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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1:15~19 2021-06-20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서부터는 사실 상당히 개인적인 교제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주로 베드로에게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요한에게 옮겨가지만 사도들 전체가 아닌 사적인 대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 부분은 유독 베드로만을 향하여 사명을 다시 확인해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의 사명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많이 사용되는 익숙한 말씀이다. 세번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의 확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배신과 같은 행동에 비례한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것 때문에 베드로가 난감해 하였고 그럼에도 베드로의 죽음의 때까지 당할 일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특별함도 있다.

또 말씀의 결론적인 부분만 4마디로 정리하면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이다. 세번의 불완전한 베드로의 답변이 역시 주님을 확실히 따를 때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이라는 순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히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그의 신앙고백을 받으시면서부터 그를 통한 역할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이런 확인 속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질문이 아니라 오늘 같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으시는 의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시 맡겨 주신 역할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라야 가능할 것임에도 우리 대부분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인간적인 최고의 가치로 사회에서 말하는 사람의 예우에서 최고인 스승을 존경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자세나 가치로는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바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모습이다. 당시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은 교회지도자들에게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서로 간의 책임과 과제이기도 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성하신 후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시는 것은 각 신앙의 사람들의 믿음의 점검이기도 하다. 우리 신앙하는 사람 모두는 그 믿음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 앞에 1:1로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주신 질문으로 받아 여기에 스스로의 답변들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답변을 말이다.



Ⅰ. 사랑하느냐! (15~16)

밤새껏 그물질을 하였지만 빈 그물만 끌어 올리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각자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 같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럴까!’라고, 그리고 거기에 답을 얻지 못한 체 날은 밝아왔다. 뜻밖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침식사까지 준비해 주셔서 먼저 속을 든든히 채워 주시자 제자들은 간밤에 각자 스스로에게 물었던 의문이 여기서 풀릴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구나!’라고 말이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15f) 주님의 이 질문이 조용히 베드로에게만 하신 질문은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행동을 이끌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어쩌면 제자들을 대표한 질문이셨을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 사랑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부부간에도 “잘 알면서…” 라고 답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천방지축 하던 베드로에게 이 질문은 아직 영적인 깊이를 알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한가지 중요한 이해는 우리 성경처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함께 있는 다른 제자들을 다 두고 비교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기서 그치는 질문을 넘어서는 질문이다. 우리 성경에는 [이 사람들보다] 라고 번역하였지만 본문에 사용된 “투톤(τούτων)”이라는 그리스어 대명사는 영어로는 “these”로 (사람들이거나 사물들 모두)를 대신하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표현은 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비교하시는 질문이라는 데 무게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더 가까이 이해한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네가 가진 어떤 것(돈, 명예, 자존심, 취미, 휴식, 안전 등등)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시는 물음이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막14:29) 라거나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22:33)라고까지 장담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아닌 오늘 나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답변드릴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이 어려운 질문을 주님께로 돌린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m)

그럼에도 이 대화의 질문과 답변은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는 조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ἀγαπᾷς με πλέον τούτων?”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ῶ σε!” 라고 답변한다.

오늘 베드로에게 질문은 정확하게 “네가 하나님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이지만 베드로의 답변은 그의 양심에 걸렸든지 또는 자신의 마음조차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최고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제자가 스승을 또는 친구 간의 가장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답변을 드리기 때문에 서로의 질문과 답변은 정확하게는 맞지 않은 대화가 되고 말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의 수준 높은 사랑이라고 하는 최고의 존경과 우정의 사랑(φιλόϛ)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다는 귀중한 교훈이기도 하다.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의 최고의 가치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는 별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런 이유에서 죄인들을 구원의 복음으로 불러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의 댓가없는 온전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ἀγάπη)을 가지고서라야 비로소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물으셨는데 베드로의 답변은 조금 다른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온전하다고 하는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하늘의 가치로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인류와 사람 구원에는 합당하지 못함을 일깨우시는 교훈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이러한 사랑으로 일하게 될 베드로를 마음에 두시고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b) 당부하신다. 그럼에도 여기 첫번째의 당부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에서는 그냥 “내 양을” 치라, 먹이라 하시는 데 여기에서는 구태여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양과 어린양의 차이는 아무래도 어린양은 돌보는 것이 힘들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태생 시키고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임을 사도행전 첫 부분에서 보게 된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16f) 여기에서는 앞선 내용과 다른 것은 “이 모든 것들보다(πλέον τούτων)”라는 비교가 제해진 형태로 같은 질문을 하신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만 오는 [아가페(ἀγάπη)]는 다르지 않다. “ἀγαπᾷς με?”

그럼에도 여기서도 베드로는 앞의 답변과 꼭 같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6m) 두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ἀγαπᾷς με?”라는 질문에 같이 답변하려면 “ἀγαπῶ σε!”가 아니라 역시 “φιλῶ σε!”라고 답변하고 만다. 앞에서 말한대로 여전히 육신의 사람으로서 그래도 꾸밈없이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스승으로서의 존경과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 답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16b) 당부하신다. 또 하나 “먹이라[βόσκω], 치라[ποιμαίνω], 먹이라[βόσκω]”라는 명령의 차이인데 이 표현은 크게 차이가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치라[ποιμαίνω]”는 표현이 돌보고 지킨다는 것으로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당부이면서 오늘 교회안에서 교제하는 서로의 관계속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중요한 의미요 자세를 이름이다. 나 아닌 다른 지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동일한 사랑으로만 가능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댓가없는 사랑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셨는데 세상은 그 수준을 세상의 것들의 가치로 바꾸었기 때문에 교회의 모습이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만도 못한 안타까운 상태가 된 것을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Ⅱ. 세번째의 확인(17)

앞에서 두번의 사랑의 확인은 하나님의 수준이었다면 거기에 같은 답변을 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수준을 내려서 마지막 질문은 땅에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려와 용서를 보는 것 같다. 또 앞의 두 번의 내용과 이 세번째의 질문도 그렇거나 와 베드로의 자세나 답변도 더욱 조심스럽게 들린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17f)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질문은 사랑의 용어 자체가 바뀌었다. 오히려 두번의 베드로가 답변했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물으신다. 이번에는 “ἀγαπᾷς με”가 아니라 “φιλεῖς με”라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가 위기중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한 비열함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든지 세상에서라도 최선의 신뢰를 지켜갈 수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 조차도 하늘의 가치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다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은 인내이고 지키는 것이다.

앞에서는 별로 머뭇거림없이 주님의 질문에 답변했던 베드로의 반응은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느낌이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17fm) 세 번씩이나 물으시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질문의 핵심인 낱말이 자신이 답변하던 것으로 바꿔서 물으시는 것에 조심이 되는 모습이다.

보통 우리 사람들 간이도 진실된 바른 답변을 듣기 위해서 다시 묻고 다시 물을 때마다 그것이 진실 된 것이 되지 못할 때는 답변이 점점 목구멍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이 작아지는 것은 부모들이 잘 못을 저지르고 추궁을 당하는 어린아이들 속에서 더러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근심하던 베드로는 앞에서 보다는 더 주님께 의존하는 모습의 답변을 한다.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mb) 사실 여기서 건성으로 답변한다고 해도 이제는 다른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아신다]는 표현의 낱말은 다르지만 두번씩이나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φιλῶ σε”]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것을 요한은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 25)고 표현한바 있다.

이런 베드로에게 다시 한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b) 당부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이 강할수록 사실 잘 감당할 수 없다. 자신이 부정되고 하나님께 의존하며 행하려 할 때 보다 바람직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줄기찬 맥락에서 배우는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으로 자신을 추스리는 베드로에게 그런 자세로 주님의 양떼들을 의탁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보시는 주님이심을 인정하며 벌거벗은 자세로 섬기려 할 때 작게 라도 주님의 일을 바람직하게 감당하게 될 것이다.



Ⅲ. 베드로의 마지막까지의 사역(18~19)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떼를 먹이고 치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기로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하려 했던 베드로의 장래를 예언하시는 내용이 마지막이다. 젊음의 혈기나 정욕도 사실 오래가지 못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도 젊은이들은 자신의 혈기에 가려서 이런 말 자체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 정욕과 혈기가 얼마나 헛되며 부질없는 가를 깨닫게 되지만 사실 그 때는 인생의 황금기를 지내 버린 때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베드로에게 지금까지의 성미 급하게 설치고 큰소리쳤던 그의 행동과는 다르게 주님의 양을 침으로 당할 수 있는 어려움이나 수모를 예언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말씀 하신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b) 예언하신 바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 희생의 역사를 이루기까지도 큰소리치고 덤벙댔지만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였다.

특히 그런 가운데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적도 있었지만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실 때 자신의 혈기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까지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18f) 여기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요한복음 특유의 표현이 붙어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강조하시는 표현이다.

“이것은 반드시 그대로 사실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 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바람직하지 못했던 혈기로 가득했던 베드로의 이제까지의 모습을 묘사하시는 것으로 들린다. 큰 소리치고 주님 잡으러 온 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리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천방지축의 베드로도 결국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b)는 또 다른 예언처럼 진정으로 복음을 위해서 살게 될 때는 자신의 원하는 것 보다는 원하지 않는 일들을 더 많이 겪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어쩌면 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을 것이기 때문에 온 갓 편리보다는 어려움이 더 많고 육신적으로는 불편을 더 많이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마7:13)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비록 천국 열쇠를 맡은 자로서 지금까지는 베드로가 바람직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였지만 장래의 어떻게 될 것을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f)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1세기 말엽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시기에 이미 베드로는 세상을 떠난 후였을 것이지만 과거에 주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라 하심으로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위해 성령과 더불어 충성을 다 하다가 마지막 죽음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셨고 요한이 본 대로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진 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베드로의 마지막까지의 사역은 기록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베드로의 최후의 이야기인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1896년도에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 라는 사람이 성경이 아닌 외경인 베드로행전3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즉,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벤허처럼 신앙을 희극화 한 만들어진 이야기로 우리가 요즘 쉽게 표현하는 픽션(fiction)일 뿐이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사실처럼 알려지게 된 것은 1951년 머빈 르로이(Mervyn LeRoy)라는 사람이 영화를 만들면서부터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참수형을 시킨 후 유대인들이 이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감옥에 단단히 가두고 이튿날 끌어내 사형시키려는 그 전날 밤에 천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놓인(1~11) 다음에 다시 15장에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6~11)에 나타날 뿐 더 이상은 성경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 마지막 베드로를 향한 당부의 말씀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19b) 여기까지 베드로는 그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서 주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그것은 실수와 덤벙대기 일수였다.

그것 자체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르다[ἀκολουθέω, 본래적 의미로는 함께 같은 길에 있다, (제자로서)동행하다, 다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의 양들을 먹일 수 있었고 바르게 이끌 수 있었음을 사도행전 속에서 보게 된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는 일꾼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같은 명령을 주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대화에서 세 번씩이나 “네가 이 사람들이나 네가 가진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이 같은 질문을 오늘 나에게 주신다면 거기에 답변을 준비하였는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먼저는 베드로와 같은 혈기와 육신의 사람인 나를 구원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감격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주님을 본받는 “나를 따르라!”시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