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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6:16~24 2021-01-3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요16:16~24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성하시면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을 계속 말씀하시지만 이미 떠나가신다는 한 가지에 마음이 쏠려 더 이상 성령의 오심의 약속도 먹히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직접적인 위로와 격려를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내용이 오늘의 말씀이다.

사람의 안타까움은 좋은 것과 궂은 것을 함께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에 마음을 두는 것보다 나쁜 쪽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죄와 형벌로 인한 어두운 마음의 공포를 가진 과거의 습성이면서 죄의 종 노릇에 익숙해 있는 단면일 것이다.

가령, 상 받을 일과 형벌 받을 일을 함께 이야기한다면 상 받을 일로 기뻐하기 보다는 형벌 받을 일을 두고 더 고민하고 힘겨워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그 반대여야 함에도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이 더 일반적임을 본다.

더 가까운 예는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불이익과 비교될 수 없는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롬8:18)에도 당장에 당하는 불이익이 더 가깝게 다가오고 거기에 좌우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까지의 죄로 흘러온 어두움의 역사를 자신이 변혁하여 죄로 인한 공포에서 자유케 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힘입게 하시겠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를 말씀하시지만 자신들이 상상하고 기대해 왔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직접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유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이유에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십자가보다는 이 땅에 임시적으로 남겨 두시고 가실 제자들에게 더 마음을 두심을 볼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히4:15)라는 말씀이 결코 공치사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Ⅰ. 조금 있으면(16~19)

점점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심은 인간적으로는 옥죄어 오는 다급함도 있었겠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대신한 이 처절한 아픔과 수치를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입장이 먼저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시킨다.

사실 아직도 다가오는 이별을 실감하지 못한 채로 허탈한 모습으로 막연히 듣고 만 앉아있는 제자들에게 사실을 일깨우실 필요가 있으셨다. 이제는 너희들이 현실을 바로 보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라고 경계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이루어지라는 일이 한주간도 아니고 한달도 아닌 다음 순간부터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16) 이 넉 절 속에 “조금[μικρόν, 시간 혹은 정도의 간격, 잠간, 잠시동안]” 이라는 낱말이 모두 7번 사용되고 있다. 사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씀도 질문을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낱말의 의미가 어려워서 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16f) 앞에서 예수께 유대인들이 물었던 질문처럼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12:34b) 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메시야 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실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16f)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이것은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죄에 있는 인류를 피로 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죽음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이별일 수도 있고 다시 구속을 완성하시고 아버지께로 승천해 가신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b) 하시는 것은 저들에게 더 혼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음은 이미 창세이전부터 계획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바램이 무엇이든 이 귀한 역사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잠시 저들을 떠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b) 하신 것은 3일 후에 부활하여 제자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 가장 가까운 “조금 있으면”이고 그 후 40일 후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성령으로 오셔서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겠지만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시는 주님께는 오늘 우리에게는 재림하셔서 다시 보시겠다는 언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육신적인 제자들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17) 주님께 직접 질문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서로 간에 이 말씀의 이해를 확인하고 있다.

앞의 말씀은 같은 말씀이지만 제자들이 덧붙인 서로의 의논은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17b) 하는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듣기는 들은 것으로 확인이 된다.

사실 영적인 이치가 이런 것이다. 듣기는 듣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영의 세계를 육신의 가치로 이해하는 한계의 모습은 여기에서 분명히 보는 것이다.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18)이라고 덧붙이는 데 여기 제자들의 궁금증은 바로 “조금 있으면”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서로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한 바 있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19) 이 말씀은 단순히 저들의 궁금증을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확인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이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산모의 산고를 비유하시는 것으로 답변을 주신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 승천과 재림을 불신자들에게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를 이 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고 우리 또한 영적이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귀중한 진리를 들으면서 궁금한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배운다.



Ⅱ. 그리스도의 고통과 생명(20~22)

사실 세상에는 많은 육체적 고통들이 있다. 전쟁이나 사고로 인한 인체의 손상이나 곤혹스러운 질병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괴롭혀 온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은 그래도 고통을 감소시키는 장치들이 발달하고 인권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인해서 사람의 육체적이나 인격적인 고통들을 최소화하려고 사형시키는 일조차 십자가형 같은 고통은 더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또 이 주님의 비유가 오늘 우리 시대에는 호소력이 약할 수도 있다. 아기를 낳는 것이 무통주사나 유도촉진제들과 같은 의학의 발달로 예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그 많은 아이를 낳으면서도 매번 ‘내가 이 아이를 낳고도 살 수 있을까!’ 하여 신발을 돌려 놓고 방에 들어가기까지도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전쟁이든 사고이든 질병이든 이런 모든 것들은 치료된다고 할지라도 소망적인 고통은 아니지만 사람에게 유일하게 소망을 주는 고통은 바로 아기를 낳는 산통(産痛)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그렇게 무참하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아이를 낳는 산통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랑이다.

또, 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부르짖으며 몸서리치신 희생의 은혜 덕택에 사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천국의 백성들이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 비유는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여기에 이것이 참이라는 말씀을 강조하시려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요한복음의 특징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가심에 대한 엇갈린 양편의 반응을 말씀하신다.

그 대립되는 앞부분에서 양편은 “너희”와 “세상”의 대조이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 “세상은 기뻐하리라” 하심으로서 주님의 가심(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각각 다르게 언급하신다. 겉으로 나타나는 상황으로는 이런 상반된 반응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게 될 뒤의 대조는 오로지 제자들에게만 변화되는 반응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b) 이것은 신앙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앞에 “조금 있으면”의 변화이다.

마귀 사탄은 간악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당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놓고 그 순간에는 아주 짧은 순간에 승리를 외쳤을 것이다.

아주 조금 후에 마귀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죽은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일은 끝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로도 “조금 있으면”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이 고난을 좀 겪더라도 그 나중 결과가 좋으면 그 고난이 가치가 있고 고난을 되돌아보면서 오히려 더 큰 감사를 누리게 된다. 요즘 듣기 좋은 말로 ‘꽃 길만 걸으라!’는 격려가 있지만 이 말은 말 자체가 모순된다.

사실 가장 짧은 그야말로 “조금 있으면” 지고 마는 것이 꽃이니 영광의 시간이 길지 못함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꽃은 시드나(사40:8) 꽃은 떨어지되(벧전1:24)]. 그럴 뿐 아니라 그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 기간이 꽃이 핀 영광의 시간에 비교하면 너무나 길다.

세상의 표현을 빌리면 너무나 흔한 [국화 옆에서]라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미당 서정주)는 사실 인생의 질곡을 되뇌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 그리고 꽃이 필 수 없는 겨울도 있으므로 ‘꽃 길만 걸으라!’는 말은 듣기는 좋지만 실제적이지 못한 바램 일 뿐이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1) 이 말씀은 전혀 어려운 비유가 아니다.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산모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까를 걱정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건강한 아기를 받아서 옆에 누이면 그 고통은 온데 간데없이 감격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죽음으로 비유하신다.

연이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소망을 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가 죄에서 자유를 찾을 일을 하시기 위해서 죽음으로 가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은 근심하지만 그 구속을 완성하고 다시 보게 될 때 그 기쁨의 감격은 지금의 근심과 비교될 수 없이 클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거기에 하나 더하여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하심으로서 그 감격이 계속해서 지속될 것을 약속하시는 데 사실 제자들은 이 기쁨 때문에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놓았던 모습을 사도행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영광을 바라고 현재의 고난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것을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임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읽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그리고 그에 따른 상급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8)고 바울이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약속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들이다.



Ⅲ.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심(23~24)

오늘의 마지막 부분은 이제 장래에 제자들이 지금처럼 근심하고 묻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응답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제자들이 구할 것이 거의 없었다. 모든 필요한 것을 주님께서 늘 채우셨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먹을 것 까지도 때로는 기적을 통해서까지 제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풍성하도록 채우셨고 사실 그것 때문에 군중들로부터 오해를 받기까지 하셨다(요6:15).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야만 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도록 말씀하셨고 이러한 가르침이 처음은 아니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3~14) “…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b)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앞에서 가르치셨던 내용과는 조금은 차이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f) 하셨는데 먼저는 “그 날에”라는 때가 과연 언제인가 하는 것이 첫번째 이해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사용하셨던 “그 날”은 이 역사의 마지막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것들을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다(마24, 25, 막13, 눅21장)

그럼에도 본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제자들끼리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고 성령의 오심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생각하면 예수께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때로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말씀하셨기 때문에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도 그냥 하시는 약속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3m)로 확인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b)이 말씀은 앞에서 인용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b)는 말씀과 헬라어에서는 어순(語順)이 다르지 않다.

여기 중요한 두가지 표현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내 이름으로”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면 그것이 신령한 지식에 관한 것이었던지 삶에 필요한 것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절치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기도의 약속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과 인류를 위한 죄의 해결자로 이루실 구원의 완성 후의 확실한 중보자로서의 언약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 앞에서 지적했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하셨지만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는 오실 성령과 더불어 중보자로 함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감격은 세상에서 스스로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데서 기쁨이 비교될 수 없으리만큼 넘칠 것을 약속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 있으면”은 고통의 시간과 기다리는 시간에는 차이가 크다. 힘겨운 시간은 그것이 “조금 있으면” 끝난다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고 행복해서 울고 웃는 “조금 있으면”은 너무나 바람처럼 빨리 지나가 버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3시간을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몇 마디의 말씀을 하시기지 않고 그 사흘 같은 시간을 견디신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고 자신이 감당하여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라도 그 아들의 고난은 보실 수 없으셔서 그 시간 동안은 땅에 캄캄한 어두움으로 가려졌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인류를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오직 한가지의 소망으로 그 시간을 다 견디신 후에 “다 이루었다!”(19:30)하시고 운명하셨다.

육체를 기준 한 세상 속에서의 이 “조금 있으면”을 우리는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래야 옳을 것이다.

세상의 영광을 위한 고난도 아름답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을 위한 고난은 세상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 고난 뒤에 올 영광을, 그것도 복음을 위한 해산의 고통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이기 때문에 절대로 헛되지 않음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라고 고백함을 듣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b)는 언약은 우리 믿음의 사람이면 영원까지 효과 있는 약속이다. 다른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이 엄청난 특권을 완전히 넘치도록(요즘 표현으로 full로) 사용하여 생명의 열매를 풍성이 맺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