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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6:1~8 2021-01-1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15장을 마무리하는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지적하는 자신을 세상이 미워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살 진리의 사람들을 세상은 역시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앞으로 이렇게 세상과 적대관계에 있게 될 제자들이지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능히 그들이 감당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는 아닐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믿었던 제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을 통한 말씀도 듣고 순종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16장에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하실 역할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증거하신다. 성령과 세상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성령께서 제자들을 진리로 이끄실 것을 약속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데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잠시 헤어지는 아픔이 있겠지만 다시 오심으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물론 성령으로 다시 오심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의 필요는 구하는 것마다 받을 것이고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겠지만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29~30) 사람들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상이 떠나려 한다면 꼭 붙잡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안되요]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셨다가 오신다는 약속에도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저들의 귀에 들리지 않고 떠나가신다는 말씀만 들려서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가시는 것이 너희들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는 말씀이 납득될 리 없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로 가심은 인류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전제하기 때문에 제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 여전히 육신의 한계에 머무르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서 떠나신다는 것만 두려워할 뿐이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오늘 제목과 같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자신들과 머물러 계시는 동안 갈릴리 어부 때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었다. 많은 불치 병자들의 치료는 물론이고 기적의 떡으로 배 불리시는가 하면 죽어 썩어서 냄새나는 사람을 살리는 기적 까지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 자신들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으리라 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래를 내다보시는 주님은 그 두려워하고 안타까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자신이 구속을 이루셔야 만 그런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땅에 성령께서 오심으로의 유익은 오늘 우리들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서도 엄청난 일들을 하실 수 있다. 죄악 된 세상을 의로운 삶으로 이길 수 있고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죽는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는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죄의 노예가 되어 종 노릇하는 사람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가시고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럼으로 당시에 주님의 가심은 이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주시기 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Ⅰ. 세상의 착각(1~3)

세상은 어떤 것도 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사실 바른 판단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보루로 사람 속에 두신 양심조차도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바른 판단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진리를 대적하고 오히려 악을 옹호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되었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모든 사람의 기준이며 모델이시다.

잘못된 것은 정확한 기준에 비교해볼 때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바르게 볼 수 있게 되는 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누가복음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지 못하면 사람으로서는 비정상이다.

그럼에도 이 역사에 왔던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 하시는 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하신 말씀으로 과연 “이것”이라는 대명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떠나신 후에 세상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행했던 박해를 가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이를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고 실제로 이것은 오순절 이후 교회의 탄생과 함께 사실적으로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그런 상황이 닥칠지라도 미리 일어주신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또 약속으로 오실 성령을 의지하고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라 일러주시는 것인데 이것 역시 이미 역사 속에서 검증되어진 사실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2)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면 일단은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다르다는 것 만으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상대가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여 배척하고 반대하는 것은 사람들의 죄성(罪性)의 한 단면이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미 앞에 9장에서 시각 장애자였던 사람이 예수님의 역사(役事)로 눈을 뜨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역사임을 감지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 부모가 혹 이것을 인정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 부모 역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것을 봤고 그 이유를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 이러라”(22)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앞의 9장에서 봤던 우려가 사실로 이루어지면서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못하여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고 이방인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이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어쩌면 가장 심각한 불이익이 될 것이다.

저들 대부분이 할 수 있는 것이라 고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이었지만 이것조차 3년전에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만 두었고 나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 들이 밤새껏 고기 잡는 일을 해봤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이 사실(21:3)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은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2) 이러한 예언은 사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증거하는 제자들을 죽이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전의 사울의 행동이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1:13; 빌3:6f)

현재에도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알라]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믿고 폭탄 테러 같은 짓을 하는데 심지어는 자신들의 몸에 폭약을 옷처럼 입고 죽는 것을 가장 위대한 순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메스컴들에서 듣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3)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딱한 일이지만 믿는 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못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데서 조심해야할 자세이다.



Ⅱ. 아버지께로 가심을 확인(4~6)

이 부분의 말씀은 뒤에서부터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6)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며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한결같이 근심만 가득하다.

사실 제자들의 근심은 그들이 말하는 데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할 주님을 위한 근심이 아니라 남겨두고 가시는 자신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것이고, 비록 주님께서 가신다고 할지라도 다른 보혜사의 약속과 기도의 응답을 확실히 하심에도 제자들의 근심은 그치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가는 것을 보심이 안타까우셨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5)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5f) 사실 이 말씀을 통해서 확신과 감사를 가져야만 했고 근심을 걷어버릴 수 있어야만 했다.

자신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부터 오셨고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보내셨던 그 분께로 되돌아 가신다면 걱정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을 위해 보내신 분이시라면 다시 불러가시는 일도 목적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5b)라고 말씀하신 것이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것은 이미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13:36f) 물었고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라고 물었던 것을 지나치시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제자의 질문은 막연한 의심으로 던진 것이었다면 여기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가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 자체가 사실 죽음으로 가시는 것이고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마음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임에도 제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묻기조차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미 마음에 두려움만 가득 가진 제자들에게는 이 말씀을 계속하셔도 제자들의 마음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이미 의심과 두려움의 장애물이 진실을 가려 버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앞의 두 제자의 질문과 주님의 이 말씀은 서로 다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계속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도 앞에 닥칠 일들을 준비해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

어찌 보면 앞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라신 내용의 반복이면서 확인이다.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4m)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좋은 교훈인 것은 당시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가시고 성령의 오심과 함께 이 역사가 어떻게 흐르고 끝날 것을 숨김없이 이미 모두 말씀해 주시면서 친구라고 까지 말씀하신 바 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 바로 앞장에서 말씀하신 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은 이미 모두 말씀하셨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혼란할 필요가 없이 주신 말씀에 순종만 한다면 영광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할렐루야!

그런 다음에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b) 주님께서 앞에서도 아주 가끔 자신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것에는 마음도 두지 않으려는 모습들이었다.

가셔야 한다는 말씀만으로 안타까워하면서 주님의 가심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 제자들이 육신을 입고 계신 주님으로서는 서운하시기도 하셨을 법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이미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생각없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이다. 긴장이나 반응도 없음을 안타까워하시고 지금 다가오는 일이 그렇게 안일하게 맞을 일이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진전되는 시간 속에서 계속 교훈 하신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여 사실과 본질을 바로 알고 파악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Ⅲ. 떠나가는 것이 유익인 이유(7~8)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계속 자신들과 함께 계시면서 로마의 앞제에서까지 완전히 자유를 찾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기대와는 정 반대로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디로 가셔야 한다는 말씀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 개인의 유익과 교회의 유익, 또는 우리 교회의 유익과 이 지구촌의 주님의 모든 교회들의 유익을 저울질하게 되는데; 짧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나와 직결되는 우리와 연결되는 가까운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의 양극화(兩極化) 현상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조금만 성숙할 수 있다면 당장의 유익보다는 장래를 위한 보다 나은 유익을 생각할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요 신앙인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이유에서 신앙은 반드시 성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 대해 성장을 당부하여 썩어질 것을 얻는 것보다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성숙한 성품을 부탁하고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4)

이별의 아쉬움만을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라고 격려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내가 분명한 사실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되는 것은 만약 내가 가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너희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격려하고 가르칠 수 있는 성령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육신으로만 함께 계시는 한 온 인류를 죄로부터 자유케 할 구속의 역사를 이룰 수 없고 공간적으로도 제자들에게만 유익을 주실 수 있지만 구속의 은혜를 이루시고 가시면 공간과 시간의 한계 넘어서서 모든 하나님을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 있다는 비교될 수 없는 인류의 유익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이제 다음 주의 말씀과 연결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보내실 성령의 역할들을 말씀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어찌 보면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는 위로하고 책망하는 개인의 돕는 분으로만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는 그 범위를 세상을 대상 하시는 것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격려보다는 책망하는 것이 주 임무인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14:26의 제자들에게 대한 역할과는 다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v8의 세상을 향한 성령의 사역은 주로 책망하는 일인데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게 될 것이다.’처럼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세상은 당연히 책망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 “책망하다[ἐλέγχω, 훈계하다,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라는 성령의 사역은 그 의미를 볼 때 ‘죄에 대해 깨닫게 하고 어떤 잘못을 증명하여 꾸짖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세상을 회개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이 말씀, 성령의 사역의 바른 이해는 바로 다음절부터 설명하고 있다.

세상이 안타깝고 무지한 것은 하나님의 바른 기준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대적까지 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의 정의를 위한 것이며 창조의 질서에 맞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시간이나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두려움없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삶의 지침을 주셨고 그것은 바뀌거나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일생 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갈 수 있는 메뉴얼이라는 것이다.

때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손해나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긴 안목에서 나 개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늘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믿으시기를…