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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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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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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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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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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는 이유까지도 씀으로써 이 요한복음은 사실상 완료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이 21장은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돌아갔지만 허탕치는 그물질을 하고 있을 때 그 곳에까지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확인시켜 주신다.
마지막으로는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요한에 대한 질문과 여기에 조금은 신비스러운 주님의 답변으로 마무리되고 이 사람이 바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자신이라고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찬양하는 것으로 끝낸다.
이 마지막 21장을 3회에 걸쳐 나누는 것으로 이 요한복음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 내용이 거의 절반을 다루는 분량이지만 내용상으로 나눠서 상고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다소 많은 부분을 나누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일련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막14:28) 말씀하신 바 있으셨다. 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천사들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마28:7; 막16:7) 하였던 것으로 봐서 제자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나 완전히 절망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모양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유야 어떻든지 어부들이 과거 자신들이 하던 익숙한 일에 다시 돌아가 밤을 새워 그물질 하였지만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하고 예수께서 오셔서 그 말씀을 순종했을 때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였음에도 헛수고하던 것과는 달리 상상할 수 없는 고기를 잡음으로 상황은 반전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침까지 준비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자신들의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오늘 같은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Ⅰ. 주님을 떠난 삶(1~3)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의 부활을 수없이 증거하셨지만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으로 후에 나타나는 결과들에서 보게 된다. 그럼에도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의심하던 도마까지도 확인하고 신앙고백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1)
그럼에도 아직 성령의 전적인 인도를 누리지 못하는 제자들인 만큼 옆에 계시지 않은 것 만으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갈등하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디베랴 호수”는 사실 그 이름도 OT에서의 명칭을 제외 하고라도 상당히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게네사렛(지명) 호수(눅5:1) 갈릴리 바다(6:1)’
또 이 요한복음에서만 해도 갈릴리 호수의 서쪽 아래에 위치한 도시 “디베랴”라는 이름이 몇 번 함께 쓰이고 있다.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6:1), 디베랴에서(6:23) 디베랴 호수(21:1)’ 아무래도 “디베랴”가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렇게 쓰이고 있지 않나 이해된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2) 결국 제자들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일곱명의 제자들은 다시 주님을 뵐 것이라는 기대로 갈릴리에 내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 후 예루살렘에서 뵌 후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나타나심이 여기에서도 있었다는 요한 사도의 소개이지만 여기서도 역시 요한은 자신의 이름은 여전히 감추고 있다. 다른 제자들을 거론한 다음 자신의 이름 대신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 여기서도 역시 주동자는 베드로였다. 어떤 일에 든지 앞서는 베드로는 자신의 의도를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3f)라고 계획을 밝혔고 여기에 다른 제자들이 따라 나선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3m)
갈릴리에서 뼈가 굵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나서기 까지는 평생을 자신들의 일터로 살았던 그곳에 돌아와 과거의 일을 다시 해보지만 그 결과는 그전과 같지 않았다.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b)
여기에는 필시 제자들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보아 진다. 본래 갈릴리바다의 고기 잡이는 주로 밤에 이루어지고 아침이면 그물을 씻어 두고 쉬는 것이 저들의 사이클이었던 것으로 복음서에 나타난다. 비슷한 이야기 같이 보여지는 누가복음5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라는 응답에서 밤새 그물질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3) 하여 함께 과거의 기술을 다 동원했지만 결과는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b)라는 모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막1:17) 하신 바 있던 것처럼 이제는 고기를 잡는 소질은 잃어버린 듯하다.
사실 당시의 제자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평안치 못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건 세심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장차 인류를 복음으로 불러들일 귀중한 역할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런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기까지는 그들이 무엇을 했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차제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일 하다하다 안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 즉, 말씀의 사역을 하라 시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에 쓰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모두는 주님 부르시기 전에는 나름대로 갈릴리에서 그래도 가정을 책임지는 충실한 어부였다는 사실을 본다면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과거의 직업에 돌아간 제자들이 허탕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주님께 불리움을 받았다면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머물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될 때 그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것이라는 요한사도를 통한 또 다른 교훈이다(요삼2).
Ⅱ. 예수께서 오셨다(4~9)
일곱 제자들이 실패한 그 자리에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임을 친히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직접 깨닫게 하심이 오늘 두번째 말씀이다. 제자들이 아닌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겠지만 한번 주님을 알고 교훈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세상의 어떤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이면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4) 다른 아침보다 그 아침은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어느 아침보다도 힘겨운 아침이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믿음이 불확실해서 과거의 일에 돌아가 실패를 경험하고 낙담해 있는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는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제자들은 주님의 오심을 알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잠시 주님을 등한히 여기고 세상의 일에 붙잡혀 있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 곳에도 찾아와 주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저들의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을 어루만지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으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과 신비를 보는 것이다. 제자들은 다만 진실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되 없나이다”(5b)
이 제자들의 표현을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두 함께 죽여야 한다고 정죄할 때(3)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하셨고 모두가 돌을 내려놓고 떠난 자리에 여자만 남았다.
예수께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 물으셨을 때 그 여인의 울음 섞인 답변 한마디가 바로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11)였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던 것과 같다.
아직은 연약하여 영적인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고기 잡이 하러 왔던 제자들을 주님은 책망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역시 회복시켜 주시려 오신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의 방법을 제시해 주신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고기를 잡아 보신 일이나 경험이 없는 것으로 성경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밤새 것 허탕 친 고기잡이를 단번에 만회시키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시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이 상황에서도 나타내시는 것이다. 또 실패한 인생들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지금도 자연을 명령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증거하신다.
이런 되어진 엄청난 역사에 요한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해와 함께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7f) 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이 사실을 함께 공감한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7b)는 것처럼 급하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게 된다.
급한 성격의 베드로와는 다르게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8)라고 뒤수습을 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그 장소의 바다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육지와의 거리가 약 90M쯤 떨어진 곳에서 베드로는 물로 뛰어내렸고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 잡힌 그물을 물가에까지 끌고 나오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여기서도 제자들의 서로 다른 성격들이 나타나는데 서로 다른 성격대로 이 은혜의 역사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각자 그대로만 드려진다면 각각 다른 특성대로 쓰임 받음을 여기에서도 이해하게 된다.
이 부활 후 최초의 이적이 완성되었을 때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은혜의 식탁을 보게 된다. 이렇게 주님께서 어떤 영적인 일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우리의 일상과 필요를 외면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심을 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귀중한 의미에서 나중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부터 교회가 탄생했을 때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떡을 떼는 것과 함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2:46b~47b) 라는 영육의 교제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우리 교회 역시 자매들의 헌신으로 매주 예배 후의 애찬 나눔이 이 안타까운 COVID-19의 상황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됨을 실감하고 있다. 이 일이 빨리 회복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지체됨을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삶에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시고 밤새껏 그물질로 허탈하고 낙담하여 힘을 잃은 제자들을 식탁으로 격려하신다. 비록 그들의 밤샘이 열매 없는 것이고 쓸데없는 것이었을지라도 여전히 힘주시고 격려하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때로 믿음을 잃어버린, 주님을 등진 우리의 모든 상황과 모습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찾아오신다. 때로 그것이 육신만을 위한 것일지라도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시고 거듭난 사람들을 버려 두지 않으심을 보는 것이다.
Ⅲ. 임마누엘의 결과(10~14)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는 베드로의 선언과 함께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 밤새껏 수고하였지만 고생만 했을 뿐 아무런 소득도 없을 때 아침은 밝아왔고 그곳까지 찾아 주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가 상상할 수 없는 소득을 얻었고 친히 아침식사까지 준비해 주시는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내용이 진행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10)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충분한 식탁을 주실 수 있으시지만 여기에도 물론 그 고기 자체가 제자들의 힘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적으로 잡게 하신 것이지만 제자들의 역할을 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1) 요한의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렸던 베드로가 역시 이 일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본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11f)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득히 찬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1b) 했는데 그물을 가득 채운 고기는 잔 고기는 없고 큰 고기만 153마리나 들었지만 그물을 상하지 않은 체로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153마리의 생선의 숫자로 상징을 찾으려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것 역시 그렇게 신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작은 생선들은 수(數)에 치지 않고 바다에 던져서 살려 주시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게 하신 고기는 모두 숫자에 넣을 만큼 큰 것들이었다는 이해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생선을 한꺼번에 그물에 모아 선별하고 크기를 구별하여 구분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 없다. 앞에서 창조주로서 주님을 말했지만 우리 말로 잔챙이를 골라낼 필요가 없는 성체들 만을 잡게 하신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 앞에서 이미 봤던 대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했던 것처럼 이미 아침식사는 준비되어 있었고 생선을 완전히 정리한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권하심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향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초청이다. 일반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저들의 결과에 식탁을 준비해줄 만한 가치가 없었겠지만 우리 주님은 그들의 모습 속에서 갈릴리의 생선을 잡는 데는 실패했을지라도 장차 사람을 낚는 저들의 미래를 보시며 격려하시고 힘주심을 이해하게 된다.
다만 되어진 모든 상황속에서 제자들 모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던 까닭에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b)는 요한의 기록도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3) 저물어가는 벳새다의 언덕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적으로 굶주린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에게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는 거두었던 6장의 이적처럼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에는 언제나 원대로 필요를 따라 주심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6:11)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 이것은 요한 자신이 기록한 주님의 부활 후 나타나심의 네번째이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을 제외한 것으로 여겨지는 데 그것은 여기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b)는 단서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아직 성령의 오시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오직 육신에 있는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음으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고 예전의 고기잡이에 복귀해 보지만 밤새껏 고생의 대가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저들의 삶에 공허와 수고만이 가득함을 보여주신 일련의 주님의 또 다른 가르침이셨다.
비록 날이 새어가 새 날이 시작되었음에도 고생과 허탈감 만이 가득했던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순종하였을 때 나타난 사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 없는 어떤 노력보다도 함께 하심이 풍성하고 넘치며 평안함을 알게 하신 또 다른 주님의 사랑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르지 않은 약속이며 확신이다. 우리가 이미 15:5에서 봤던 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확신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삶이 되지 않는 임마누엘의 삶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과 영광을 풍성히 누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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