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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7:1~5 2021-02-14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 세상에서 그래도 자유스럽게 움직이실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순종하고 따르는 제자들과 교회를 위한 대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주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어떤 기도보다도 긴 기도이다.

그러나 이 기도조차도 뚜렷한 질서와 순서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예수님 다운 면모를 보여주시고 있는데 먼저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오늘 본문(1~5)에서 보게 되고 다음으로 세상에서 성령과 더불어 자신이 완성할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위해 연이어 기도하신다(6~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직접 연관된 제자들 만을 위한 기도를 넘어 장차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되어질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심을 마지막 부분에서(20~26) 기도 하심으로서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조차 기도하셨음을 감사하게 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와 계실 때 벌써 우리를 위해서까지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 기도를 계속 하고 계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이러한 주님의 기도 덕택에 내(우리)가 있고 오늘 믿음을 부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감사하게 된다.

믿음의 사람들조차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생도 이 기도 중에서 은연 중에 배우게 되는데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귀중한 진리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또 오늘 기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지만 그 구하시는 영광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광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서 주님께서 구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Ⅰ. 마지막의 기도 조차도(1)

오늘 첫 부분에서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모습을 읽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제목으로 잡은 말씀처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라는 고백적인 내용을 본다. 말씀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행동에는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정해 두신 때에 맞추심을 배운다.

또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하였지만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을 모면하게 해 달라시는 내용은 없고 오로지 자신이 행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룸으로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시는 내용뿐이다.

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3~8) 모두 24번의 때를 언급하고 있다. “때[ὥρα, 시간, 시기, 기회]”

공교롭게도 24번은 하루 24시간과 같고 그 중에서 ⅓인 8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이기 때문에 2시간에 3번의 좋은 때와 어려운 때가 우리에게 지나간다는 이론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때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이 때를 잘 만난다면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때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때를 만드시는 데서 역시 창조주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시면서조차 때를 바르게 사용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부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4:4)이라는 기록과 함께 가심의 때 역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시는 고백을 하시는 것을 본다.

이 솔로몬의 표현처럼 많은 때가 있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속에서는 늘 상대적이고 그 첫 번의 “죽일 때가 있고” 라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때의 고백은 이 가장 안타까운 때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세상에서 창조주로서의 지배하고 다스리는 때를 버리시고 우리와 꼭 같은 때를 가지셨지만 그 절정이 제자들이 바라는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때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들과 같이 7~80을 살고 가는 것도 아니고 33년여의 인생의 귀중한 정점에서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는 많이 감사할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피조물인 우리야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1f)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일깨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서 얼굴을 들어 자신의 온 곳이요 경외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다시 눈을 드신다. 땅의 제자들과 교제를 하신 주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시기 위해서 눈을 우러러 드시는 모습을 요한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 주고 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m)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향한 맡김이며 인정이다. 앞에서도 요한은 어둠의 하수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죽이고자 시도하였음을 기록한 바 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7:30)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8:20b)는 기록으로 봐서 주님의 희생조차도 반드시 계획되고 예정된 때에 이루어짐을 증거하고 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b) 여기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달라.’시는 내용으로 들리지만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가 곧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이 창세전에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다.

그러므로 사실에 있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 드리는 것은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 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게 된다. 영광은 이 땅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라는 사실로 주님다운 고백이요 모범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 기도의 모델이다.



Ⅱ. 기도속에서도 말씀하시는 영생(2~4)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는 그 기도 내용에서도 많은 진리를 담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고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주신 이유와 영생의 이해는 물론이고 다음 제목에서도 생각하게 될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 이 말씀도 내용을 앞뒤로 바꿔서 이해해볼 필요가 있고 대부분의 영어 번역복들이 역시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as You have given Him authority over all flesh, that He should give eternal life to as many as You have given Him.” (NKJ) 모든 육체들 위에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대로 그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이다. 모든 교회의 권위[ἐξουσία]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만한다.

앞에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는 말씀을 나눈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끼치심을 고백하고 이것을 위하여 자신과 교회에게 권세를 주셨음을 증거하신다.

모든 능력에 있어서 대적들이 이길 수 없는 권능을 주시는 것은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5)

다음으로 신앙의 사람들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영생이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소개되어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세상의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꼭 복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에게는 생명 나무 열매를 금하심을 본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그러나 성경이 선언하는 영생은 먼저는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 독특한 것은 OT에서는 이 “영생”이라는 표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세상의 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어떤 대상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고도 남는 것을 역사 속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하나님과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기만 하면 짐승 같은 삶에서 사람의 삶으로 인생이 바뀌는 것은 꼭 저 유명한 사람들의 참회록이 아니더라도 제(우리) 자신 속에서도 보고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단순히 이 육신의 삶에 국한되지 않고 영원에까지 연결되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세상이 줄 수 없고 스스로 취해 가질 수 없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시는 영생이다.

역사 속에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변화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복음의 완성이전이지만 이 요한복음에서 한 사람의 예를 든다면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여인이 또한 영생을 얻은 모범이 되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수치(羞恥)로 인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여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와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 정오(正午)에 다녔다.

다섯 남자와 함께 살아봤지만 지금도 결혼하지 않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무절제하고 기본을 잃어버린 삶을 살았고 이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델이었다.

그러던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물 한 모금 달라시는 주님의 부탁에도 오히려 시비(是非)를 걸 정도로 여유가 없는 불행한 삶이었지만 자신의 이러한 부끄럽고 초라한 인생을 주님으로부터 발각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고 사죄를 알고 삶이 바뀐다.

자신의 용서받은 부끄러움을 가지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동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게 하는 전도의 일을 감당하였고 그 이후에는 분명 그녀의 삶은 과거의 저주받은 듯한 불행에 더 이상 머물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복음을 제대로만 접하게 되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계속 고집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되물을 수 있는 것이 ‘그렇다면 왜, 믿는다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옳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 한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이 시대에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답변이다. “영생(생명)”과 “저주”의 차이는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에 있는 가치의 차이이다. 그 사람의 중심에 성령께서 성전삼고 계시는가 그대로 황량하고 고달픈 세상, 아니 더 직접적으로 어두움의 영이 자리하고 있는가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요즘 수요일 밤에 나누고 있는 사울과 다윗).

왜냐하면 환경이 좋은 곳에서는 누구나 행복해할 수 있고 복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이나 생명과 기쁨은 환경이 좋은 곳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영생은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혁신(革新, innovation)이고 미래지향적이다.

비록 힘겹고 어려운 인생이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며 자신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힘겨운 환경을 성령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상황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이러한 내면의 능력이 환경을 뒤집고 바꿔가는 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또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미래는 더 밝고 행복하게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영생”을 너무 멀리 어렵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생각부터 바꿔야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 이 말씀도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주님의 말씀 속에서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그 각 거듭난 사람들 속에 행하라고 주신 사명들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 속에 다 꼭 같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사명과 솔로몬에게 주신 사명이 다른 것처럼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신 모두의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은 다 다르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 모두가 솔로몬에게 필요한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감당할 수 있는 일들임도 확신할 필요가 있다(고전10:13). 또 그것을 알아 내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자신이 어떤 큰 일을 계획하고 구상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렘45:5f)]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을 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서 이루어 드리는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Ⅲ. 영화롭게 하옵소서(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사실적인 역사를 바로 앞에 두고 창세전에 함께 누렸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광을 회상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하신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서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할 것을 기도로 고백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5f) 이미 이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와 선재(先在) 즉, 먼저 계셨음을 선포하신 바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1~2)

솔로몬은 지혜서인 잠언서에서 지혜를 의인화하여 신약의 말씀(λόγος)과 다르지 않게 표현하면서 창세전에 계셨던 것으로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8:22~26)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영광을 말씀하시면서 그럼에도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예정을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지만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아니, 그것과는 정 반대되는 인류의 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수치와 아픔을 감당하여 다시 그 영광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십사 하는 요청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고 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는 과거의 모습과 십자가를 지시고 완성하실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라는 미래의 회복할 영화 속에는 다시 그 영화에 참여하여 이 하나님의 영화를 함께 찬양할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성도들의 영화까지를 포함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바로 앞에 당하게 되실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b) 라는 표현은 사실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감당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다름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주님과 비교될 수 없는 오늘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우리의 역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사실 강심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면 그 일에 관계없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베드로처럼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서 큰소리 치다가는 낱낱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때가 아프고 힘겨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고난을 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기뻐하고 순종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시대의 성도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작은 권위라도 주어졌다면 그것으로 한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데 사용되야 할 것이다.

영생은 죄인 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살고 행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가 썩어질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로 바뀌어 질 때 벌써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라는 자신만만한 천국의 성도로 살자.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홀로 영화로우신 창조주 하나님, 그러나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범죄하여 고통 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수치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통하여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 주시려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본받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