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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6:25~33 2021-02-07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이 땅에서의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에 영적인 진리를 계속 가르치셨지만 아직 육신적인 제자들은 처음에는 질문도 하였지만 이제는 고개를 계속 갸우뚱하며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가운데 가르침을 계속하신다.

결국 결론적인 부분에 와서야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신앙고백을 듣고 저들의 앞길이 성령의 지도에 있겠지만 결코 평탄하지 못할 것이지만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저들도 이길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사실 이 말씀의 제목은 일반적으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내용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은 오늘 제목처럼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b)는 모습이 이루어 진다면 자연적이기 때문에 이런 제목아래에서 나누고자 한다.

시시각각 주님께 대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적대감과 죽이려는 흉계를 함께 지켜봐 왔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그랬는데 주님께서 가시고 자신들만 남으면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여 숙연해 있는 그들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격려는 뒤이어지는 일들로 미루어 제자들이 실감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 될 것에 대한 예언도 이미 주님께서 하셨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f) 그럼에도 나중 성령께서 저들에게 오시고 함께 하실 때 이 때의 격려는 되살아나고 상황이 더 힘겨워졌음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Ⅰ. …이후에는 알리라(25~2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 하신 바 있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장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이를 수밖에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게 하시려는 이유가 아니라 이해하도록 애쓰신 것이 분명하지만 어려워하는 대상에게는 손에 쥐어 줘도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제자들의 이해의 어려움은 어떤 것 보다도 서로의 가치관(하늘-세상)이 다른 이유였음이 가장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이해관계는 서로의 이해를 어렵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25f)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여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가까이는 산고의 비유(21)이고 더 넓게 보면 15장의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을 이루기 위해 가심을 산고에 비유하신 것은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비유로 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서도 나중 이 일이 이루어지고 성령이 오셔서 이해하게 된 것을 이미 우리는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때가 이르면 다시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25m) 여기의 이해의 관건도 “때가 이르면”이지만 연결되어지는 내용에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그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신 것을 제자들이 넘겨받아 역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루신 구속의 은총을 땅끝까지 이루어 갈 것을 말씀하심이다.

앞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b) 말씀하셨지만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25b)하신 것도 역시 성령의 사역이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증언하셨기 때문에 역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 제자들과의 이 다락방 교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이미 (14:13, 14, 15:16, 16:23, 24) 다섯 번씩이나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나 역시 성령께서 오시면 아버지께 제자들이 성령과 더불어 직접 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26f) 하였 듯이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핍박 받으며 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30)는 기록을 누가가 남겨주고 있다.

이런 경지에까지 가게 될 경우에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 하신 것은 지금 제자들과 육신에 계실 때와 같이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 로마서8:34과 같은 중보의 기도를 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 하신 말씀 역시 당시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중요한 신앙적 원리를 주시는 교훈이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뒤집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는 사람이다.’(for the Father Himself loves you, because you have loved Me, and have believed that I came forth from God. -대부분의 영어 역본) 라고 받아들이면 죄인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는 통로를 분명히 정의하고 있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28) 이 한절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다.

다음 17장에서도 기도하시면서 고백하고 계시듯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5) 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부터 함께 계셨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의 구속의 역사와 과정을 이 한절 속에 모두 담고 있고 이 말씀은 주께서 심판을 위하여 이 땅 위에 다시 오실 재림도 전제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귀한 교훈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와 구속의 역사를 모두 거론하시는 말씀이면서 그것이 아직은 육신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약속이 이루어지고 성령께서 오시면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임을 증거하신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친히 사랑받을 수 있는 귀중한 이치를 증거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생명의 교훈이다.



Ⅱ. 제자들의 신앙고백(29~30)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와 구속의 역사를 모두 말씀하시자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고 있는 내용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29) 사실 누구에게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기본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유는 더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사실 이 고백자체도 다음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이나 진행되는 사건을 보면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것은; 밝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해한 제자들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셨을 때 모두 흩어져 도망을 갈리 만무하지만 그런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고백이 조금은 과장된 것이었다 생각된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지금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시니’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주님께서 앞에서도 “밝히[παρῥησία, 숨김없이, 솔직함]” 말씀하지 않으시고 숨기거나 이해하지 못하도록 의도하신 일이 없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 자체가 모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면 이들의 이런 고백은 어느 정도까지는 진심을 가지고 말씀드린 것으로도 받아들여 진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하는 심정까지도 들여다보고 계셨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분명히 아셨을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 맞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30) 사실 이 고백도 일반적으로 성경속에서 가르치는 교훈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고백은 “우리가 … 아나이다 - 믿사옵나이다”라는 순서로 성경전체의 신앙의 논리와는 다소 모순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앞장에서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5:16) 하셨듯이 죄인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적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다 떠났을 때 베드로는 오히려 바람직한 신앙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해 드리는 고백과 다르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9) 즉,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라는 순서가 바른 순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30f) 라는 제자들의 고백은 영적인 신앙고백이기보다는 이성적인 납득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야말로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이해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이치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30) 주님께서는 사람의 질문을 기다리실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는다는 투의 말씀이지만 이것은 깊은 심령의 고백이기 보다는 제자들의 단순한 이해정도로 보인다.

왜,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는가 하면 여기에 답변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나 차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이런 종류의 이해로 큰 소리치던 베드로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는 말도 사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워하신 주님은 그래도 이런 제자들의 상태를 이해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막14:38) 하셨는데 이성적으로 원하는 것을 감당하기에 죄성(罪性)을 그대로 가진 육신은 연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의 부족한 이 고백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 구속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오심만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의 모순이다.

이제 모든 신앙적 불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채워지고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 속에 오셔서 의심없이 믿고 고백드릴 수 있는 은혜가 강물처럼 넘치는 우리의 시대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모든 사랑을 감사하고 보다 온전한 고백과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Ⅲ.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33)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의 고백을 부정하시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 일이 이루어질 때는 역시 흩어지겠고 그래도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은 비록 제자들이 다 실족하여 흩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과 임마누엘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신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은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세상을 이겼던 것과 같이 승리할 것이라는 소망을 덧붙이고 계시고 이것이야 말로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승리의 확신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들으셨지만 오히려 주님은 거기에 반문하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Do you now believe?” “이제 믿는다는 것이냐?”는 질문형식으로 되물으신 것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붙여지는 다음절의 내용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이미13:36~38에서 본 바 있다. 잠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떠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 말씀하셨다.

여기에 대해 다시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 큰 소리를 친다. 여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이 어쩌면 이 v31과 비슷하게 들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38f) 확인하셨고 하반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b)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v32f과 같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f) 이미 미래에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자신이 고독한 심문을 받고 있는 모습을 이미 영안(靈眼)으로 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이전부터 철저한 고독을 맛보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대우와는 다르게 그 고독과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확신하는 고백을 드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b)

사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같은 이러한 확신만 가진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는 천국백성이면 당연히 지금도 미래에도 영원에서도 잃지 않을 약속이다. 이것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주어진 언약이다.

십자가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 20)

물론 v19~20f에 명령하신 약속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러면서도 이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을 다 버리고 흩어질 것이기 때문에 서운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에 남을 제자들을 염려하여 그들이 주님의 약속안에서 머물러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세상에서 받는 어려움을 덮고도 남을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서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f)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가 기도하시기전 이 모든 가르침을 주신 이유를 이 한마디로 결론하신다. 즉, 제자들이 어떤 일이나 상황을 만나고 당할지라도 평정을 잃지 않도록 단속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미 앞에서도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약속하신 바 있고 이것은 이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효력 있는 약속이다.

그런 다음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b)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조건이 붙어있는 약속이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따르려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제자의 삶의 불편함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환난을 이기고도 남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14:27f)는 엄청난 격려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다시 “담대하라![θαρσέω,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θάρσος, 확신, 자신]” 도전하신다. 담대한 용기는 확신에서만 나올 수 있다. 확신이나 자신을 가지지 못하는 일에 목숨을 바칠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런 입장에서 주님의 이 “담대하라!”시는 도전은 ‘복음에, 십자가에 확신을 가지라!’는 격려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물론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 자연 피조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대항하는 어두움의 세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는 대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하시는 것은 주님께는 당연한 것이고 같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함께 누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들도 당연하다는 이치가 된다. 거기에 단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복음에 대한 확신 뿐이다.

복음은 완성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들으면서도 확실히 이해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들은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시점에는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깨달은 것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려고만 한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완벽하게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보다 더 완벽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고 사랑할 때 더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가운데 바르게 믿음생활 하려는 데도, 때로는 오해를 당해 모든 주변의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난다 해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지 주님 안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으로부터는 환난을 당할 수 있지만 복음에 확신을 가진다면 그 확신과 용기로 주님처럼 세상을 넉넉히 이길 것이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