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요 21:20~25 |
 |
2021-06-27 |
|
 |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
|
|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어부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일꾼을 삼으신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은 문체는 당시의 최고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바울이나 누가를 능가할 수 없지만 영성은 어느 사도보다도 깊은 영혼의 사람이었기에 그를 통해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만 잡던 요즘 표현으로 시골뜨기 출신으로 별로 학문의 깊이도 갖지 못한 요한이 기록한 이 복음서를 읽고 나누면서 무한하신 능력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사람의 힘으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했다면 요한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바울 사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라는 실제적인 사실로 요한을 보기 때문이다.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는 일단락되고 거기에 붙여서 과거에 직업에 돌아가 있는 제자들을 찾으시고 베드로에게 교회를 위한 헌신을 당부하신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행보를 부록으로 기록하였다.
거기에 붙여서 갑자기 자신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함께 최종적으로는 요한에 대한 주님의 말씀과 함께 자신이 이 복음서를 쓰게 된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기적이었음을 마음에 두고 이 기록을 마치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으로서의 이적이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것에서부터 모두가 이적이기 때문에 그 기록을 다 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고 마무리하고 있는 고백이다.
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0~21)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을 확인하시고 사명을 확인받은 뒤에 바로 돌아봤을 때 거기에는 자신과 함께 여태껏 예수님을 따랐던 요한을 보게 되고 주님께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는 조금은 부정적이고 안타까운 미래가 될 것을 예언하신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요한에 대한 장래가 궁금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앞길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미래에 관심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사도였던 베드로도 성령이 오시기 이전에는 이것에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가려진 미래를 알고 싶어 접신자를 찾기도 하는데 그런 모든 자세는 옳지 않은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경계하신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이 말씀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순종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데는 분명히 뜻이 계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미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도 다 지키거나 순종하지 못하면서 그 감춰두신 것까지 파헤치려는 행동은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수 없는 월권일 수도 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20f) 마치 다른 사람이 보고 기록하는 것처럼 개관적인 표현이지만 계속해서 자신에게 붙이는 변하지 않는 별명 하나는 여기서도 바뀌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13:23; 21:7)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 세사람을 항상 중요한 자리에 함께 데리고 가셨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생애 말년에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것이 가장 자신에게 남는 감격이요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주님과 더불어 임마누엘을 살면서 어려운 고비도 많았을 것이고 많은 기억들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두셨다는 기억이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덮은 체 이런 별명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20b) 이것 조차도 사실은 베드로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음을 앞에서도 이미 본 바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13:23~24).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 주님께서 자신에게는 비록 밝은 면은 아니지만 장래를 말씀하셨는데 늘 함께 같은 자리에 있던 요한의 미래가 염려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분명 자신의 장래에 대해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b)고 불편할 것을 예언하셨지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갈 때나 변화산이나 겟세마네 동산 같은 중요한 장소나 시간마다 아홉 제자들보다는 가까이 두셨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관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심을 주님의 답변에서 볼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게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옆의 사람들의 상태나 미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다.
사실 우리 모두의 장래는 누구에 의해서이기 보다는 현재의 자기 자신의 삶에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자신의 장래가 믿음의 사람으로 결코 비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 노력의 열매를 기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는 삶으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개는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묻기 보다는 염려되는 대상이라면 그의 삶을 기도로 주님께 부탁드리고 격려하는 것보다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체 서로 간의 주님께 기도로 의탁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고 그것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Ⅱ.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23)
베드로의 질문에 좀 큰 과장법을 사용하여 답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제자들 간에 지나친 해석이 붙여지고 이 사실에 대하여 당사자인 요한 자신이 해명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내용이 연이어 기록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2f) 여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올 때까지” 라고 하신 말씀이다. 언제나 비유는 비유 자체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비유를 비유이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나 또 대적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다시 오신다는 표현을 더러 사용하신 바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0)
특히 재림에 관해서 예언하실 때 이런 표현들을 더러 사용하신 바 있다(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5:31, 26:64; 막8:38, 14:62; 눅9:26, 21:27).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올 때까지”라는 표현이 사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라는 비유일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가정(假定, supposition)이지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주님의 말씀은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b)는 명령이었다. 미래의 어떤 변화가 온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중단하는 것은 안된다.
하나님의 다른 사람에 대한 계획이나 예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모두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님의 비유가 제자들에게는 지나친 가정으로 말미암아 큰 오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3)
확대 해석된 내용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하신 것이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라는 전혀 엉뚱한 뜻으로 진전되고 이에 대한 요한 본인의 확인은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3) 해설이다.
오늘도 성경의 이해가 지나치면 단 두절의 말씀으로 모든 성경을 뒤집으려는 잘못된 신앙을 말들 수 있음을 일부의 종파 들에서 보고 있는 현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내용도 나누게 될 것이다.
특히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3b) 다른 사람에게 있어질 일은 그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즉 요한의 살고 죽음이나 그의 상벌이 곧 베드로의 영원한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교훈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의 생명 나의 복음 나의 섬김 나의 예배가 어쩌면 철저하게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잘 예배하고 바로 섬기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 남의 공로도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도 나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 상대적인 세상과 다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심지어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혈연의 관계가 되기 때문이지만 장차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혈연 관계는 사라지고 하늘의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로 육신에 있을 때 행한 것들이 철저하게 나 자신에게만 역할 하게 될 것이다(마22:30; 막12:25; 눅20:35~36).
이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과 장래의 관심보다는 우리 각자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하늘에 쌓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을 순종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일 때문에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교훈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중단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부부의 문제든지 부모 자녀의 문제까지도 “너는 나를 따르라!”시는 말씀에 순종이 되어야 만한다.
‘나는 누구 보기 싫어서 교회 안 간다.’도 안되고 ‘나는 우리 누구 때문에 교회를 갈 수 없다.’ 라고 하는 것도 “너는 나를 따르라!”시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비극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인간관계의 교훈을 마무리하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당부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Ⅲ.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25)
신앙에 있어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에야 비로소 있게 되겠지만 부록이라고 하는 이 21장의 끝 부분은 이 복음서의 확증과 복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이심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비록 자신의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였지만 그럼에도 그 별명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13:23; 21:7)가 증거하고 있는 이 복음이야 말로 진실된 증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
요한 사도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중요하고 결정적인 가르침이나 선언을 하실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 …”라 하신 표현을 무려 25회나 이 요한복음에서 사용하여 주님의 진리의 확실성을 확증한 바 있다.
비록 자신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인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b) 했는데 이 표현 자체도 자신을 신뢰한다는 자기 증언이 아니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묘사 자체가 그 신뢰성을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이 기록을 남겼으니 믿을 만하고 이 글을 쓰게 하신 주님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선포로 시작한 이 생명의 교훈이 믿음직함을 끝에서 다시 증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v24~25은 먼저는 그 기록에 대한 검증이고 다음으로는 기록하게 하신 이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 역사의 위대하심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이 글을 닫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라는 표현 역시 전달의 한계를 시인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한계성 기록의 한계성을 가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미 다른 복음서들과 서신들이 이미 쓰여졌고 요한은 자신이 본 대로 느낀 대로 진실되게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지만 우리 사람의 보고 느끼는 이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25f) 서론에서부터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가진 범위를 말한 바 있다. 즉, 공관복음에 기록한 수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단 일곱가지의 표적을 선정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많은 사람들로 믿게 되었다는 형태로 기록하였다.
그런 입장에서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25f)라는 고백은 진실되고 사실적인 표현이다. 사실 요한복음을 닫으면서 결론 맺을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부족할 뿐이고 자신의 기록의 제한을 먼저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 사람들이 아무리 완벽한 표현방법을 다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머리로나 판단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심오한 관계나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일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 복음서를 모두 전달했다고 하지만 전달의 도구로서의 부족함은 제 자신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상태나 관계를 말하는 것 조차도 적절한 낱말을 찾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하고 심오한 깊은 진리를 어떻게 사람의 표현으로 다 묘사할 수 있겠는가!’가 사실 진실된 고백이다.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25m) “빠짐없이 기록한다면…”이라는 표현이지만 이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식적으로나 영적으로 모자랄 것이 없다고 하는 바울 사도조차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11:33~34) 고백하고 있다.
다시 고린도전서2:11에서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인정하고 있음을 듣는다.
마지막 표현으로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b) 이 말씀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바울은 신령한 교훈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사실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조차도 소화가 안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 속에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저들의 마음에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b)했을 때 “세상[κόσμος]”은 질서를 가진, 전시된, 나타난 이 우주와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요한복음이나 요한의 서신들에서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구원의 신비를 기록했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이적들과 증거들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즉,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선언될지라도 그들의 심령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역시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영광과 위엄과 존귀하신 하나님이 죄에 절망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죄의 대가를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영광으로 돌아 가시고 다시 이 역사에 마지막에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에게 최종의 영광을 주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인데 이것은 가장 믿을 만한 증거요 기록이라는 말씀이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