와 같은 기록을 하고 있는 로마서에서는 사람에 거의 절망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3:10~15)
우리의 죄를 해결하러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8~19) 라고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음을 지적하신 바 있다.
본래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어두움의 영의 부추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저버리게 되어 어두움의 수하로 들어가 버리게 되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7:29)
이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야 사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하지 못하고 해로운 선택을 할 뿐이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증거하신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 완전히 절망을 확인하고서라야 비로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되고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주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격하게 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b) 여기에 반전되는 “오직”을 붙여서 말하는 것은 앞에 부정해버린 사람에게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들에서는 불가능한 은혜와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하늘로부터 예정되고 설계되고 세워진 교회는 사도의 지위 뿐만 아니라 모든 구조와 조직 법률이 모두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땅의 논리나 윤리 법률조차도 별로 가치가 없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한 것처럼 사도들이 터가 되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오직 교회의 머리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주어지고 명령된 말씀에 의해서만 운영되어져야 한다.
바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b) 라는 확신과 자긍심을 가졌다면 오늘 우리는 유일한 법이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고 섬긴다는 확신을 우리 모두 동일하게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Ⅱ. 은혜와 평강을 축복(2~3)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졌다는 확신과 자긍심으로 이 서신을 시작하였다. 자신과 함께 같은 확신과 고백으로 섬기고 전하는 지체로 더불어 율법주의자들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편지를 받을 여러 교회 지체들에게도 같은 격려와 사랑으로 축복하고 있음을 두번째로 본다.
사실 바울은 본 갈라디아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서신들마다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하는 것이 관례처럼 보인다. (롬1:7; 고전1:3; 고후1:2; 엡1:2; 빌1:2; 골1:2; 살전1:1; 살후1:2; 딛1:4; 몬1:3) 베드로 사도 역시 여기에 예외가 아니다. (벧전1:2; 벧후1:2)
그 축복의 대상을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2) 라고 확인하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축복함을 본다. 여기에서 바울의 축복은 “은혜[χάρις(χαρά, χαίρω)]와 평강[εἰρήνη]”으로 항상 말하듯이 믿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복이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지고 베드로 사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지체장애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자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보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3:26)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든지 바울이나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모든 것들은 복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죄에 신음하는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이 땅 위에 교회를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복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을 저주하는 모양이라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런 이유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저주받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설령 죽을 죄를 지고 절망의 상태에 있는 사람까지도 정죄 받고 멸망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가장 첫째 되고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복이 바로 은혜와 평강의 복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이것은 돈이나 다른 것이 아니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줄 수 있고 끼칠 수 있는 복이다.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복음도 “화평의 복음”이라 한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행10:36)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에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람을 저주하는 일은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기 때문에 저주를 선포하는 교회의 일꾼이 있다면 그는 참된 일꾼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을 나누고 축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와 하나님의 일꾼들과 성도 간의 첫째 권한이며 사명임을 고린도후서5:18~20에서 말씀하고 있다.
Ⅲ. 죄를 해결하신 영광의 하나님(4~5)
앞에서 사도의 사역을 주신 이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확신과 교회와 성도 상호간의 은혜와 평강을 축복하는 아름다운 교제의 시작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런 것들을 포함하는 모든 복음에 관한 이해와 교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이 인사말의 결론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4) 벌써 서론에서부터 구속의 역사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이 한 구절 속에는 복음의 원인과 목적이 모두 들어 있다.
이 말씀을 순서적으로 다시 배열해 보면 ①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계셨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②그 뜻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이고 ③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는 도식이 될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먼저고 그 뜻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나 이글을 쓰고 있는 바울이나 철저하게 이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은 천사들이건 성도들이건 이 뜻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죄인 구원인데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한 악한 어둠과 죽음에 종 노릇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창세전부터 메시야는 예정되고 계획되었으며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하여 이것을 인간세상에 알리셨다.
그럼에도 이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있어서 범죄한 사람을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결국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 라는 고백처럼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준비하시고 예정하셔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사탄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채워졌고 죄의 대가는 치뤄졌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심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죄인들은 거듭나고 살아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 교회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하는 모든 하늘로부터 있게 된 신령한 기관이나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은 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 양보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시편기자인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라고 찬양 드리고 있다.
바울은 v24에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하였고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15)고 고백함을 듣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경우에도 가려져서는 안되고 사람이 그 영광을 도둑질해서도 안된다.
바울의 사도됨을 비롯해서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이 하늘로부터 온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서로 은혜와 평강을 축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되게 하셔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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